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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매 한가지다_송시우 (31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06-03 조회 1976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매 한가지다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운영위원)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한다.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임술민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등 불과 한 세기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반도에서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별국(別國), 즉 독립국 건설을 꿈꾸었던 1813년 양제해의 모변, 제주도판 임술민란인 1862년 강제검의 난, 남학교도가 주동이 된 1898년 방성칠의 난,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된 1901년 이재수의 난 등이 대표적인 제주민란이다.
제주의 민란은 한반도의 그것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그러나 제주도만의 특징도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별국 건설을 내세운 민란이 눈에 띈다. 양제해 모변과 방성칠 난이 그 경우이다. 또 화전세 과다 징수가 원인이 되었던 것도 제주 민란의 특징이다. 강제검의 난과 방성칠 난이 이에 해당된다.
1901(광무5) 5월에 발생한 이재수의 난은 사건의 희생자가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한 외래 종교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반항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또 외국 신부와 관련하여 국제문제로까지 번지는 후유증을 치러야 했다는 점에서 제주도의 근대사에 여러모로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1901년 '신축년항쟁'. 봉기군들에 의해 죽은 천주교인들 (사진=실천문학사 [제주항쟁] 창간호 1991)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 대체로 직접적인 측면과 간접적인 측면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가 있다. 간접적인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1900년에 제주도에 부임한 봉세관(封稅官) 강봉헌의 혹심한 작폐와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세금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봉세관 강봉헌은 일찍이 전례 없는 탐관오리로서 그 수단방법이 간교?악랄하였으며 당시 섬의 관리나 천주교도들과 공모하여 만든 모든 토지재산, 모든 생산물 하나하나 빠짐없이 유명무명의 잡세를 부과하고 도민의 피땀을 착취하여 그 원성이 충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란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라크루(lacrouts), , 구마슬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특수권력과 이에 편승한 천주교도들의 횡포라고 하겠다. 교도들을 비방하거나 그들과 언쟁이 있으면 천주교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단정하여 교회에 연행, 징벌 체형을 함부로 하였다. 이처럼 불법행위와 약탈행위를 함부로 자행하였으므로 천주교도들에 대한 도민의 증오는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 대정군내의 유지들은 1901(광무 5) 4월초 오리와 불량교도들의 불법행위에 대항할 자위집단으로 상무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에는 당시 대정군수로 있던 채구석을 추대했고, 위원에는 이성교, 송희수, 오대현, 강우백, 강백, 강철호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상무사가 발족되자 그 설립취지에 찬동한 군내의 향색 선비?백성 등이 대거 이에 가담하였다. 상무사원들은 봉세관의 토색과 남징행위에 대하여는 민중 앞에서 공공연히 그 비행과 불법을 폭로 규탄하였으며 교도들의 비행과 폭력에 대해서도 완력으로 상대하여 굽히지 않게 되었으므로 자연 이 두 세력 간에는 잦은 마찰과 분쟁을 야기하게 되었다.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 직접 경위를 보자. 상무사의 힘이 강력해지기 시작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교도 수십 명이 작당하여 1901429(311) 이름 아침 대정군 신평리에 있던 상무사 위원 송희수의 집을 습격, 송의 머리를 말꼬리에 붙들어 매고 대정읍내로 끌고 가려 했다. 동민들이 모여들어 강력히 항의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이 틈에 송은 간신히 빠져나와 납치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얼마 후에는 상무 회원 강우백, 강희봉, 마찬삼 그리고 향장 오대현 등 수십 명이 대정에 있는 천주교당을 습격하고 교당을 파괴하는 한편 교도 수명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무텔 주교를 통하여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에 보고되었다.
봉세관과 교회의 작폐를 시정 호소하기 위하여 좌수 오대현을 장두로 하여 511일에 제주성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를 안 강봉헌은 도망가 버리고, 교회측에서도 구마슬 신부가 13일에 교도 수백 명을 대동하고 민당이 모인 곳으로 출발하였다. 이 때 제주성으로 진군하던 민중들이 한림 명월에서 민가에 들어 밥을 먹고 있었다. 거기서 교인들이 장두를 찾아내기 위하여 무기를 휘두르며 위협하니 민중들은 놀라 흩어졌고, 오대현. 강박. 마천삼. 강희봉 등 6명은 잡혀 제주목에 넘겨졌다.
신부와 교도들은 그 길로 515일에 대정현에 이르러, 무기고를 부수고 흥분한 군중을 향하여 총을 발사하며 닥치는 대로 구타했다. 모였던 민중들이 흩어졌다. 이 때 이재수는 흩어지는 민중들을 질타하며 민병을 조직했고 516일에 동서로 나누어 제주성을 향하면서 각 마을에 통문하여 5일 교대로 장정들을 제주성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이 때 동진은 강우백이 지휘하고 서진은 이재수가 인솔하였다. 교회측에서도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520일에 유배온 교인 장윤선을 목포로 보내 서울 교당에 전보하여 프랑스 군함 파견과 교인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민병들은 황사평에 진을 치고 4진으로 나누어 성문을 공격하였다.
