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5.3항쟁은 노동운동 뿐만 아니라 야당, 재야 그리고 학생운동까지 결부된 개헌 투쟁이었다. 특히 5.3항쟁에서 노동운동은 여당인 민정당과 협상과 투쟁을 반복하는 신민당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개헌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자 했다. 서노련과 인노련은 5.3인천투쟁을 치밀하게 준비해 나아가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5.3항쟁 이후 변혁적 노동운동 진영이 탄압으로 약화되고 대중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후 개헌을 둘러싼 정치투쟁에서 주요 쟁점으로 남았다.
인천 5.3항쟁
김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개헌 논쟁
1986년 초반이란 시점은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둘라싼 ‘헌법문제’ 논쟁이 본격화되었던 시기였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민주화 요구가 급격하게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전제로 한 다양한 개헌론을 주장했다. 먼저 1985년 8월 민청련이 ‘민주제 개헌운동’을 제기했다. 이 개헌론의 요지는 군사정권의 퇴진에 이어 민주 과도정부수립 그리고 직선제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을 확정한 뒤,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과 민주적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민통련도 1985년 11월 20일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구성한 뒤, 12월 2일 신민당에게 “군사정권과 타협을 통한 민주화의 환상을 포기하고, 국민이 바라는 민주헌법 쟁취투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 개헌론은 군사독재 타도를 통해서 개헌이 가능하며, 개헌투쟁을 위해서 야당세력과 연대하되 민중운동세력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야당과 민중운동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일부에서는 삼민헌법쟁취투쟁론을 내세웠다. 서노련은 85년 10월 ‘전국노동자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 쟁취위원회’를 결성했다. 구체적으로 서노련의 정치투쟁은 개헌국면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가시화됐다. 1985년 10월 9일 ??서노련 신문??(3호)에 “직선제개헌안은 결국 가진 자들의 정치를 위한 것이므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모든 민중이 정치권력 주체가 되는 정치제도가 민중민주정부이며 이것을 보장하는 헌법이 삼민헌법”이라며 최초로 ‘삼민헌법쟁취’ 구호가 등장하였다. 이는 노동운동이 최초로 개헌 논쟁에 개입해 야당의 직선제개헌안에 대응해 삼민헌법을 대안으로 제기했던 것이었다. 또한 서노련은 개헌투쟁을 통해 지역노동운동단체간의 연대역량을 강화하여 노동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서노련은 ‘전국노동자 삼민헌쟁취위원회’(’전노삼민쟁‘)를 구성하여 투쟁을 조직해 냈다. 1985년 10월 11일 IMF, IBRD총회가 서울에서 열리자 서노련은 전학련과 공동으로 ‘미국의 경제침략 규탄과 외채정권타도를 위한 범민중궐기대회’를 개최하였고,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15주기를 맞아 제기동에서 벌어진 가두시위에서 “독재헌법 철페”,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하자”는 구호를 주장하면서 개헌투쟁을 시작했다. 이처럼 개헌투쟁에서 전술상의 주요 쟁점은 ‘야당과의 제휴와 차별성의 문제’였다.
학생운동 전학련의 경우에도 10월 26일 연세대에서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개헌서명운동을 결의했다. 10월 29일 서울지역 6개 대학에서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를 발족하고 삼민헌법쟁취실천대회를 개최했다. 학생운동에서 삼민헌법 주장은 이후 파쇼헌법철폐론으로 변화했다. 이들은 5공화국 헌법은 재벌헌법이자 특권·독점헌법이며, 민족을 팔아먹는 매판헌법이고, 민족통일을 가로막는 분단헌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파쇼헌법을 철폐하는 투쟁이야말로 헌법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즉 제도정치권 내에서 개헌논의는 무시되어야 하며 먼저 군사독재를 타도해 파쇼헌법을 철폐하고 민중이 민주헌법 제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민당과 개헌서명운동
1985년 2.12 총선에서 승리해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민당은 초기에는 개헌 투쟁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6년 전두환이 국정연설에서 1989년에 가서야 개헌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히자 4.13 호헌방침에 반대하는 범국민적 개헌서명운동을 통해 재야 민주화운동세력과 신민당은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2.12총선 1주년을 맞아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2월 12일 ‘직선제 개헌을 위한 1천만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전국 시도별로 개헌추진위원회를 조직하며 대중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개헌서명을 위해 옥내집회를 열어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적용할 것이며, 가두서명을 받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호별 방문으로 서명을 권유하면 주거침입죄를 적용할 것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3월 11일 서울지부 결성을 시작으로 부산(3월 23일), 광주(3월 30일), 대구(4월 19일), 대전(4월 19일), 청주(4월 26일)로 이어진 대회에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기가 고조되었다. 극장이나 강당에서 열린 대회장이 만원이었을 뿐 아니라 주변 도로가 대중들로 가득 찼다. 1986년 3월 23일 부산 대한극장에서 열린 부산 대회에 수만 명이 참여했으며 대회가 끝난 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30일 광주 대회도 이민우와 김영삼 신민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열렸으며 광주시내 금남로, 충장로, 도청 광장이 3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민통련도 4월 초 집행부 회의를 통해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해 4월 5일 대구 대회부터 대회장소 밖에서 민통련 본부와 경북지부, 학생운동세력이 집회를 주도했다.
신민당은 장외 개헌추진대회로 정부에 개헌 압력을 넣고자 했지만 지방대회에서 학생운동·노동운동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자 재야, 학생운동·노동운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또한 4월 30일 청와대 3당 대표 회동에서 전두환이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다면 임기 중에도 개헌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4월 14일 미국 국무장관 슐츠도 ‘보수대연합’을 노리는 민주적 중도세력 결집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상황이 변하자 신민당은 4월말 ‘국회헌법특별위원회’ 구성을 통한 개헌추진, 즉 민정당과의 합의를 통한 개헌에 합의하게 되고, 민주화운동세력과 분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학생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 재야 단체를 포함한 민주화운동 진영은 신민당의 타협성과 보수성을 비판하며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고 있었다.
