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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3사 총액임금제 분쇄 공동투쟁
시기 : 1992년 2월 26일 ~ 6월 3일
1992년 공동투쟁을 벌인 3사 노조는 경원세기, 대흥기계, 동양엘리베이터다.
경원세기는 설립 22주년을 맞이한 상장기업으로서 매출 예상액을 2,200억 원으로 설정했으며, 종업원이 1,500여 명(부천 1,000명, 아산 160명, 서울영업소 340명 등)으로 냉난방기, 냉동기, 용접기, 낙농기제품 등을 주로 생산하는 업체다. 경원세기노조는 1979년 4월 5일 설립됐으며, 조합원 수 1,200명(부천 850명, 아산 150명, 서울 200명 등)으로 한국노총 부천지역 지부 지도위원인 장진수가 위원장이었다.
대흥기계는 비상장기업으로 매출 규모는 400억 원 정도며, 종업원은 800명으로 공업용 엔진, 농기구 등을 주로 생산하는 업체다. 대흥기계노조는 1987년 8월 13일 설립했으며, 전노협 중앙위원 조영초가 위원장이었다.
동양에레베이터는 비상장기업으로 매출이 800억 원이며, 종업원 1,100명으로 엘리베이터를 생산·설치하는 업체다. 동양에레베이터노조는 1987년 8월 12일 설립했고, 조합원 수 706명으로 부천·시흥지역 임금인상 공동대책위원회 상임의장을 맡은 양용진이 위원장이었다.
공동투쟁의 배경과 의의
1991년 말부터 총액임금제 의사를 밝혀왔던 정부는 1992년 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총액임금제 적용대상과 사업장 범위 등을 확정했다. 정부가 애초 선전한 ‘월 100만 원 이상’이 아닌 ‘종업원 500인 이상 대기업 868개’ 등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1,434개의 대상업체를 선정했으며, 이 대상업체에 금융지원 제한 등 각종 제재수단을 내세워 임금 총액기준 5% 인상을 강력히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노조 진영은 초기에는 총액임금제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지 못하다가 3월 9일 공공부문 노조들이 16.2% 인상된 공무원 임금인상 내역을 폭로하면서 총액임금제가 1992년 임금인상 투쟁의 핵심사안으로 떠올랐다.
4월 10일 총액임금제 저지를 위한 노조대표자 회의를 열어 쟁의발생신고 집중, 현수막 설치, 노동부 항의방문 등 투쟁계획을 결의했으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힘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정부는 4월 22일 적용사업장 숫자를 월 75만 원 기준으로 780개 업체로 줄인다고 발표했다. 민주노조진영은 5월 2일 노동절 집회에서 총액임금제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사회쟁점화했으나 정부는 여전히 총액임금제를 완강히 고수했다. 총액임금제를 완전히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임금인상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돼야만 했다. 실제 투쟁이 가능한 사업장들은 여러모로 투쟁방안을 모색하고 계획했지만 각 단위노조의 조건이 취약하거나 자본과 정권의 다양한 탄압 때문에 공동투쟁 실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부천지역의 경원세기, 동양에레베이터, 대흥기계 등 3개 노조는 그동안의 연대 활동을 기반으로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을 선도적으로 전개했다.
부천 3사 공동투쟁의 의의는 우선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발전전망을 실천적으로 개척한다는 데 있었다. 1987년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민주노조운동은 본격적인 산업구조 조정기를 맞이한 자본과 권력의 통일적이고 전면적인 노동통제 전략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받고 있었다. 자본과 권력의 노동탄압정책은 기업별 노조 차원의 대응을 점차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간의 탄압으로 침탈된 민주노조진영의 조직력과 심각할 정도로 침체된 투쟁력은 전국적 차원의 새로운 조직 전망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기업별 노조 체계를 극복하고 단일한 산업별노조 체계로의 방향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관건은 조직 형식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운동이 당면한 공동의 투쟁과제에 대해 어떻게 다시 연대전선을 형성하면서 ‘투쟁’으로 나아가는가였다. 따라서 부천 3사 투쟁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1992년 현재 노동통제 전략에 따른 초미의 대립사항인 총액임금제를 공동투쟁으로 분쇄함으로써 기업별 체계와 기업별 의식을 투쟁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고,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발전전망을 개척해 나간다는 데 있었다.
