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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과 한국전쟁(7)_이영민(109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05-15 조회 661
 

모택동과 한국전쟁 <7>

 

옮긴이: 이영민

  

철군에 대한 분쟁(철군풍파)

 

1951710일 오전 10, 한국전쟁 정전담판이 개성에 있는 내풍장에서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개성은 고려왕조의 고도였는데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담판장소인 대회의실에는 동서로 커다란 장방형 탁자가 놓여져 있었으며 그 위에 녹색 탁자보가 깔려 있었다. 양측 담판대표는 탁자 양쪽에 마주보고 앉았다. 막 교전하던 전장에서 담판장에 가 앉으니 서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질질끌며 마라톤식으로 진행된 담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UN군 수석대표 조이가 먼저 발언했다. 그는 담판에서 다뤄질 9개 의제를 제출했는데 어떤 실질적인 제의도 하지 않았다.(1) 이어서 조중측 수석대표 남일이 3개항의 원칙을 제의했다.

 

(1) 서로 합의하에 쌍방은 동시에 적대적 군사행동을 중단하도록 한다.

(2) 삼팔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고 쌍방 무장부대는 동시에 삼팔선에서 10킬로미터 철수하여 그 안을 비군사지역으로 한다. 그 지역의 민정회복은 1950625일 이전으로 원상 회복한다. 즉시 전쟁포로 교환회담을 시작한다.

(3) 가능한 짧은 시간내 모든 외국군대는 한반도에서 철수하며 정전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증한다.(2)

 

조이는 모든 외국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는 조항을 의제에 포함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는 정전담판은 한반도내 군사문제만을 토론해야 하고, 한반도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문제는 정치문제이므로 정전이 실현된 뒤 관련 정부가 토론해야 한다고 하였다.

 

회담이 시작되자 의제에서 이견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철수한다는 문제가 부딛쳐 쌍방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이극농은 바로 회담상황을 모택동에게 보고했다. 711, 모택동은 이극농에게 회신 전문으로 분명하게 지시했다. “철병하는 문구는 반드시 관철시켜라.”(3) 이렇게 병력이 철수하는 문제는 쌍방이 논쟁하는 초점이 되었다.

 

UN대표는 회담 이틀째 시선을 돌리기 위해 예상하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했다. 20여명의 신문 사진기자들을 데리고 와 회의구역에 들이자고 제안한 것이다. 712, 그들은 북한과 중국쪽의 동의도 얻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기자 20명을 개성지역 데리고 와 취재하도록 했지만 북한과 중국쪽 연락원의 거절에 직면했다. UN대표단은 이 사건을 구실로 담판을 중단했다. 그리고 기자 취재를 담판을 계속하는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다.(4) 상대는 이렇게 작은 일을 키우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713일 다시 제의해 왔다. 개성 및 그 부근지역을 중립지구로 하자는 것이었다. 또 우리가 제의에 동의한다면 회의를 즉시 재개하며 지연시키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5)

 

모택동은 상대방의 의도를 간파하고 즉시 대책을 강구했다. 714, 이극농과 김일성, 팽회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리지웨이 통지가 의미하는 것은 중립지구를 주제로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 대동문제로 회담을 멈추게 한 행동을 덮으려는 것이다. 우리쪽은 주도권을 쥐기 위해 그들이 중립지구 제안을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근무 인원에 신문기자 일부를 넣는 방법에도 동의해야 한다. 그래서 적이 취소할 어떤 구실도 주지 말아야 한다.”(6)고 제기했다.

 

같은 날, 모택동은 북한과 중국쪽이 리지웨이에게 보낼 회신 전문을 기초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리지웨이 장군에게

 

당신이 713일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동안 파생한 작은 오해와 논쟁을 제거하고 평화담판을 손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해 우리는 당신의 제안에 동의한다. 개성지구를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중립지구로 하고, 이 구역안에서 쌍방이 어떤 적대 활동도 중지하며, 무장병력을 회의지역 및 쌍방 대표단이 통행하는 회의구역 통행로에서 완전히 철수시키자는 제의에 동의한다. 우리는 회의구역내 크고 작은 문제, 그리고 관련된 구체적 문제에 대하여 쌍방 대표단이 회의를 한번 열어 해결하기를 제안한다.

 

회의를 중단하게 한 신문기자 문제는 중립지구를 구획하는 문제와 무관한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78일 귀측 연락관이 한차례 제기한 것 말고 귀측 대표단이 다시 제기하지 않았다. 연락관의 임무는 세부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다. 중립지구를 구획하는 그런 문제를 토론할 권리는 없다.

