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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총파업투쟁의 시발점이 된 KBS 노동자들의 투쟁
시기 : 1990년 3월 2일 ~ 5월 18일
KBS 노동자들의 투쟁 배경과 의의
1990년 3월 18일 노태우가 KBS 사장에 서기원을 임명하자 노동조합은 “정권의 충견이 또다시 KBS 사장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그때만 해도 이 투쟁이 1990년 정세를 가늠하는 전면적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KBS 노동자들은 그간의 관제언론이라는 오명을 한꺼번에 씻어내며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하에서 방송사 파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그간 확고하게 언론을 장악해 지배이데올로기를 구축해왔던 데다, 특히 이후 진행될 지방자치제 선거와 1992년 대통령선거 등에서 권력 재창출을 위한 전진기지로써 언론을 도구화해 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깊숙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송사 노동자들은 고임금·전문직 노동자라는 점에서 투쟁의 절실함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었다.
반면 노태우 정권의 언론장악 의도는 매우 집요했는데 1989년 공안 통치하에서 <한겨레신문>을 와해시키려던 음모, 1989년 말 <경향신문> 초대 간부 5명의 강제해직, 이와 함께 KBS노조 와해 시도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특히 노태우 정권은 1989년 초부터 ‘방송제도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민영상업방송 허용을 골자로 한 방송구조 개편을 추진해 왔는데, 이는 구체적으로는 재벌이나 민간우익단체에 방송사 설립을 허용하려는 음모였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파업투쟁이 가능했던 이유는 △1989년 초부터 추진되어온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에 대한 불만 심화 △KBS의 법정수당 변칙지출 사건에 대한 분노 축적 △PD뇌물수수 사건 등을 왜곡해 선전함으로써 KBS 전체 노동자들을 악선전하고 이를 토대로 KBS 노동자들을 굴종시키려는 음모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투쟁현장에 실제 공권력까지 투입함으로써 방송사를 짓밟고 방송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시한 데 따른 분노가 KBS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KBS 투쟁의 구체적 목표는 노태우가 임명한 ‘서기원 사장 퇴진’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그 본질적인 목표는 민자당의 언론장악 음모에 맞선 전 국민의 ‘민주언론 수호투쟁’이었다. 나아가 KBS 투쟁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정부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 투쟁의 승패는 1990년 상반기 노동자 대중투쟁의 공간과 조건을 확보하는 지렛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민주언론 수호투쟁을 전개하는 언론노동자와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연대야말로 제조업과 비제조업으로 나뉘어 발전해 온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적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로서의 의미가 컸다.
1차 방송제작거부 투쟁 이전 1990년 1월 25일 해묵은 ‘공식비밀’인 연예 PD들의 촌지를 ‘연예 PD 뇌물사건’으로 포장하여 구속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민자당 야합시비를 비껴가기 위한 전형적인 흥미유발성 사건이었으나, ‘방송강령’을 발표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노동조합으로서는 타격이 컸다. 노동조합은 방송윤리를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방송탄압으로 이어질 것에 대한 우려를 담은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어 감사원에서는 정기감사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음에도 국장급을 팀장으로 한 2차 감사를 실시, ‘법정수당 변태지출’ 사건을 터뜨리게 된다. 이 사건은 예산 부족과 이에 따른 감량경영의 고충을 이해한 노조의 양보로 근로기준법상 받아야 할 시간 외 수당의 일부만 총액으로 설정해 나누어 지급한 것인데, 예산을 횡령해 나눠먹기 한 사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러한 악의적인 감사는 “노조의 선심을 사기 위해 법정수당 미지급금을 이용해 노조의 선심을 사고 이 중 막대한 돈이 노조의 투쟁기금 및 전노협 지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주장에 따른 것이다. 결국 KBS 서영훈 사장은 이사회에서 3월 2일 자로 사표를 내게 된다. 2월 10일부터 5일간 진행된 감사결과가 2월 16일 청와대에 보고된 후 2월 20일 제주 4․3항쟁을 주제로 한 역사탐방이 방영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이 사건은 2월 27일 자 일간지들에 왜곡 보도되면서 크게 비화됐다. 노동조합은 2월 29일 ‘KBS에 대한 음해공작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본사 민주광장에서 조합원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비상총회를 열어 ‘KBS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300여 명의 조합원이 이사장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날 이사회는 감사원에서 요청한 사장 사표 수리를 3월 2일로 연기했다.