또한 부천지역 노동운동의 향후 전망과 관련해서도 부천 3사의 공동투쟁은 중대한 의의를 지녔다. 부천지역 노동운동의 역사는 중소사업장 노조를 중심으로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정면으로 투쟁해 온 과정이었으며, 이는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에 커다랗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는 한편에서 숱한 민주노조의 파괴와 핵심역량의 해고, 조직력 침탈, 투쟁력의 침체를 초래했으며, 특히 산업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대응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천지역 민주노조 진영은 ILO부천·시흥공대위를 축으로 한 새로운 조직전망을 구축해 왔으며, ILO공대위의 향후 발전 여부 역시 3사 공동투쟁의 성패에 달려있었다. 부천 3사는 공동투쟁을 통해 그간 발전시켜 온 연대투쟁, 연대의식을 한층 강화해야함은 물론 지역의 민주노조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향후 ILO부천·시흥공대위의 구심, 안정적 근거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공동투쟁 목표와 방침
부천 3사의 공동투쟁의 목표는 총액임금제의 분쇄였다. 이는 첫째, 새로운 형태의 임금억제정책을 분쇄함으로써 실질적인 생활임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며 둘째, 정부와 자본의 노동통제 전략의 부당함을 노동자와 전 국민에게 폭로하고 선전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노동운동진영에 유리한 정세국면을 창출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파업에 돌입해도 정부의 총액임금제 방침이 철회되지 않는 한 회사측의 재량만으로 임금체계를 운용할 수 있는 폭은 좁아져 있었다. 더군다나 회사측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해왔기 때문에 노조의 파업이 생산에 큰 타격을 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노조는 아무런 진전도 없이 무리하게 전면적인 파업투쟁 양식을 취한다면 투쟁 대오의 이탈과 동요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부천 3사 노조의 집행부는 지도력과 일관된 투쟁방침으로 조합원들의 투쟁력을 끌어내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부천 3사 노조는 △장기적 투쟁관점 하에 장기투쟁전술을 대비하고 운영 △부천 3사의 연대투쟁전선을 확고히 유지하며 전국적 투쟁을 추동해 자본과 정부측과 일차적인 투쟁전선 형성 △강고한 연대투쟁을 위해 간부와 조합원 차원에서 투쟁의 성격과 방향에 대한 인식과 결의 제고 △5% 인상을 전제로 한 이면합의 거부, 지도부 구속 시 교섭결정권을 제2지도부가 갖지 않는다 △단위사업장의 타결 여부는 3개 노조 임원진 회의에서 결정 △정기적 대시민 홍보전, 과천 노동부 항의방문투쟁, 국회 방문투쟁, 야당 당사 점거투쟁, 경제단체협의회 방문 항의투쟁 등 제반 투쟁에 전국 총액임금제 적용사업장을 비롯한 민중운동진영의 결합 최대한 조직 △투쟁의 마무리는 투쟁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공동집행 등을 공동투쟁전술 운영원칙으로 세웠다.
공동투쟁의 조직과 전개
1992년 부천 3사의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은 부노협 소속의 대흥기계 노조, 동양에레베이터노조와 한국노총 부천시지부 소속의 경원세기노조 등 3개 노조가 당면한 상황과 과제에 대한 공동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권과 자본의 총체적 탄압 속에서 단위노조의 개별화된 투쟁이나 느슨한 연대투쟁만으로는 최소한의 생존권과 민주노조마저 사수하기 힘들다는 자각에서 민주노조 총단결과 이를 통한 힘 있는 연대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지역 차원의 단결과 투쟁이 전개되려면 중심사업장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하다는 공동인식도 하고 있었다. 이는 부천 3사뿐만 아니라 부노협을 중심으로 한국노총 부천시협, 시흥지역 등의 민주노조 성향 노조들의 교류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했다.
부천 3사는 당면과제에 대한 공동인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인 연대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초기에는 주로 위원장 간의 교류에 그쳤지만, 임원진이 정기적 모임을 하면서 1991년 임금인상 투쟁에서 낮은 차원의 3사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즉 비슷한 임금인상안 마련, 교섭 요일 맞추기, 준법투쟁 시기 맞추기, 사안별로 가능한 공동투쟁 실천 등을 통해 임금요구안을 100% 가깝게 관철하고 연대투쟁에 대한 상호 자신감과 신뢰를 갖게 됐다. 1991년 공동 임금인상투쟁 이후 12월부터 단위사업장 간의 단결의 질과 폭을 강화하기 위한 임원진회의, 부서부장단회의 등을 정례화하고 1992년 3월까지는 월 1회, 4월부터는 주 1회, 파업돌입 직전에는 4회의 상임집행위원회 회의를 했다. 이를 통해 3사의 노조활동에서 일상적으로 간부와 조합원까지 공동실천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한편으로는 지역적 단결을 강화하는 데서도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확대해갔다.