 

정회를 야기한 신문기자의 건은 작은 문제로 정회를 만들 만한 일이 아니다. 회의를 결렬시킬 문제는 더욱 아니다. 귀측 대표단은 일찍이 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우리 대표단은 당시 회의에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회의 일정도 정하지 않았는데 각국 신문기자가 개성에 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또 그 문제는 협의도 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쌍방이 협의해서 집행하는 원칙을 준수하려 한다. 우리는 이 원칙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신문기자 문제는 이왕 협의하지 않은 것이니 귀측이 일방적으로 또 강제로 집행해서는 안된다.

 

그런 작은 일로 회의가 중단되거나 결렬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당신의 제의에 동의한다. 즉 귀측 신문기자 대표 20인이 귀측 대표단 근무 인원의 일부가 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대표단에 이 문제에 관하여 귀측에 편의를 주라고 명령해 두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과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

 

1951714(7)

 

이 회신 전문은 문제를 분명하게 짚으며 상대의 구실을 깨끗하게 반박하고 있다. 평정심이 있고, 사리에 맞으며, 북한과 중국쪽의 정전담판에 대한 성의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또 모택동의 외교투쟁에 대한 책략과 기법을 드러내 준다. 그것은 조중쪽이 회담투쟁에서 승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음날, 모택동은 황염배(黄炎培)에게 써준 서신에서 이 책략을 낼 때 생각을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잘해야 화친도 있다고 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제 하나의 단계를 선택했다. 적의 구실을 빼앗아 회의 속개에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인데 장차 유익한 점이 있을 것이다.”(8)

 

715, 한국전쟁 정전담판이 회복되어 개성에서 진행되었다. 미국측은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것을 담판 의제로 하자는 것을 계속 거절하였다. 몇차례 담판을 진행한 상황은 쌍방이 고집하는 초점을 보여 주었다. 첫째는 철병문제이고 둘째는 삼팔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문제였다. 철병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북한과 중국대표단은 모택동의 동의를 얻은 뒤 담판방침을 조정하였다. 담판 의제를 토론할 때 쌍방 군사분계선을 확정하는 것과 비군사지역을 만드는 문제는 토론할 것을 견지하기로 했다. 삼팔선 문제는 이후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류해 두기로 했다. 상대의 요구에 따라 한반도에서 전투를 멈추고 휴전하는 구체적인 안배 및 감찰하는 문제에 동의하여 담판 의제에 삽입하기로 하였다.

 

717, 주은래는 모택동 명의로 전문을 기초하여 이극농에게 보내 김일성, 팽덕회에게 이야기하게 하였다. 이 전문을 모택동의 심사를 거쳐 수정한 뒤 발송하였다.

 

전문은 이렇게 제기하고 있다. “이 며칠 우리는 중립지구와 신문기자 문제에서, 의제중에 군사 분계선 및 감찰과 정전기구 문제에서 모두 양보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착각을 하여 계속 토론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여전히 계속 양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문제에서 토론을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상대가 토론을 거절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계속 반박해야 한다. 그것이 군사문제 또는 정치문제화되어 논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그것이 정전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어 적이 파놓은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덧붙여서 우리는 휴회를 제기하지 말고, 결렬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들이 결렬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이 전문을 심사할 때 한 대목을 덧붙였다. “우리는 이 조항(외국군대가 철수하는 것을 가리킨다.)을 제기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각국이 한반도에 파병하여 작전하는 것은 여행을 온 것이 아니다. 정전회의에서 정전을 토론할 권리는 왜 있는가? 철병은 오히려 토론할 권리가 없는 것인가? 이런 이유는 성립할 수 없다는게 분명하다. 우리는 회의에서 정전을 토론할 권리가 있다면 철병을 토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견지해야 한다.”(9)

 

이어진 며칠간 쌍방은 철병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UN군 대표는 말문이 막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조이는 리지웨이의 허용에 따라 무례한 표현을 쓰며 논쟁했다. “조이가 하는 말은 늘 거칠었다.”(10)

 

이극농은 719일 담판회의가 끝난 뒤 모택동, 김일성,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에서 UN군 대표의 난감한 태도를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남일이 원고에 따라 거듭 철군문제를 발언했다. 남일이 왜 철군하지 않느냐, 정전 후에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며 두 문제를 질문하며 공격했다. 상대는 궁색해서 말이 없고 난감한 모습이었다. 남일은 오늘 질문 모습이 유연하며 민활했다. 상대는 대답하기 어려워 담배를 피우며 눙쳤다. 자주 머리를 긁으며 도리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회의에서 우리는 명분이 당당하고 이치가 떳떳한데 상대는 완전히 수세로 몰렸다.”(11)

 

쌍방의 토론은 좋은 선전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마지막에 의제담판을 협의하는데도 길을 닦게 되었다. 국제여론은 분명하게 목격했다. 정전 담판중에 도대체 누가 도리에 맞는지, 누가 성의가 있는지 여부를 본 것이다.