1990년 3월 2일, 최병렬 공보처장관은 KBS 조합원들의 강력한 항의에 굴복해 “KBS 사원의 급여는 중앙지 다른 주요 언론사보다 실제 20~30% 적다”는 해명성 발표를 했지만, 서영훈 사장의 사표는 수리됐다. 이날부터 노동조합은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3월 3일에는 민주광장에서 연 ‘KBS 자주수호 사원비상총회’에 700여 명이 참여했으며, 평민당 KBS 진상조사단이 파견돼 위원장과 경영진을 면담한 후 제1회의실 농성장을 방문했다. 철야농성 4일째인 3월 5일에도 700여 명이 참여한 ‘본사 사원총회’에서 KBS 자주권수호를 위해 서영훈 사장의 사표 반려를 촉구하고,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이사장실 폐쇄식과 투쟁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3월 6일에는 민주당 KBS 사태 진상조사단의 방문이 있었고, 1,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사원총회가 개최됐다. 이날 언론노련 소속 조합원 800여 명은 프레스센터 앞에서 집회를 하고 시내 10여 곳에서 대국민 홍보선전을 진행했다. 그러나 3월 8일 결국 서영훈 사장의 사표수리가 발표되고 3월 12일에는 이임식을 하게 된다.
철야농성 8일째인 3월 9일, 노동조합은 제9차 비상대의원대회를 했으며, 이날 참가 대의원들의 서명으로 사장실 봉인식이 진행됐다. 3월 18일에는 ‘정권의 충견이 또다시 KBS 사장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KBS 위상 및 후임사장 문제와 관련한 각 부서별, 지부·분회별 토론을 개최했다. 이날 이후 투쟁이 다소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노동조합은 농성 33일째인 4월 3일, 이사회가 3차 투표 끝에 서기원을 사장에 임명제청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KBS 비상대책위원회와 집행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한 뒤 집행위원과 비상대책위원들로 농성을 확대했다. 4월 4일에는 출근하는 사원에게 유인물과 리본을 달아주고 서기원 사장 취임 거부 전사원 서명작업을 시작했으며 민주광장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KBS 자주권 쟁취 전사원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4월 6일, 노동조합은 집행부 구속에 대비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관제사장 저지단’을 구성해 단체복을 맞춰 입었으며, ‘서기원 출근 저지 특별감시조’를 편성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날 박성범 본부장은 구사대를 자청하는 성명을 발표해 조합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4월 7일에는 700여 조합원들이 모인 가운데 민주광장에서 위원장 삭발식을 거행하고, ‘관제사장 출근저지단’ 발대식을 했다. 철야농성 41일째인 4월 11일 서기원이 첫 출근을 시도했으나 조합원 600여 명이 가로막자 대치 끝에 승용차로 떠났다가, 청원경찰 50명과 실국장 100여 명의 호위 아래 사장실 기습진입을 시도했다. 조합원들의 격렬한 저지로 막아냈지만 이 과정에서 이원규 노조 부위원장이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KBS 공권력 투입과 1차 방송제작거부 투쟁
4월 12일, 전날 사장실 강제진입을 시도했던 서기원은 청원경찰 30여 명과 실국장·부장단 20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지하차도 엘리베이터를 통해 사장실에 기습 진입했다. 이어 백골단 300여 명까지 사내에 진입해 사장 출근을 저지하던 6층의 조합원들을 구타하고 6층에서부터 현관 앞까지 백골단으로 터널을 만들어 조합원 117명을 강제연행했다. 이들은 남부경찰서, 관악경찰서, 영등포경찰서, 마포경찰서로 분산 수용됐다. 조합원들이 강제연행된 직후 서기원은 제2회의실에서 100여 명의 백골단이 경호하는 가운데 실국장들을 동원해 취임식을 했다.