지역 차원에서는 1991년에 부노협을 중심으로 부천·시흥지역의 민주노조 대표자 모임을 하고 단결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하반기에 230여 명의 간부가 참여한 수련회에서 민주노조 총단결과 이를 통해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전체적 투쟁으로 대응해 갈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1992년 ‘부천·시흥지역 임금인상 공동대책위원회’(아래 ‘부천시흥임금공대위’) 구성을 결의했다.
1992년 2월 26일 부천시흥임금공대위를 발족하고 경원세기노조의 장진수 위원장과 동양에레베이터노조의 양용진 위원장, 대흥기계 노조의 조영초 위원장이 공동의장을 맡아 지역 차원의 공동투쟁에 대한 의지와 책임성을 분명히 했다. 이날 발족식에서는 노조 간부들이 부서별로 모여 임금인상 투쟁 시기 실천계획을 세우고, 월 1~2회 모임을 정례화해서 부서모임을 통합하기로 했다. 이렇게 이전까지 노조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지역사업을 조합 간부와 조합원 차원의 공유까지 폭을 넓히는 계기로 만들었다.
공동투쟁 일지
3월 25일부천시흥임금공대위는 한국노총 부천시협과 공동으로 부천시민회관에서 임금인상 투쟁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는 3,000여 명의 조합원이 모여 1992년 임금인상 투쟁 승리, 5% 임금억제 분쇄, 노동악법 철폐 등을 결의했다. 이날 대흥기계노조는 13차 교섭 끝에 생산직 노동자 유니온숍, 근속·위험·가족·자격수당 각 2,500원 인상 등을 주요내용으로 단체협약에 합의했다. 이와 관련해 노조 간부들은 “단체협약 타결내용은 미흡하지만, 부천시흥임금공대위의 투쟁 일정에 맞추기 위해 마무리했다”며 공동투쟁에 대한 실천적 결의를 밝혔다.
4월 9일 부천시흥임금공대위에서 지역 노조들은 1992년 임금인상 투쟁 타결원칙으로 △타결 여부는 조합원 총회에서 결정 △타결시 미리 임금공대위에 보고하고 협의 △임금인상분 중 일정액수를 쟁의기금으로 모아 파업노조 지원, 구속자 지원, 임금공대위 사업 등에 사용 △결정사항은 대자보를 작성하여 단위노조에 게시 등을 결의했다. 이러한 결의에 덧붙여 부천 3사의 지도부는 △요구 100% 쟁취 △부천 3사 임원 및 상임집행위원 연합회의 정례화 △마무리 시 사전 협의 등을 결의하고, 결의사항에 대해 부천 3사 전 조합원의 서명을 받았다.
4월 29일 경원세기 구내식당에서 부천·시흥지역 공동임금인상 투쟁 중간보고대회를 열어 결의를 다졌다. 더불어 5월 2일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해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부천 3사는 교섭을 비교적 빨리 시작해 8차례씩 진행했으나 회사측은 3개 사업장 모두 ‘총액 5%’만 고집했다. 이에 대흥기계노조는 4월 30일 쟁의발생신고를 결의해 5월 2일 신고했고, 동양에레베이터노조는 5월 2일 쟁의발생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한 뒤 5월 4일 쟁의발생신고를 했으며, 경원세기노조는 5월 12일 임금인상 투쟁 시기 집중을 위한 총회투쟁 찬반투표를 벌였다.
5월 15일 부천 3사가 공동으로 임금요구안과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가족 협조 요청 통신문을 발송했다. 다음날에는 합동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향후 투쟁방향과 기조에 대해 공유하고 공동준법투쟁을 결의한 뒤 조합원들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합동체육대회를 했다.
5월 19일 부천 3사 조합원들이 전원 집단조퇴해 총액임금제의 허구성과 노동자들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대시민 홍보전을 전개했다.
5월 22일 대흥기계노조는 조직을 쟁의대책위원회 체계로 전환하고 준법투쟁과 파업 준비 일정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5월 25일 잔업·철야·특근 거부 등 준법투쟁을 시작해 5월 27일 파업찬반투표, 5월 28일 조합원 전원 조퇴 후 대시민 선전전, 5월 29일 파업규율에 대한 토론회 열어 파업규율 확정 등 일정을 이어갔다. 동양에레베이터노조도 5월 25일부터 부천과 서울 공장 모두 태업을 시작했다.