528일 사시(巳時)에 퇴기 만성춘과 시기 만성원을 주동으로 하는 성안 여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동원했고 천여 명이 흰 수건을 싸매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남자들도 이에 호응하여 성에 올라 포를 뽑아 밖으로 내던지며 함성을 지르니, 교도들이 모두 도망가고 성 위는 텅 비었다. 서진 대장 이재수가 방포 시위하며 입성하여, 읍성에 숨은 교도를 수색하여 잡아온 사람은 17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 최형순이 보리밭에 숨어있는 것을 잡아 왔는데 이재수는 먼저 그를 효수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교도들도 학살되었는데 그중에는 여자도 4~5명 있었다.
531일 아침에 프랑스 함대 두 척이 들어왔다. 난동의 주모자를 체포하지 않으면 프랑스 병사로 하여금 체포하겠다 하였다. 62일에 홍순명을 중대장으로 하는 강화병 1백 명과 궁내 고문관 미국인 산도가 내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프랑스 함대와 만일의 경우를 조정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강화병이 상륙하자 프랑스 병사들이 이륙한다.
63일에 동진 장두가 목사에게 말하기를 '첫째 봉세관을 돌려보낼 것, 둘째 교회당을 없애줄 것, 셋째 백성의 죄를 감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재호 목사와 홍순명 중대장은 이를 인정하고 조정에 알릴 것을 약속하니 물러갔다. 이 날 일본 군함도 입항하여 제주의 동정을 염탐하였다.
611일에 황기연과 윤철규는 민병들의 요구를 듣고 민요에 관련된 교인들을 체포하며, 강봉헌. 이용호. 이범주. 장윤선을 구속하였다. 민병의 장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과 개문 장두 김남학도 구속하였다. 황기연과 윤철규는 관덕정에 나가 민병들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이 때 민병들은 장두들을 보내 주면 같이 나가겠다 하므로, 윤철규가 말하기를 내일 강봉헌과 대질한 연후에 방면할 것이니 염려 말고 물러가라 하였다. 그러나 오대현의 처남되는 자가 즉각 장두의 석방을 요구하며 해산 못하겠다 하자 곤장으로 엄벌하니 민병들이 해산하였다.
613일 미국인 산도와 김창수도 떠나고, 앞서 9일에 제주의 동정을 살피려 재차 입항하였던 프랑스 함대도 같이 떠났다. 이 날로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은 정죄인으로 착가(着枷)하여 가두었다. 620일에 윤철규는 관군 2백 명을 인솔하여 떠났다. 황기연은 717일에 창룡호편으로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강봉헌과 목양위원 윤행구 및 응문인으로 채구석과 민요 관련자 40여 명을 호송하여 인천으로 떠났다.
109일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은 사형이 확정되어 감옥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머지 김남학. 조사성은 징역 15, 고영수. 이원방은 각각 10년에 처해졌다. 이 때 채구석도 주모자로 몰려 사형 언도되었으나 민요에 대한 배상금 청산 책임자로 되어 광무 6(1902) 84일에 석방되었다. 배상금은 교당 파괴와 두 신부의 집물 보상으로 4160, 용인 필살 휼금으로 1천원, 도합 5160원이었다. 그러나 채구석이 감당할 수 없어 광무 8(1904)에 삼읍 도민이 균등 변상하기로 하고 원리금을 합하여 은으로 63152122모를 거두어 변상하였다. 또 피살된 교인을 매장할 곳을 제공하기로 프랑스 함장과 이재호 목사 간에 합의하였고 광무 7(1903) 11월에 황사평으로 결정하니, 이것이 지금의 천주교인 공동묘지다.


 
이재수의 난 이후 정확히 60년이 지난 1961년 대정 지역의 유지들과 이재수의 후손들은 60년 전의 의로운 항거를 기념하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홍살문 거리에 비석을 세웠다. 홍살문 거리에 있었던 "제주대정군삼의사비"는 홍살문 거리 주변 도로 확장 공사로 1980년대에 드랫물로 옮겨졌다. 현재 드랫물에 있는 건 비의 몸체를 빼고 남은 콘크리트 기단밖에 없다. 현재 그 비석은 새로 만들어 세운 비석 곁에 묻혀있다. 이재수뿐 아니라 오대현과 강우백도 같은 장두였다. 그래서 삼의사비가 세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수 난'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유독 이재수만이 지금껏 제주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건 무슨 까닭에서일까? 아마 그가 당시 제주 사람들의 속을 후련하게 풀어줬기 때문일 것이다.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오대현과 강우백은 시종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제주성 입성과 천주교도 처형 때에는 더욱 그랬다.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모습이었다. 반면 이재수는 단호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제주성 입성 이후에는 이재수의 서진과 오대현의 동진이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킬 정도였다. 비타협적인 투쟁노선과 온건한 타협노선 간의 대립이었다. 그것은 정부군과의 협상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민중은 사회모순의 철저한 척결을 내세웠던 이재수를 진정한 장두(狀頭)로 생각했던 것 같다.
 
 
참고한 글들 : 제주역사기행 이영권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4
신제주성당 홈페이지(http://casjj.com) 신제주본당 25년사
제주도지 제2권 역사. 제주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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