1990년 4월 13일, 남한강연수원에서 연수 중이던 70여 명의 11기 사원들이 연수를 중단하고 조합원총회에 참석하는 등 총 4,0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비상사원총회’가 개최됐다. 총회 진행 중에도 백골단 220여 명이 5·6층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은 서기원이 퇴진할 때까지 무기한 제작거부와 농성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으며, 교양국, 기획제작국, 라디오국 등을 비롯해 당일 오후 6시를 기해 송출기술부를 제외한 제작자 전원이 ‘서기원 퇴진 및 구속자 전원 석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제작을 거부키로 결의했다. 제작거부에 돌입한 조합원과 집행간부 약 1,000여 명이 철야농성에 참여했다. 이날 고혈압으로 쓰러졌던 이원규 부위원장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삭발해 달라고 요청, 병실에서 삭발을 마치고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조합원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사내에 진주했던 경찰들은 4월 14일 조건 없이 철수했고, 12일 연행자 전원이 석방됐다.
노조원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4월 17일에는 박경환 이사, 한운사 이사가 양심선언을 통해 “서기원 사장 임명제청은 외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폭로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평사원 중심으로 시작된 투쟁에 부장·차장들까지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부산방송본부의 신윤생 본부장, 창원방송국의 간부사원 일동 등도 사원들의 방송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사장 운전기사가 운전을 거부해 서기원은 용역기사를 얻어쓰기도 했으며, 서기원이 재출근하자 비서실 직원 17명이 근무를 거부하는 등 서기원 임명거부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4월 19일에는 전날 철야농성한 경영관리부 사원들과 출근버스로 출근하던 조합원 등 300여 명이 정문현관 앞과 사장실 앞에 출근저지대를 편성·배치해 출근하는 서기원의 승용차가 나타나자 뛰어나가 에워싸고 “퇴진 서기원”을 외치며 10분간 대치했으며, 출근 저지투쟁은 22일까지 계속됐다. 이날에는 ‘방송민주화 쟁취와 4․19기념 단축마라톤 대회’를 열어 여의도광장 3.7km를 왕복하기도 했다. 또한 CBS노조가 동맹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4월 23일 KBS 사태에 대한 정부담화문이 발표됐으나, 사태의 본질을 외면·호도하자 ‘전국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오후부터 서기원 사장과 최병렬 공보처장관 퇴진을 촉구하며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키로 결정했다. CBS노조도 동조 철야농성에 돌입했으며, 언론노련도 52개 언론사 집행위원회를 긴급 소집해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결의하고 연맹집행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4월 24일에는 KBS 기자들이 긴급 기자총회를 열어 스스로 특집을 제작·방송할 것을 결의했고, 탤런트 300여 명도 ‘KBS 자주수호 전사원 비대위’ 투쟁을 지지하는 결의를 발표했다.
4월 25일, 비대위는 ‘방송민주화 평화대행진’을 개최했다. 행진은 남산야외음악당에 집결해 서울역과 만리동, 마포대교, 여의도를 거쳐 KBS에 이르는 8km 거리를 경찰과 마찰 없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서울역 앞을 지날 때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날 영등포경찰서는 비대위 11명에 대해 4월 26일 11시까지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 출석요구자는 이임호, 김복도, 엄민형, 고희일, 이윤선, 김철수, 이계진, 이건환, 김인영, 신형국, 김학수 등이었다. 4월 26일 확대비대위는 현 국면의 어려움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국민의 전폭적 지지가 계속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국면전환 없이 전 직원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할 것과 서기원 퇴진에 대한 비대위 방침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했으며, 사태의 해결을 위한 대화 노력도 결의했다. 또 방송정상화 등 국면전환은 정부의 대응에 따라 판단하기로 최종 결정해 민주광장에서 열린 전사원 비상총회에 보고했다. 4월 27일 KBS 부장단들이 방송정상화 즉각 실시, 사원 요구 관철, 공권력 재사용 불원 등을 담은 결의문을 발표했고, 국실장단도 이 결의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같은 날 방송작가 115명까지 성명서를 내고 KBS 사원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가운데, 공권력 재투입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4월 28일 KBS 본관 주위에 1,800여 명의 경찰병력이 배치됐으며, 서기원과 박성범 본부장이 사내에 계속 거주하며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한편 최병렬 장관은 “비대위에서 요구한 사항을 수용할 수 없”으며, “4월 28일 오후 2시까지 방송과 사내 질서를 정상화하지 않으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단행하겠다”고 통보함으로써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이러한 와중에도 KBS의 PD들은 서기원이 퇴진하지 않으면 연대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이날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과 비대위가 회담해 “5월 14일까지 서기원을 사퇴시키겠다는 전제하에 4월 28일 자로 농성을 풀고, 4월 30일부터 방송을 정상화”하기로 하고, 이 사항을 4월 30일 오후 2시 사원총회에서 추인받기로 했다. 