5월 27일 부천 3사 간부 합동 철야농성을 하면서 6월 1일 이후 공동투쟁에 대한 대책회의를 했다. 전노협은 5월 27일 안산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지부 사무실에서 24차 중앙위원회 회의를 열고 임금인상 투쟁 대책을 논의하면서 부천 3사 등 파업현장에 경찰력이 투입될 경우 각 지역에서 농성이나 집회 등 적극적인 항의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209개 수도권 노동조합이 연대 서명한 부천 3사 투쟁에 대한 지지성명을 <전국노동자신문>에 게재했다. 이어 부천 3사는 5월 29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액임금제 철회와 경제대개혁을 촉구하며 투쟁 계획을 밝혔다. 이와 함께 부천시흥임금공대위는 △6월 1일 각 노조에서 부천 3사 파업보고대회을 열고 지지대자보 부착 △적극적인 지지방문 전개 △구속자 발생 시 경찰서와 노동부 항의방문에 동참 △총액임금제를 분쇄하기 위해 모든 조직력을 동원해 투쟁할 것 등을 결의했다.
6월 1~3일 부천 3사가 시한부 파업에 돌입했다. 대흥기계노조는 출퇴근 파업, 동양에레베이터노조는 운동장에 대형천막을 치고 조합원들의 3교대 철야농성, 경원세기노조는 연속적인 임시총회로 투쟁을 전개했다. 사흘에 걸친 파업투쟁은 대구 대동공업, 마창 세일중공업과 삼양전기, 수원 영진약품, 이천 쥬리아화장품노조의 파업투쟁을 촉발했다. 시한부 파업 이후에도 부천 3사는 주 1회 임시총회 투쟁을 전개하면서 공동선전전과 집회를 벌여나갔다. 6월 13일에는 부천 3사 모두 임시총회를 열어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투쟁방안과 결의를 재확인하고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마창노련 소속 20개 노조와 11개 참관노조는 ‘부천 3사의 연대파업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전국노동자신문>에 실어 연대투쟁의 결의를 밝혔다.
이러한 부천 3사의 공동투쟁은 총액임금제 5% 임금가이드라인을 돌파했으며, 이후 ‘부천·시흥지역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조직적 성과를 낳았다.
공동투쟁 평가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전국적 투쟁 전선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부천 3사가 공동 파업투쟁을 통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중적 결의와 투쟁 의지가 바탕이 되었으며, 투쟁 목표와 원칙이 분명했다.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공동투쟁 원칙과 타결 원칙, 쟁의기금 결의 등에 대해 전체 조합원 모두가 직접 서명 결의함으로써 단위노조 사이의 신뢰와 결의를 높였다.
둘째, 지속적이고 충실한 사전 준비과정을 통해 간부층 위주의 방침보다는 전체 조합원을 중심에 두고 사업을 전개했다. 같은 업종의 금속사업장이란 점과 규모가 비슷한 남성 위주 사업장이란 점이 동질성을 갖기 쉬운 조건이었으며, 1991년 연대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3개 사업장 노조 모두가 단결의 질과 폭을 강화하기 위한 공동실천을 일상적으로 전개했다.
셋째, 지도부의 의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각 사업장 내부의 각기 다른 조건과 조합원 정서의 차이, 운영방식과 투쟁방식의 차이 등 여러 차별성이 있었지만 서로 내부 어려움에 대한 배려와 격려, 각 단위사업장 조건을 고려한 투쟁방침과 실천 등이 연대파업과 장기적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넷째, 투쟁 전반에 대해 통합 임원진회의, 확대간부회의를 통한 결정과 실천을 함으로써 투쟁과정에 대한 공동의 집행력을 일관되게 행사할 수 있었다.
한편 부천 3사의 노조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각오로 싸웠고 승리를 쟁취했지만 투쟁 과정에서 몇 가지 아쉬움도 남겼다.
투쟁의 마무리는 투쟁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공동 집행한다는 방침이 실천되지 못했다. 타결 과정이 단위사업장별로 전개되면서 타결 시기와 수준, 조합원의 상태와 노조 내부의 상황에 의해 타결 이후 일부 노조는 심한 후유증을 앓기도 하였다. 또 3개 노조의 공동투쟁에 집중하다 보니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이 부천 3사 위주로 진행되고 그로 인해 일부 중소사업장이나 지역 간부들에게는 소외감을 주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과 이를 통한 연대투쟁이 총액임금제 분쇄투쟁 이후 지속적으로 강화되지 못해 투쟁의 조직적 성과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연대투쟁을 수행한 점과 전국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점, 그리고 1992년 임금인상 투쟁의 관건이었던 총액임금제를 돌파했다는 점은 민주노조 총단결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산별노조 건설을 향한 공동투쟁의 모범이었다.
참고자료 : <총액임금제 5% 분쇄투쟁>, 「부노협 백서」(1996),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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