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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기계노동조합 결성 투쟁(1987년 8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8-13 조회 289

대흥기계노동조합 결성 투쟁

 

⦁ 시기 1987813~ 827

 

 

1987년 당시 부천의 대흥기계는 생산직 노동자만 315명 정도로 부천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대규모 사업장에 속해 있었다. 1980년대 초에 노조가 결성됐지만 회사측에서 돈으로 매수해 흐지부지 해체되거나, 어용노조로 활동 없이 해체돼 고참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상당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던 중 19877월 중순부터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부평공장 쪽의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 모임과 연락이 닿자 통합노조 결성 준비가 본격화됐다.

813, 저녁 930분 부평의 다방을 빌려 부평공장 노동자 50명과 부천공장 50명 등 100명이 결성대회를 갖고 다음날 경기도 과천 노동부에 서류를 접수했다. 이어 1516일에는 두 공장에서 파업 준비위원 각각 5명이 모여 월요일인 17일을 노조결성 보고대회 및 파업돌입일로 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817일 오전 8, 월요일인 이날은 예정된 파업 개시일이었으나 회사측에서 사전에 눈치를 채, 3일간 휴무공고를 낸 후 통근버스 운행을 정지하고, 통근버스 정류장 등에 관리자들을 배치해 출근노동자들을 귀가시켰다. 그러나 일부 출근한 노동자들이 정문 앞에서 웅성대다가 한 노동자가 배고파서 못살겠다. 일당 2,000원 인상하라고 구호를 외치자 대오는 순식간에 14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부위원장이 나타나 노조가 결성된 사실을 알리자 노동자들이 환호하며 휴무공고를 찢어내고 공장안으로 진입해 식당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930분 노조결성 보고대회를 갖고, 노조 가입원서를 배부한 후 15명당 1인씩 임시대의원을 선출했다. 이어 사무실을 점거, 하수도관과 지게차를 동원해 공장 진입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나중에는 철망까지 동원해 봉쇄했다. 한편 오후에는 부평공장 위원장이 방문해 부평공장에서도 생산직 210, 사무직 40명이 농성중이라고 전달하며 분위기가 고양됐다.

 

818일 오전, 1차로 노동자란 무엇인가?’를 교육했다. 오후에는 분과토론을 갖고 각 과별로 토론된 내용을 중심으로 오전 7시 기상, 10시 교육, 16시 교육 등 2차례의 교육과, 19시 가두행진, 비디오 상영, 22시 경과보고와 평가 등 농성시간표를 작성했다. 특히 낮잠을 절대 금지하는 등 파업농성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켜나갔다.

 

819, 오전 815임금인상 노조사수를 외치며 구보하여 당시 파업농성중이던 경원기계 앞에서 함께 구호를 외쳤고,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파업 중이던 연합전선 앞에서 구호를 외쳐 상호연대와 투쟁열기를 다졌다. 이 투쟁은 경찰에 의해 물리적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소극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역에서 처음으로 이웃공장까지 가두 진출해 지지를 표명하고, 공동투쟁의 열기를 확인하자 노동자들의 자신감은 부쩍 커졌다. 이어 2차 교육에서 전날 교육이 노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지 못했다는 판단 아래 노동자의 생활과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자가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주제설정이 모호했고, 토론이 촉발되지 않아 일방적인 측면이 여전히 나타났다. 이날 회사측에서 처음으로 협상을 제기해와 부위원장, 사무장, 관리사무직, 반장대표, 노동자대표 각 1명씩 5명이 선출돼 부평공장의 대표 5명과 함께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됐다. 이날 밤 9시 횃불가두시위를 전개해 파업 중인 주변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경찰의 탄압을 우려한 지도부가 원래 코스를 변경함에 따라 지도부의 우유부단함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결국 횃불을 끈 채 원래 코스대로 행진을 했지만 길을 잘못 드는 등 실수를 거듭했다.