김용갑은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전권을 가진 듯 행동해 KBS 조합원들을 이간질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농간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해 7시간 동안의 마라톤 회의 끝에 치러진 표결에서 31대 31이라는 난처한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4월 30일, 비대위에서 상정한 김용갑 안(선 방송정상화)은 실국대표자회의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된 데 이어, 3,000여 명이 참여한 전국 사원총회에서도 2,408명이 반대해 압도적인 표 차로 거부당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어떻게든 저지해보려 했던 노태우 정권은 자신들의 공작이 압도적인 표 차로 좌절되자 불과 2시간 뒤, 전노협이 선포한 총파업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투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마침내 KBS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날 밤 11시 15분경 이종국 서울시경 국장의 진두지휘에 따라 19개 중대 3,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 본관에서 농성 중이던 333명의 조합원을 강제연행했다. 이로써 민주광장 농성과 투쟁은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KBS 노동자들은 공권력 투입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에도 정부의 기만적인 ‘선 방송정상화 안’을 부결시킴으로써 이후 MBC, CBS를 비롯한 전 언론계로 투쟁을 확산하는 기폭제가 됐으며, 5월 투쟁의 토대를 형성했다.
방송사 연대 제작거부 투쟁
KBS는 경찰병력에 완전히 통제됐고, 집결하려던 명동성당이 원천봉쇄되자 조합원들은 MBC로 이동해 실질적인 연대 방송제작거부 투쟁의 막이 올랐다.
5월 1일, 전노협 소속 서울지하철 노조가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해 무임승차 투쟁을 전개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총파업 투쟁과 노동절 투쟁이 강도 높게 진행됐다. MBC노조는 KBS에 대한 2차 경찰투입 직후 ‘KBS 공권력 재투입 규탄 및 제작거부 돌입을 위한 MBC 전사원 비상총회’를 열고 전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MBC노조 대의원대회는 제작거부의 1차 시한을 5월 6일 자정까지로 결정했다.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이날 오전부터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제작거부에 돌입, 전국 MBC가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참여했다.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노조도 같은 날 MBC노조와 동시에 제작거부에 돌입,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KBS 조합원 1,000여 명은 명동성당 집회가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자 MBC로 집결, MBC 내 ‘민주의 터’ 광장에서 ‘공권력 재투입 규탄 및 방송동지 연대 출정식’을 가졌다. 역사적인 방송노조 연대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KBS비대위는 2일부터 본부를 MBC노조 사무실로 옮기고 MBC비대위와 공조체제에 들어갔다. 5월 2일에도 ‘구속동지 석방촉구 및 노태우 정권 규탄대회’ 등 연대집회가 계속됐다. MBC 경영진은 이같은 양사의 연대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5월 4일부터 KBS 사원의 MBC 출입을 봉쇄했고, 경찰은 이날 밤 10시 40분경 100여 명의 병력을 MBC노조 사무실에 투입, 전영일 KBS 비대위원을 강제연행했다. 이에 대해 전국의 MBC 사원들은 5월 5일 공휴일임에도 규탄집회를 개최하고, 언론자유를 말살하려는 노태우 정권에 맞선 더욱 강력한 투쟁을 다짐했다. 그러나 MBC 비대위는 5월 6일 오후 3시 대책회의를 열고 6시간에 걸친 격론 끝에 “일단 예정대로 7일 새벽 0시를 기해 제작에 복귀해 보다 강력한 프로그램 제작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연대 제작거부 투쟁은 6일 만에 일단락됐다. 한편, 5월 4일 김철수 신임 비대위 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정비한 KBS 사원들은 MBC노조 사무실에 ‘망명정부’를 설치하고 5월 18일 제작복귀에 이르기까지 ‘언론민주화와 국민의 방송을 위한 국민걷기대회’(5월 12일), ‘서기원 퇴진 100만 명 서명운동’(5월 14일), ‘전사원 대동제를 위한 민주광장 탈환투쟁’(5월 17일) 등 투쟁을 꿋꿋하게 진행했다.
