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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우리가 자본가의 세상을 멈췄다!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7-07 조회 993
 

우리가 자본가의 세상을 멈췄다!
-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

유경순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이 땅에 노동자계급이 등장한 이후, 최대 규모의 전국적 대중파업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은 2,000여 개의 사업장에서 동시에 파업투쟁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뒤 40여 년 동안 만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대투쟁의 불씨는 7월 5일 울산 현대그룹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투쟁에서 타올랐다. 투쟁은 빠르게 울산의 현대계열사 투쟁으로 불붙어 나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던 현대 자본 측은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의 노조설립신고서를 탈취하기까지 했으나, 그 결과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이에 맞선 파업투쟁이 바로 지역투쟁으로 발전했다. 투쟁은 울산, 온산공단으로 퍼져나갔으며, 7월 말에는 부산으로 퍼져 대한 조선공사(현재 한진중공업), 세신정밀, 국제상사 같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였다. 뒤 이어 마산,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으로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주로 서울에 집중된 사무직 노동자들도 스스로 노동자라고 선언하고 투쟁에 나서 노동운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뒤 이어 강원, 충청지역 광산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여러 도시의 운수노동자들이 기동력을 갖고 지역별 연대파업을 이끌어 갔다. 전국에서 동시에 파업이 벌어져 실질적인 ‘총파업 투쟁’의 모습이었다.

투쟁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중화학 공업에서 경공업으로 퍼져나가면서, 광공업, 운수부두 선원, 사무직, 전문직, 판매서비스직의 전 산업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7·8·9월까지 투쟁은 모두 3,458건으로 하루 평균 30건을 넘었으며, 투쟁이 가장 치솟았던 8월에는 하루 평균 투쟁이 83건이나 일어났다. 참가 인원은 122만 명을 넘어, 10인 이상 사업체 총 노동자 333만 명의 약 37%에 이른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1,827건(55.2%), 운수업이 1,265건(38.2%), 광업127건(3.8%)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근로조건 개선’ 같이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였고 권위주의적 관리체계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심지어 현대중공업 노조는 '두발 자유화'를 요구조건으로 내걸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의 투쟁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직인 민주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 민주화를 포함한 노동 3권을 쟁취하고자 투쟁으로 나섰다. 투쟁은 대부분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되어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힘 관계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투쟁의 방식도 파업과 시위는 기본이었고, 노동자들이 ‘선 파업’에 들어가면 노동자의 힘에 눌린 자본 측이 협상테이블에 앉는 ‘후 교섭’ 방식이었다. 노동자의 힘이 곧 ‘법’이 되어 ‘현행 법’을 무시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 또한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가들이 악선전과 공권력 투입으로 파업을 뒤흔들자, 사업장의 담을 넘어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로 연대투쟁을 하거나 거리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자 대투쟁은 왜 일어났을까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다”
    

한국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한 노동자 계급은 25년 동안 기본생존권과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의 요구를 억눌려 왔다. 노동자들은 인간으로 살아가기에는 최저수준도 안 되는 임금, 뼈를 깎는 것 같은 장시간 노동, 욕설과 폭력, 거기에 차별대우를 받으며 노동했다. 정권과 자본의 편에 서서 “국가경제에 주름살을 만드는 노동자 파업에 불순세력이 끼어들어와 과격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으던 언론조차 인정할 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처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거기에 3저 호황에 힘입어 1986년 상장 기업의 순이익은 48.5%이고 1987년 상반기만 해도 68.7%나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1986년 6.5% 1987년 7.8%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와 자본가 계급은 1960년대 경제개발 때부터 ‘선성장 · 후분배’를 내걸고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제가 좋아져도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그 몫이 돌아오지 않자, 노동자들은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일부에서는 6월 항쟁은 ‘중산층 혁명’이며 노동자대투쟁은 ‘6월 민주화항쟁이 열어준 정치적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로 민주화와는 무관한 것 또는 ‘대투쟁이 6월 항쟁에 무임승차’ 했다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 노동자대투쟁은 순조로운 민주화를 가로막은 방해요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정말 그러한가.

