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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금속 해고자복직 및 민주노조 건설투쟁
⦁ 시기 : 1987년 7월 13일 ~ 8월 18일 인천지역에서 남일금속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우 모범적이며 선도적이었다. 1985년부터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해 ‘유급휴가 4일 쟁취와 대치근무 폐지’ ‘조기출근제도 폐지’ ‘연월차 휴가 실시’ ‘일당 1,450원 인상’ 등 노동조건을 개선해 왔다. 1987년 4월에도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해 노사협의회의 노동자대표 2명을 포함한 5명의 노동자가 회사의 부당한 조치로 해고될 정도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이들 해고자 5명과 회사에 남아 있던 ‘노동위원회’ 동료들은 함께 복직투쟁과 민주노조 결성투쟁을 전개했는데 회사측에서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7월 11일 회사 관리자와 조장, 반장들을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결성했다. 어용노조의 결성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분노와 함께 투쟁을 폭발시켰다.
7월 13일, 즉각 새로운 민주노조(위원장 최승기)를 결성하고 어용노조 타도와 해고자 원직복직 투쟁을 전개했으며, 7월 17일과 18일 양일간 ‘민주노조 결성 보고대회’와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여 조합원 120명을 가입시켰다. 이에 당황한 회사측은 구사단(단장은 어용노조 위원장 안광희)을 조직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민주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하여 7월 20일에는 민주노조 현판식을 거행하려던 노동자들을 집단폭행하고 현판을 탈취해 달아났다. 또한 7월 21일에는 사내식당에서 개최하려던 ‘어용노조 해체’ 집회를 봉쇄하고 150여 명의 구사단이 최승기 위원장을 집단구타하여 회사 밖으로 끌어냈으며, 다른 노동자들도 집단구타해 홍정기 등 7명이 다치고, 3명이 연합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7월 26일 새벽 3시, 구사단의 폭력에도 그 사이 불어난 10명의 해고자와 조합원들은 ‘어용노조 해체’ ‘집단폭행 공개사과’ ‘해고자 원직 복직’ 등을 요구하며 기습적으로 사장실을 점거했다. 회사측은 다시 구사단을 동원해 분말소화기 32대로 소화액을 분사하여 농성자들을 질식시킨 후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차별 폭행해 7명의 노동자가 이빨과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가공할 폭력사태는 7월 27일에 열린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쟁취대회’에서 현장 사진과 함께 폭로돼 인천노동자들의 지원투쟁을 이끌어냈다.
7월 27일, 장대같이 쏟아지는 장맛비에도 폭행당했던 노동자들이 환자복을 입은 채 가족들과 함께 회사 정문에 집결해 회사의 야만적인 폭력을 직접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총투쟁을 호소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 150여 명이 농성에 가담함으로써 결국 사장을 굴복시키게 되었다. 이로써 회사측은 △집단폭행에 대한 공개사과 및 치료비 전액 부담 △민주노조 간부 5명에 대한 징계 백지화 △8월 이내에 직선제로 노조 위원장 선출 △9월 중 해고자 복직 등을 약속했다. 한편 이날 외부에서 투쟁에 동참했던 노동자 30여 명 중 3명이 부평경찰서에 연행됐으나 100여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부평경찰서 정문에서 새벽 2시까지 불법연행에 항의하는 투쟁을 계속해 다음 날 모두 석방되기도 했다.
7월 28일은 남일금속 노동자들의 투쟁이 마침내 첫 결실을 맺었다. 이들은 휴가 보너스를 받고 현장 동료들의 격려성금 20만 원을 모아 병원에 입원한 부상자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7월 28일부터 투쟁의 열기를 모아 민주노조 조합원과 입원자들은 교육을 통한 노조강화를 꾀하는 한편, 회사측이 반드시 해고자를 복직시키도록 하기 위해 “복직 없이 선거 없다”는 구호 아래 농성투쟁을 계속 전개했다. 마침내 8월 18일 △해고자 5명 전원복직 △총선거에서 민주노조 위원장에 최승기, 부위원장에 해고되었던 최동식 선출 △가족수당 2만 원을 추가로 쟁취했으며, 9월 5일 마침내 민주노조 현판식과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남일금속 노동자들의 투쟁은 완전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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