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비(白碑) 그리고 정명(定名)
송시우 (노동자역사한내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제주4?3평화공원 전시관에 들어서면 ‘역사의 동굴’을 지나, 맞닥뜨리는 곳이 백비(白碑) 조형물 전시 공간이다. 표시 글을 보면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홈페이지에는 ‘4?3백비는 미완성된 4?3의 역사다. 글이 새겨지지 않은 이 비석은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이 분단의 시대를 넘어 통일되는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기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을 달았다. 아직도 지나간 일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까? 그런데 2000년 1월 제정?공포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3년 10월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에 보듯이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용어를 정의하고 있다. 그러면 전시공간의 설명과 정부의 용어 정의가 어딘가 맞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4」3’은 현재 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즉 이름 하나 올바르게 쓰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올해 뜨거운 시사용어가 ‘역사전쟁’이다. 교과서에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공방에 이어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다. 그야말로 ‘전쟁’ 수준이다. 어느 한 쪽이 지지 않은 이상 전쟁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학자들의 역사관에 따라, 정권에 따라 진실은 호도되고 있다. ‘4?3’의 명칭도 시대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불러져 왔다.
4?3 발발 당시로부터 폭동, 사태, 반란, 사건, 무장봉기, 인민항쟁 등 항쟁 주체(인민유격대, 남로당), 진압의 주체(미국, 대한민국, 군?경, 우익단체), 제주지역민 또는 제주를 찾은 언론인?법조인 등에 따라 각각 다르게 쓰였다.
1948년 4월 3일 재산 유격대의 습격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공식적 반응은 ‘폭도들의 총선거 반대 폭동’으로서 즉각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4월 중순 이후 무장대와 미군정이 심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언론매체의 인식도 상반되게 나타났다. 우익계 신문들은 ‘폭동’의 인식 기조를 유지한 반면, 중도좌익계 신문들은 ‘소요사건’, ‘무장봉기’, ‘제주도의 항쟁’, ‘제주도 인민봉기’ 등으로 보도하였다.
1948년 6~7월에 긴박했던 제주도 상황이 느슨해지자, 신문과 잡지 지면에는 4?3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당시 제주 현지를 다녀간 기자들은 미군정 당국, 경찰의 입장과는 매우 다르게 4?3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언론을 통해 ‘4?3사건’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인 사건명으로 인식되어 갔다. 또한 이 시기 4?3 관련 재판을 치렀던 법조인들은 4?3을 ‘불행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4?3은 ‘해결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반란’으로 인식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제주도 일원을 초토화시킨 대한민국 군과 관련된 신문 기사는 반도 및 폭도와의 전투에서 승전했다는 공적(功績) 사항으로만 채워졌다. 수많은 주민들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공적(公的)인 인식 대상에서 감추어졌다.
전쟁과 이승만 집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폭동?반란’으로 억압되었던 4?3 인식은 1960년 4?19 혁명을 거치며 다시 ‘사건’으로 환원되었다. 일부 ‘항쟁’의 인식을 공적으로 제기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5?16으로 좌절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4?3은 국가 권력의 공적 인식만이 통용되는 시간이었고, 4?3의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4?3에 대한 재인식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비롯되었다. 자치적인 투쟁과 단독선거반대라는 정치적 투쟁이 결합된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투쟁, 즉 ‘항쟁’인식이 학생층과 시민사회에서 제기되었고, 활발한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4?3을 아직도 ‘폭동’으로 보는 정부의 인식과 여러 지점에서 대립하고 있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도화된 2003년 이후 정명(定名)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즉 4?3진상규명운동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공개된 자료가 너무 협소하다고 한다. 정부 및 산하기관의 자료는 ‘진압’이나 ‘토벌’ 등의 섬멸의 시각으로 미국의 자료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들이고, 제주도민들은 아직도 ‘무지렁이들이 무엇을 알리오’라면서 회피하고 고통의 기억들만 토해내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 학자들도 과거청산운동의 영향 속에서 이념적 색체를 지우고 희생자의 시각만 부각시키면서 ‘제주4?3’이라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그에 편승한 사회집단에 의해 잊히길 강요받았던 과거의 진실을 들춰내고 올바르게 밝히는 것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면 희생과 학살보다 ‘왜?’라는 질문으로 다시 정명(定名)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속에서 행위 주체자들이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으며, 왜 그러했는가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 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제주역사기행을 해도 ‘학살터나 가고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야기만 듣는다’는 뒷담화가 잦아들 것 같다.
참고한 글들
제주 4?3연구의 새로운 모색.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편. 제주대학교출판부. 2013
제주4?3항쟁 연구. 양정심. 성균관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6
제주4?3평화공원 홈페이지(http://jeju43.jeju.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