 

820, 회사측이 월요일에 공고했던 휴업기간이 끝남에 따라 많은 노동자들이 합류해 농성대오는 주부노동자 7명을 포함 254명으로 확대됐다. 특히 농성노동자들은 회사측의 방해공작으로부터 출근자를 보호하기 위해 특수기동대를 조직하여 통근버스 정류장에 배치해 놓았다. 이어 3차 교육으로 월급과 생계비가 진행됐으나 실내 마이크시설이 안된데다 인원이 갑자기 늘어나 산만해져 교육은 도중에 중단됐다. 이때 만화 사장과 진실을 복사·배포했는데 농성노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밤에는 대흥가요제도 개최했는데, 한 반장이 10, 11살 먹은 아이들을 데려와 아저씨들 힘내세요라고 외치며 노래를 불러 분위기가 흥겨워졌다. 그러나 이날도 사장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고, 일부 노동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제 자살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투쟁의 확신을 갖고 감격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등 농성자들의 분위기는 고양되고 있었다.

 

821, 정부의 가두시위 엄단발표에 위축된 지도부가 머리띠와 구호도 없이 회사이름만 적은 피켓을 들고 전날보다 축소된 코스로 아침구보를 전개했다. 이날 월급과 최저생계비라는 제목으로 4차 교육이 진행됐는데 차트를 사용해 교육효과를 높였다. 오후에는 투쟁소식지 <대흥인의 소리 1>이 배포돼 노동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사장이 불참한 가운데 2차 협상이 진행됐으나 결렬되고, 9시에는 옥상에서 촛불축제를 열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다 한 노동자가 박노해의 시 손무덤을 낭독하기도 했다. 밤에는 구사대 침탈소식이 있어 신속하게 대비했지만 별다른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823, <대흥인의 소리 2>가 발행됐는데, ‘아빠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등 감동적인 내용으로 호응을 얻었다. 이날 교육은 산재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실제 경험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호응을 얻었다. 또한 3차 교섭이 진행됐지만 결렬되고, 밤에는 캠프파이어를 진행했는데 옥상에서 노동자의 밤이라는 불글씨를 만들어 그 불씨가 줄을 타고 내려와 마당에 있는 장작더미에 점화되는 등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한편 이 시기에는 외출자가 늘어나 140여 명만이 농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824, ‘노동법에 대한 교육이 있었고 오후 2시에는 신광전자가 파업에 돌입하자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대자보로 이석규 열사의 죽음이 알려졌고, 투쟁소식지 3호도 발간됐다. 825일에는 이석규 열사 추모제를 공장 앞 큰길에서 진행한 후 경원기계 앞에서 지지시위를 전개했으며, 밤에는 촌극대회를 개최하고 민주노조 쟁취라는 불글씨로 밤을 밝히는 등 저녁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경원기계에서 구사대 문제로 지원을 요청해 지원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826일에는 경원기계, 새서울산업, 대흥 등 세 곳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고, 저녁에는 파업승리 고사를 지낸 뒤 농성 후 처음으로 회식을 가졌다. 이날 4차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역시 결렬됐다.

 

827, 파업 장기화 대책으로 청계천 서울영업소 점거계획을 수립해 점거자 45명을 선발 태풍 단결투쟁호라고 이름 짓고, 저녁 7시 부평공장 45명과 함께 서울영업소를 점거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새벽 1시 서울에서 협상대표들이 서울영업소로 돌아와 협상타결을 알렸으나 서울 농성자들은 일당 1,000, 상여금 450%를 주장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부평공장이 대부분 만족하여 철수하자 새벽 5시 통근버스로 함께 철수하게 됐다. 그리하여 집행부측의 협상 타결과 농성자들의 타결 반대로 진통 끝에 다음날 저녁 7시까지 표결, 재표결을 거쳐 결국 협상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투쟁은 14일 만에 종결됐다.

 

대흥기계의 투쟁은 다양한 파업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는 점, 조합원 다수가 참여했다는 점, 조합원의 자신감과 자기표현을 강화한 점, 매일 교육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업장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모범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들은 파업 이후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문화팀을 만들어 동양에레베이터노동조합 현판식 때 문화공연을 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특히 가두 구보를 통한 연대, 경원기계 구사대 진압에 대비한 연대투쟁의 준비, 3개 사업장 공동성명서 등 실천적인 연대활동도 돋보였다. 대흥기계 노동자들은 파업 이후에도 지역 연대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1987년 말에는 신광기업 노조파괴 공작 때 전체 노동자가 통근버스를 타고 신광기업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흥기계의 이러한 연대투쟁이야말로 부천지역 민주노조운동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부천지역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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