KBS 공권력 투입을 계기로 사상 최초의 방송사 연대 제작거부 투쟁을 전개했지만 사전에 준비하지 못한 투쟁의 한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첫째, MBC의 경우 제작거부 시한의 연장문제를 놓고 조합원들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노출돼, 비대위의 분열과 집행부 총사퇴로 이어졌다. 당시 제작거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일단 제작에 복귀해 프로그램 제작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쪽 다 상대방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채 감정대립으로 치달아 5월 7일 열린 사원총회에서 비대위에 대한 일부 조합원들의 성토와 이에 대한 반론이 계속된 끝에 위원장단의 총사퇴로 이어지게 됐다. 둘째, 비대위 지도력의 한계가 드러났는데 2,000명이 넘는 KBS와 MBC 조합원이 집회하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진행과 지도를 전혀 수행하지 못해 혼란을 초래했다. KBS는 KBS대로, MBC는 MBC대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되풀이했는데, ‘동시 제작거부’ 차원을 넘어 명실상부한 ‘연대 제작거부’가 되기 위해 좀 더 체계적이고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MBC 비대위는 5월 7일 성명서에서 “5월 1일 제작거부 이후 선언과 실천을 합치시키지 못했던 점에서 이미 확연히 드러났지만, 상황에 대한 충분한 대처능력의 부족을 드러냈다”고 스스로의 한계를 시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많은 조합원이 연대투쟁에 거부감을 느끼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며, 비대위로서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제작복귀 선언과 함께 ‘굳건한 프로그램 제작투쟁 전개’를 선언했지만, 구체적 방안이 전혀 없어 사실상 공허한 구호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러한 점은 복귀반대를 주장했던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냉소적인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2차 제작거부 투쟁의 의의는 분명하다. 수많은 독소조항을 안고 있는 공보처의 방송구조개편안이 발표된 직후부터 KBS노조는 MBC, CBS, PBC 등 방송 3개사와 공동으로 ‘방송법개악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6월 14일 이후 방송 4개사는 전노협, 국민연합, 야당, 재야단체와 ‘방송법 개악 규탄대회’를 열고 현 정권의 방송구조 개편의 부당성을 알리는 홍보에 나서는 한편, 각종 세미나 등을 통해 여론의 비판적 분위기 확산을 꾀했다. 그리고 7월 13일과 14일 양일에 거쳐 방송 4개사 노조는 방송법 개악 저지를 위한 연대투쟁을 위해 제작거부 여부를 묻는 전 조합원 투표에 들어가 80%를 상회하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KBS노조의 2차 제작거부 투쟁은 의미가 크다. 5월 18일 제작복귀 이후 조합원들의 침체된 방송민주화 투쟁 결의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패배감과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 4개사가 방송 사상 초유의 연대 제작거부에 돌입했음에도 노태우 정권은 7월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 관련 3개 악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방송 4사 노조의 2차 제작거부 투쟁은 다분히 상징적인 투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한 민자당의 반민주적 횡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3당 야합의 본질을 국민에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방송관련법의 날치기 통과로 야당 의원들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사태까지 빚어짐에 따라 현 정권의 방송장악 기도가 얼마나 심각하고, 그로 인해 예상되는 폐해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하여 국민 전체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점은 깊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KBS 노동자들 투쟁의 성과와 한계
KBS 투쟁의 성과는 첫째, 노태우 정권이 조성한 공안정국 속에서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이 다시 떨쳐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둘째, 국민에게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국민적 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셋째, KBS 투쟁을 계기로 각 부문의 운동단체가 새롭게 연대와 전진을 강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은 이후 국군조직법, 방송법 날치기 통과 후 비상시국회의의 기초가 됐다. 넷째, KBS 투쟁은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결집체인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가 결성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KBS 투쟁을 계기로 업종노련 산하 400여 개의 단위노조 대표자 700~800명이 모여 개최한 ‘KBS 노조탄압 규탄대회’에서 1987년 이후 처음으로, 조직된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대표자 간담회부터 시작해서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를 결성,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함께 이후 민주노조의 중요한 중심축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 전노협 소속 노조의 투쟁력을 복원하고 대중들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는 장기간의 투쟁임에도 당시 공권력이 투입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나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던 전노협에 대한 지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민주노조와 단체들은 KBS 투쟁의 정당성을 선전했지만, 정작 KBS는 언론노동자들과의 연대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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