 

이때 미국정부도 담판 결렬의 책임을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720일 담판대표에게 지시, 철병문제를 토론할 것인지에 여지를 두어 양보할 준비를 하였다. “UN군 대표가 어떤 승낙도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상대가 광범한 의제를 일방적으로 토론하는 것은 동의할 수 있다. 가령 상대가 이것조차 받지 않는다면 UN군 대표는 장래 어떤 시기에 상호간 군대감축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12)

 

며칠간 담판한 상황에 따라 미국측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 담판의 진전을 위해 모택동과 주은래는 철군문제에 새로운 방침을 내놓았다. 723, 주은래는 모택동 명의로 이곡농과 김일성, 팽덕회에게 전문을 보냈다.

 

담판과정중 우리는 이미 철병문제를 잘 이용했다. 우리가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을 표명하면서 적들이 평화사업 촉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확정할 수 있다. 이번 정전담판에서 삼팔선상의 철병과 정전을 중점적으로 쟁취해야 한다. 조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첫걸음은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물러가게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정전후 다른 회의에서 해결하기로 보류한다면 이번 회의 의제에 넣지 않는 것도 동의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미 김수상의 동의를 구해 두었다.”

 

전보는 남일에게 25일 담판회의에서 하나의 의제를 추가하게 하였다. “정전과 관련한 기타 문제였다. 추가된 조항의 목적은 다른 4개항의 협의가 모두 이루어진 뒤를 위한 것이었다. “쌍방에 대한 관련 각국 정부의 건의에 따라 정전협정이 실시된 뒤 일정기한내 쌍방 고위급 대표회의를 소집한다. 거기서 조선에서 기간을 두어 모든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것을 협상토록 한다.”(13)

 

725, 북한과 중국측 수석대표 남일은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빠른 협의를 이루기 위해, 조선의 평화를 빨리 실현하기 위해, 철군문제를 정전이 실현된 후 다른 회의에서 해결하도록 보류하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의제에 쌍방에 대한 관련 각국정부의 건의사항을 추가할 것을 요구한다.”(14)

 

이 제안은 의제문제 담판을 빨리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 실질적 담판을 빨리 이끌어내기 위해 길을 연 것이었다.

 

726, 쌍방은 의제담판에서 모두 5개항을 통과시켰다. (1)의제통과 (2)쌍방간 군사분계선 확정 및 비군사지구로 하는 것 (3)한반도내 전투중지와 휴전의 구체적 처리 (4)전쟁포로의 처리문제 (5)쌍방에 대한 관련 각국 정부의 건의사항(15)

 

한국전쟁 정전담판은 마침내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이때 모택동은 구체적인 담판 지도사업은 주로 주은래에게 맡기고 자신의 정력은 반혁명 진압 지도와 국내 다른 사업지도에 썼다. 그것이 모택동의 사업특징이었다. 전체 국면에서 중대한 임무가 닥친 시기에는 그는 늘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을 해결하고 다른 일은 잠시 옆에 놓아두었다. 아니면 비교적 적은 정력을 안배했다. -외교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이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거나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완성하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주된 정력을 남은 중요한 과제에 썼던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런 상황을 목격하였다. 지원군이 북한에 들어가 작전하던 첫날, 그는 더욱 정신을 집중하여 한국전쟁에 썼다. 3차 전역에서 승리를 얻은 뒤 한국전쟁의 국면은 근본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지도하는데 더 많은 부분을 팽덕회에게 맡겼으며 스스로는 가장 필요하고 관건적일 때 지도방침을 내곤 하였다. 한국전쟁이 담판단계에 이르렀을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담판과 전투의 대결

 

1951727일부터 한국전쟁 정전담판은 실질적인 담판단계에 들어갔다. 담판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주은래는 모택동 명의로 이극농, 김일성, 팽덕회에게 잇따라 전문을 보냈다. 전문을 보내기 전에는 모두 모택동의 동의를 거쳤다. 주은래가 기초하여 모택동 명의로 보낸 전보 수고를 보면 당신은 주와 모의 의견이 잘 일치되었던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택동은 소수의 전문에 비교적 많은 수정을 했으며 중요한 내용일 경우 가필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은 한자도 고치지 않았고 가끔 알기 힘든 몇몇 글자만 고쳤을 뿐이었다. 또한 주은래의 전문은 모두 단숨에 써내려 간 것들이다.

