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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정권 노동계 블랙리스트 철폐투쟁(1983년 6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3-06-10 조회 446

전두환정권 시기 노동계 블랙리스트 철폐투쟁

 

⦁ 시기 : 1983610~ 1984

⦁ 요약 : 전두환정권 시절부터 존재한 블랙리스트, 기업, 노동부, 정보기관 등이 노동운동이나 시국사건 관련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사찰하고 취업을 막았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을 비롯한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은 조직적인 투쟁으로 이 사건을 사회적으로 알려냈다.

 

 

박근혜 정권 이전, 전두환 정권 시기에 이미 한 사업장에서 해고된 의식 있는 노동자들의 명단,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사업장에 취업할 수 없도록 하는 탄압이 널리 자행됐다.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작성된 블랙리스트는 1978년 동일방직 사건 당시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이 작성해 그해 4월 각 사업장에 배포한 이래, 민주노조 출신 해고노동자들의 재해고 사태가 속출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블랙리스트는 개별기업의 제보로 기업, 노동부, 정보기관 3자 합작으로 만들어져서 각 사업장, 노동부 근로감독관실 및 정보기관 등에 비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정보기관에서는 회사에 해고노동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해고를 요구하며, 회사가 이에 불응하면 나중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책임져라는 식으로 협박하는 예도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관련 노동자들의 취업할 권리와 생존권을 박탈하고 노동운동 자체의 말살을 기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의 권리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짓밟는 만행이며, 근로기준법에서도 금지하고 있다.

 

관련한 구체적 자료가 성남에서 발견됐다.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찰하고, 자료에 명기된 사람들의 노동현장 취업을 막기 위해 관계 당국이 만든 방대한 규모의 블랙리스트였다. 1983610일 어용노조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들이 구속된 동료노동자 강동구의 가족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관련 서류를 찾던 중 노무관리 담당자의 책상에서 블랙리스트가 쏟아져 나왔다. 블랙리스트는 다섯 묶음의 서류철에 총 763명의 이름, 생년월일, 해고 일자, 사진 등이 44장의 필사본으로 정리돼 있었으며, 노동운동과 시국사건 관련자들의 명단이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한 묶음에는 서울, 인천, 안양, 성남 등 수도권 지역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했거나 시위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노동자들의 명단이, 다른 한 묶음에는 문제 근로자 명단이란 제목으로 성남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각종 인적사항이 증명사진까지 첨부돼 있었다. 나머지 묶음들은 성남 라이프제화와 신생 노조의 간부 및 조합원 명단, 식품, 전자, 봉제 등으로 사업장을 분류한 도표에 취업 중인 문제 노동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이들 블랙리스트와 함께 발견된 서류 중에는 관리공단 이사장이 각 기업체 장들에게 보내는 협조공문도 포함돼 있었는데, 협조공문에는 관리공단에 의식화 근로자들의 명단을 보관하고 있으니 필요하면 요청하라는 친절한 안내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 블랙리스트의 경우 전국을 포괄하고 있는 규모의 방대함과 경찰에 연행되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명단에 올라있다는 점을 볼 때 결코 개별 기업주들에 의해서 작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경찰, 보안사, 안기부 등이 자료를 작성해 각 사업장으로 배부한 것이 분명했다.

 

인천의 세창물산에서도 628일 블랙리스트가 발견됐다. 여기에는 노사분규 관련 노총회관 점거 농성자 명단이라는 제목 아래 노동자 98명의 이름, 주소, 본적, 생년월일, 입사 일자, 퇴사 일자,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었고, 또 다른 노동자 64명의 이름, 본적, 학력, 공장을 필사본으로 싣고 있었다. 결국 이것도 한 개의 공장에서 도저히 작성할 수 없는 방대함과 상세함을 갖추고 있어 경찰 등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됐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해고노동자들은 재취업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는데, 원풍모방의 경우 원풍모방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에서 집계한 내용에 따르면 13명이 취업을 거부당하거나 취업 후 해고된 것으로 나타나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블랙리스트에 따른 해고는 1983년 말 태창메리야스 해고노동자와 인천지역 해고노동자 6명이 재취업한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6명은 블랙리스트를 철폐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구속됐는데, 이들의 투쟁은 블랙리스트 문제를 사회적으로 쟁점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831월 대농그룹 산하 태평특수섬유에 입사한 김용자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4개월 만에 반장으로 승진했고, 김옥섭도 5월에 입사해 성실히 근무하던 중 19837월부터 어떤 목적으로 회사에 들어왔느냐?” “우리는 해고자 명단을 입수했다는 협박을 당하고 같은 해 1017직무상의 업무 불이행’ ‘회사 신용손상’ ‘사상 불온’ ‘신원 불확실등의 이유로 전격 해고됐다. 동일방직 해고자 블랙리스트에 희생된 것이다. 이들 이외에 안순애, 신정희, 서기화 등도 같은 이유로 해고됐다.

 

이들은 19831215일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 소장실에서 7시간 동안, 복직과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한 당국의 노력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다음 날인 1216일 오후 2시부터 근로감독관실에서 단식과 철야농성을 벌이던 중 1217일 새벽 2시경 대부분 술에 취한 경찰 50여 명에게 옷이 찢기는 등 야비한 성폭력까지 당하며 끌려갔다가 오후 5시에야 풀려났다. 이틀 후인 1219일 오전 10, 다시 노동부에 항의방문을 갔지만 기다리고 있던 노동부 근로감독관, 사복경찰 등 20여 명에게 또다시 무참한 폭력을 당했다. 서기화는 깨진 유리 파편에 맞아 다리 신경과 힘줄, 혈관이 절단되도록 크게 다쳤지만, 응급조치조차 방해받았다. 피가 흥건한 채 노동부 정문 앞에 쓰러져 있는 서기화의 핏물로 한 동료가 기둥에 복직이라고 썼다. 서기화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나오던 1220일 경찰에 납치됐고, 나머지 5명은 현장에서 연행·구속돼 인천소년교도소로 이송됐다.

 

이 사건은 사회 각계각층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1984119일에는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 철폐대책위원회(위원장 문익환 목사)’가 구성돼 이들에 대한 비인간적 폭력과 블랙리스트의 문제점를 폭로하고 항의하는 활동을 펼쳤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21일 구속집행 정지로 석방된 뒤에도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198438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들의 문제가 거론되자, 노동부 장관은 인천지역 일부 근로자들이 법질서를 위반한 과격 활동으로 해고된 뒤 다른 사업장에서 이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겼는데 당사자들이 이를 오해하여 자기들의 이름이 작성되어 배포되었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답변해 블랙리스트를 전면 부인했다.

 

이후 진정, 해고무효 확인 소송, 유인물 배포, 대중집회 등을 통한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은 계속됐다.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은 정치 쟁점화에는 성공했지만, 현장노동자들을 이 투쟁으로 조직화해 노동운동의 핵심사안으로 형성시키지는 못했다. 블랙리스트는 최근 정권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참고자료

- 민중문화운동협의회80년대 민중민주운동 자료집 1(학민사, 1989)

- 청계피복노동조합영원한 불꽃 청계노조 20년 투쟁사(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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