인천의 페테스부르크가 시작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의 경기, 인천지부 결성대회가 1986년 5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86년 5월 3일 신민당 인천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는 신민당뿐만 아니라 재야와 노동운동·학생운동 단체들도 주목하는 국면이었다. 야당과 민주화 운동간 차이뿐 아니라, 민통련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및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 사이에도 입장 차이는 컸다. 신민당과 연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민통련에 비해 서노련, 인노련, 학생운동은 신민당을 기회주의세력으로 규정하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다.
신민당은 개헌 현판식을 개최하기 위해 인천시민회관에서 인천시지부까지 행진할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노동운동과 학생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타협적 보수 야당을 비판하며 ‘신민당은 각성하라’ ‘이원집정제 반대한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 건설”과 “삼민(민족, 민주, 민중) 헌법 쟁취”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민통련은 인천대회 준비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에 맡겼다. 인사연은 신민당 행사가 끝나면 시민회관 앞 사거리를 점거하고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무기한 철야연좌농성을 기획했다. 하지만 대회는 신민당, 민통련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수도권 일대 민주화운동단체가 거의 모두 인천 시민회관 앞으로 모여든 것 같았다. 12시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시민회관 앞으로 몰려나오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신민당 지도부도 대회장에 도착했으나 노동자. 학생들이 길을 터주지 않아 대회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신민당 개헌추진대회 저지 시위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일 오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시위참가자들은 노동자, 각 단체에 속한 활동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주거를 철거당한 철거민,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등 노동자 조직에 속했다. 이들은 여야가 준비중인 개헌협상을 미국의 사주에 의한 야합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중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회의’를 통해 삼민헌법 제정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 해방투쟁’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길가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노동자들은 시위를 하며 ‘속지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놈!’ ‘군사독재 타도하고 노동3권 보장하라!’ ‘생활임금 쟁취하자’ ‘8시간 노동제 쟁취하자!’ ‘파업자유 쟁취하자!’ ‘박영진의 원수 갚자!’ ‘폭력 경찰 때려잡자!’ ‘노동해방 쟁취하자!’ ‘노동자의 손으로 삼반정권 타도하자!’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삼민헌법 쟁취!’ ‘인천을 해방구로’ 등 구호를 외쳤다. 이날 대회장에 뿌려진 유인물은 총 50여종으로, 재야단체 10여종, 인천지역 노동자단체 10여종, 학생운동 단체 15종 등이었고 유인물의 내용은 신민당의 정권과의 야합을 비판하는 보수대연합 규탄, 반미, 반파쇼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공방이 치열해졌다. 최루탄, 투석, 각목, 구타로 양측이 다수 부상당했다. 전국각지에서 73개 중대 1만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 4백여 명을 연행하고 133명을 소요죄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하였으며 50여명을 수배하였다. 인천 5.3 항쟁을 계기로 전두환정권은 공안기관을 앞세운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 대한 총체적 탄압을 가하였다. 당국은 5? 3 항쟁을 좌경용공 세력의 반정부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사회운동진영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수배 및 검거에 돌입했다. 전두환 정권은 5월 5일과 8일에 민통련과 인사연 간부, 학생, 노동자들에 대해 수배령을 내렸다. 5월 21일 민통련 의장 문익환이 구속되었고, 22일에는 정책실장 장기표를 비롯한 주요 간부 전원이 구속되었다. 민통련뿐만 아니라 서노련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5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핵심적인 인물들이 모두 보안사에 구금되었다. 결국 5·3사건과 관련해 129명이 구속되고 60여 명이 수배되었다. 구속된 시위자 일부는 경찰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이들을 야구방망이 당구봉 등으로 폭행, 통닭구이, 물고문, 전자봉을 이용한 전기고문, 성고문 등의 수법으로 고문하고 미리 짠 각본에 따라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 구속자들은 감옥과 법정에서 싸움을 계속했는데, 황언구 등 인천교도소에 50여명이 수감됐는데, 그들은 법정과 교도소에서 “노동해방 쟁취하자” “강간고문 자행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후일 부천서 성고문 사건도 5.3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거리에서의 투쟁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3항쟁, 그 이후
정부의 전면적 탄압은 한편으로는 신민당을 제도권 안으로 포섭하고 다른 한편 노동운동을 포함한 재야운동진영을 고립시켰다. 이처럼 5.3 항쟁은 타협적인 야당을 개헌투쟁으로 견인하려는 시도였으나, 선도적 정치투쟁이 지닌 한계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5?3항쟁 이후 정치투쟁은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과 함께 해야 실효성이 있다는 비판적 경험을 얻었다. 또한 5?3항쟁이 끝나고 공안정국 아래 서노련?인민노련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이들 조직과 운영방식이 비판받았다. 서?인노련은 민족해방 민중민주의 양측에서 비판받았고 또 지도부의 검거가 맞물려 1986년 말 해산됐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5.3 당시 서노련, 인민노련의 삼민(민족 민주 민중) 노선은 민중문제의 본질을 제기했고, 5?3항쟁을 통해 이를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했다는 의미는 존재했다. 하지만 탄압과 구속 그리고 조직해산 등을 통해 변혁적 노동운동의 고립을 가져온 측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5.3항쟁은 80년대 중반 이후 선도투쟁과 가두 중심의 노동자운동의 활동과 노선이 지닌 자기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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