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첫 선거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제주도의 첫 선거는 핏빛 선거였다. 그 시작은 1947년 3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
3월 1일 제주민전 주최 제28주년 3·1절 기념식 개최. 응원경찰의 발포로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주민 6명 사망, 8명 중경상을 당하는‘3·1사건’발생
3월 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투쟁위원회’결성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 돌입.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에서 파업에 가세
3월 22일 남로당, 전국적으로 24시간 파업인 ‘3·22 총파업’ 전개
3월 28일 경무부, “파업선동자 전국에서 2,176명 검거, 제주는 230명”이라고 발표
4월 1일 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사건에 가담한 제주 경찰관 66명을 징계파면했다고 발표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5월 23일 3·1사건 관련 재판에 회부된 328명에 대한 공판 완결. 체형 52명, 집행유예 52명, 벌금형 56명,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및 불기소 처분
9월 17일 제2차 미소공위 결렬. 미국, 한반도문제 UN에 상정
11월 14일 UN총회,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안 통과
1948년
1월 8일 UN한국임시위원단 서울 도착
1월 22일 제주 CIC,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급습, 106명을 검거하고 폭동지령 문건 등을 압수했다”고 보고
2월 11일 제주경찰,‘2·7사건’여파로 제주에서 방화 1건, 테러 9건, 시위 19건이 발생했다고 발표. 3일 동안 290명 체포
2월 26일 UN임시총회에서 “UN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자”라는 미국안 채택
2월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의 ‘신촌회의’에서 강·온파의 논쟁 끝에 12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됨
3월 15일 남로당 제주도상위에서 전남도당 오르그가 참석한 가운데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 수단으로써, 둘째 단선·단정 반대‘구국투쟁’으로써 무장투쟁 결행 최종 결정
3월 28일 남로당 제주도당, 회합을 갖고 무장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결정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 발발.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새벽 2시를 기해 제주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
4월 14일 최종 선거등록 결과 제주도는 127,752명 중 82,812명이 등록해 64.9%(전국 평균 91.7%)로 전국 최하위 기록
5월 10일 5·10선거 실시. 제주도 62.8%로 가장 낮은 투표율 기록. 북제주군 갑·을 2개 선거구는 과반수 미달로 선거무효됨
5월 18일 국회선거위원회, 딘 군정장관에게 제주도의 북제주군 갑·을 양 선거구에 대하여 선거무효 선포를 할 것을 건의
5월 21일 미군정, 남제주군에서 오용국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고 발표
5월 26일 딘 군정장관, 제주도 북제주군 갑·을 양 선거구의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포고 발표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 이승만, 국회의장에 선출
6월 10일 딘 군정장관, 6월 23일 시행하기로 한 북제주 갑·을 양구의 재선거를 무기연기한다는 행정명령 제22호를 발표
7월 20일 이승만, 국회에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
1949년
5월 10일 국회의원 재선거 실시. 홍순녕·양병직 당선
1948년 3월 15일, 남로당 제주도상위에서 전남도당 오르그가 참석한 가운데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써, 둘째 단선·단정 반대‘구국투쟁’으로써 무장투쟁을 결행하기로 최종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도는 일찍이 1813년 양제해의 모변, 제주도판 임술민란인 1862년 강제검의 난, 남학교도가 주동이 된 1898년 방성칠의 난,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된 1901년 이재수의 난 등의 민란과 1918년 무오 법정사 항일무장투쟁, 1919년 기미 조천만세운동, 임신 1932년 제주해녀 항일투쟁 등 독립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한반도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투쟁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1920년대부터는 운동의 주류가 대부분 좌파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신인회’를 결성하고, 1927년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는 등 청년, 적색노동, 적색농민운동을 제주도 전역에서 이끌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던 1945년의 인민위원회는 마을 단위의 자치조직이었다. 따라서 좌파의 화두는 자유롭고 생활화된 일상의 대화였다고 볼 수 있다. 오사카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했었던 재일 제주인들이 새 조국 건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안고 귀국하였고, 이들과 더불어 제주도는 희망의 노래가 가득했다.
<1948년 5월, 해안부락으로 소개되는 산간부락의 어린이와 부녀자들. 사진=실천문학사의 [제주항쟁] 창간호 1991>
그런데 일제 대신에 미군정이 진주하면서 자주적인 정부, 새 조국 건설의 꿈이 짓이겨졌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의 충돌이 그 시작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대로 빨리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열고, 한국인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수년 내에 외세 간섭 없는 자주국가 건설을 다짐했는데, ‘3?1절 발포사건’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한반도에서 유래 없는‘3?10민관 총파업’이 일어나고 경찰도 이에 동참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은 미군정의 엄호와 결찰총수 조병옥의 지휘 아래 2,500여 명을 검거하는‘공안정국’을 조성한다. 이에 지도부는‘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탄압이면 항쟁이다’며 무장 봉기를 결행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첫 선거는‘이식된 민주주의의 절차’와는 무관하게 미군정의 의도에 파열구를 내는 의미가 강했고, 결국 전국에서 유일하게 2개의 선거구가 사고 처리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1년 후 다시 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무장투쟁’을 결정한 지도부는‘좌익 모험주의’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도부는 ‘무장투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결정하면서도 참혹한 결과를 예견하진 못했을 것이다.‘4?28 평회회담’에서 전투중지 및 무장해제를 합의하는 것을 보면 궐기 수준에서 끝맺음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군정의 생각은‘이번 기회에, 아예 본보기로 쓸어버리려’했고 급기야 5월 1일‘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강경진압을 실행에 옮겼다. 일방적인 게임이었다.‘레드 헌트’그야말로‘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를 대리인으로 하여금 제주에서 자행한 것이다. 그렇게 제주민의 자주의식, 새 조국 건설의 꿈을 학살로 선물한 것이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2003. P545~P558 일부 발췌
<제주역사기행> 한겨레신문사 2004 P209~210, P233~235, P297~302 일부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