 

한국전쟁 담판과정은 험난했다. 2항의 의제, 즉 군사분계선을 확정하는 문제에 들어갔을 때 담판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북한과 중국쪽은 삼팔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방은 이 주장을 거절했으며 이른바 보상, 즉 바다 및 공군이 우세한 것을 구실로 삼아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군사분계선을 지원군 및 조선인민군 진지 후방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12천 평 킬로미터의 토지를 싸우지 않고 움켜쥐려 기도하였다. 미국은 이 요구가 거절된 뒤 무력으로 협박하고자 했다. “그러면 폭격, 대포와 기관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과연 818일부터 1022일까지 UN군은 중조 군대에 하계공세와 추계공세를 잇따라 펼쳤다. 또한 중립지구에 여러차례 사단을 일으켰다. 정전담판은 중단될 처지가 되었으며 양측의 대결은 탁자위에서 전장으로 옮겨졌다.

 

중조군대는 극히 열악한 기후와 곤란한 보급조건에서 UN군의 하계공세와 추계공세에 맞섰다. 720일부터 북한 북부는 엄청난 홍수재해를 입었다. 논과 밭은 유실되었으며 도로가 끊겼다. 수많은 공사가 중단되고 전쟁물자 창고가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적은 기회를 틈타 중조군대 후방에 이른바 교살전을 대규모로 펼쳤다. 중조군대의 작전은 병력이동과 물자에 전대미문의 심각한 곤란에 부딛쳤다.

 

1014, 모택동은 인민지원군은 영용하고 완강하게 미군의 흉맹한 추계공세를 막아낸 것을 보고 중공 중앙을 위해 전문 한통 썼다. 그는 전문에 이렇게 썼다.

 

지원군 당위원회 친애하는 동지들에게

 

.... 중앙은 지원군 전체동지들이 지원군 당위원회와 팽덕회 동지의 지도하에 1년을 꼬박 영용하게 분투, 커다란 승리를 얻은데 대하여 기쁨과 위로를 표시합니다. 현재의 임무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지금 국내 상황은 매우 좋습니다. 전당 및 전국 인민은 열렬하게 여러분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하며 적들은 심히 곤란합니다. 우리도 곤란한 점이 있고 어떤 점은 매우 곤란하지만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동지들이 계속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조선 동지들과 계속 일치단결하기만 한다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16)

 

모택동이 깊고 두터운 감정으로 이 전문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중국 인민들을 대표하여 자신이 가장 사람하는 사람인 중국 인민지원군들에게 따뜻함과 고무를 보냈다. 이 따뜻함과 고무는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변할 것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미국 권력자의 희망과는 반대로 되었다. 그들은 회담장에서 얻지 못한 것을 전장에서 얻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하계공세와 추계공세는 모두 중조군대에 의해 분쇄되었다. 반대로 157천여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646평방 킬로미터의 토지에 밀고 올라갔을 뿐이었다. 영국 선데이 타임즈’ 1118일자 문장을 보면 미국 담판대표는 UN군이 계속 작전하면 할수록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점을 점점 알게 되었다.”

 

1)  미국 Walter·G·Helms '한국전쟁중 미국육군‘ 제 1권, 국방대학출판사 1988년 8월판, 25-26쪽
2) 1951년 7월 11일 ‘인민일보’
3) 모택동이 이극농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11일
4) 'UN'수석담판 대표 조이가 남일에게 보낸 서한, 1951년 7월 12일. 1951년 7월 15일자 ‘인민일보’
5) 리지웨이가 김일성, 팽덕회에게 보낸 통지, 1951년 7월 13일. 1951년 7월 15일 ‘인민일보’
6) 모택동이 이극농 및 김일성,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14일
7) 1951년 7월 15일 ‘인민일보’
8) '모택동 서신 선집’ 인민출판사 1983년 12월판, 416쪽
9) 모택동이 이극농 및 김일성, 팽덕회에게 보낸 편지, 1951년 7월 17일
10) 미국 Walter·G·Helms '한국전쟁중 미국육군‘ 제 1권, 국방대학출판사 1988년 8월판, 31쪽
11) 이극농이 모택동,김일성,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19일
12) 일본 육군 전사연구보급회 편 ‘한국전쟁’하권, 국방대학출판사 1990년 8월판, 61쪽
13) 모택동이 이극농과 김일성,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23일, ‘주은래 군사문선’ 제 4권, 인민출판사 1997년 11월판, 제 204쪽, 205쪽
14) 1951년 7월 27일 ‘인민일보’
15) 1951년 7월 27일 ‘인민일보’
16) 중공중앙이 중국인민지원군 당위원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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