6월 항쟁에 노동자들의 참여는 어떠했을까. 생산직 노동자들의 항쟁 참여는 다소 지체된 모습을 보였다. 그 까닭은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한 작업장에 오랜 시간 묶여 있었기 때문이며, 더욱 포항 지역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항쟁참여를 방해하기 위해 잔업, 교육 등 온갖 이유로 노동자들을 현장 안에 잡아두려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1984~85년 고양된 노동자 투쟁에 대해 정권과 자본이 집중 탄압을 가해, 노동자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조건 속에서도 생산직 노동자의 항쟁 참여는 주로 공업지역을 중심으로, 항쟁의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항쟁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지역도 있었다. 보기를 들면, 인천의 경우 6월 10일 집회에서부터 작업을 마친 노동자들의 참여가 늘어나 투쟁방식도 평화대행진에서 도로연좌시위, 화염병투쟁 등으로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26일 부평로 시위에서는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도로를 점거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이 창립보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부산지역에서는 택시기사, 시내버스기사 등 운수 노동자의 적극적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이들 택시노동자가 참여한 18일 새벽부터 시위가 한층 격렬해진다. 이들은 택시를 나란히 세워 시위대를 보호하는 바리게이트를 만들고, 차량의 휘발유를 뽑아서 화염병을 제작하는 등 전투적으로 투쟁을 벌였다. 마산은 6월 10일 시위대 3만여 명이 자유수출지역으로 이동하며 ‘최저임금보장’, ‘근로기준법. 파업권쟁취’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자유수출지역 후문이 파괴 됐고 양동파출소가 불탔다.

한편 6월 항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대중적 정치토론의 장이 열리면 그 속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상태와 요구를 표현하기도 했다. 성남에서는 ‘저임금 박살, 노동3권 확보’의 주장이, 안양의 경우는 “잔업, 특근, 철야작업 없이도 노동자가 먹고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목포의 택시노동자들은 ‘월급제 실시’를 요구하고, “근로조건 개선하라”를 강력히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하기도 했다. 포항노동자들은 ‘노동 3권 보장’을, 마산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장’, ‘근로기준법. 파업권쟁취’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그 싹이 완연히 터져 나오기 전에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그리고 6월 항쟁의 지도부인 국민운동본부의 자유 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차단’ 당했다.

6월 항쟁은 직선제 쟁취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요구한 항쟁이었다. 그러나 항쟁세력 내부에는 자유 민주주의 세력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 계급은 ‘배제’ 당하면서 항쟁은 막을 내렸다. 6월 항쟁의 성과를 자유 민주주의 세력에게 빼앗긴 노동자들은 그 뼈아픈 경험을 딛고 바로 스스로를 계급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새로운 발을 내딛었다. 곧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의 성과를 빼앗긴 경험을 거울삼아 바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계급으로 조직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자주성·민주성·연대성’이라는 민주노조의 정신을 뿌리내리다.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에서 임금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 규모의 대중파업투쟁으로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렸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담아 활동하다가 정권의 탄압으로 무너졌다. 1980년대 중반기 유화국면을 틈타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을 계승되고 기업별 노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정신을 살려내, 뒤 이은 정권의 탄압에 맞서 (구로)동맹파업을 벌일 수 있는 힘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70, 80년대 노동운동이 서울, 인천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부 선진적 노동자 세력이 주도했다면,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나아가 대투쟁은 이 투쟁의 조건이기도 한 6월 항쟁의 한계와 단절하고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려 했다. 대투쟁은 6.29선언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현장 투쟁을 통해 폭로했다. 직선제만을 수용한 6.29선언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의 실질적 권리를 결코 보장해줄 수 없으며,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마저 공권력의 폭력적 개입으로 깨부순다는 정권의 본질을 생생히 드러냈다. 더욱이 6.29선언의 모든 성과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모아나가던 보수야당의 본질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명백히 내보였다.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는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확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6월 항쟁을 통해 확인했으며, 이에 독자적으로 투쟁에 나선 것이었다.

한편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자를 단련시키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대투쟁 이전 노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근로자’, ‘산업역군’으로, 사회에서는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다. 노동자들 스스로도 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도 인간이다”, ”노동해방 쟁취해 인간답게 살자“는 주장을 하며 자본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 라고 선언했으며, 그 호칭을 사회적으로 복원해냈다.

대투쟁의 결과 전국에 수많은 민주노조가 결성되어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연대투쟁, 가두투쟁을 통해 단위사업장 중심 성을 극복하고 연대의 기틀을 다지면서 연대조직의 맹아를 만들어 냈다. 이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계승한 것이며, 1980년대 중반 민주노조운동의 연대성을 계승해 민주노조운동에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의 정신을 뿌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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