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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33년 3월 경남 혁명적 교원노동조합 결성_안태정 (9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7-03-16 조회 2450
 

누군가 말했다. 자본계급에 맞서서 계급투쟁을 벌인 노동계급이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갖고 기개를 지키며 당한 패배는 노동자들의 의식에 큰 보약이 된다.”고 하였다. 다른 혁명적 노동운동처럼 경남의 혁명적 교원노동조합 운동도 강령행동강령에서 보듯이, 자본계급이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번갈아가며 연출하는 비극과 희극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또 다른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투쟁했다. 다시 말해서, 착취와 억압과 전쟁의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철폐하고 착취와 억압과 전쟁이 생기지 않는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혁명적 노동운동을 펼쳤다.

 

 

19333, 경남 혁명적 교원노동조합 결성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를 훑어보면, 그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계급은 일종의 비극과 희극의 상황을 번갈아가며 연출해 왔다. 즉 사회의 토대에서는 불황(공황)과 호황, 상부구조에서는 파쇼(독재)와 반파쇼(민주화)’ 등을 반복 순환시켜 왔다. 자본계급이 이러한 비극과 희극을 연출하는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주의노동자 혁명세력과 운동을 봉쇄하고,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영구화하여, 자본증식을 확보하는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자본계급은 그 역할이 다른, 산업자본토지자본은행자본국가자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자본의 목적은 산업노동자농업노동자은행노동자국가노동자 등 노동계급의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토지자본은행자본국가자본은 산업자본이 이윤획득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각각 토지,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보장하는 법과 폭력과 이데올로기 등을 제공한다. 그 대가로 각각의 자본은 지대이자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이윤을 나눠 가진다. (한편 토지자본은 다른 모든 자본에 포함되어 있다. 즉 산업기관 시설물 부지, 은행기관 시설물 부지, 국가기관 시설물 부지 등의 형태로).

 

이 땅에서 자본계급은 1910년대에는 비극, 1920년대에는 희극, 1930년대 무렵에는 또 다른 비극을 연출했다. 자본계급은 1930년 전후부터 자본주의 경제공황, 즉 자본축적 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본계급은 자본축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1930년대부터 안으로는 파쇼체제를 구축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을 벌였다. 자본계급은 노동계급 내부에 어용 노동자단체를 조작하거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 등을 파괴하였다. 나아가서 자본계급은 과잉생산을 소모하고 상품시장을 확대하고 자원을 약탈하기 위하여 19319만주침략’, 19377중국 침략’, 194112월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러나 혁명적 노동계급은 자본계급이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번갈아가며 연출하는 비극과 희극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또 다른 세계를 만들려고 하였다. 즉 착취와 억압과 전쟁의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철폐하고 착취와 억압과 전쟁이 생기지 않는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혁명적 노동운동을 펼쳤다. 혁명적 노동운동 세력은 소비에트형태의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여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려고 투쟁했다.

 

 

이러한 혁명적 노동운동에 국가노동자에 속하는 초등교원 노동자들도 합류하였다. 그것은 바로, 1933328일 결성되어 10치안유지법’(현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 위반 혐의로 검거되기까지 활동한 이른바 경남적색교원노동조합”(일제 등에 의해 붙여진 명칭) 운동이었다. 이것은 초등교원 노동자들이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 운동은 부산을 중심으로 김해, 의령, 합천, 함안, 고성, 사천, 남해, 통영, 마산 등 경남지역 전체에 확대된 것이었고, “전북의 적색교원운동 및 전남의 여수노조운동과도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던 1930년대 전반 남부지방 최대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기도 했다.

 

 

  
  경남 혁명적 교원노조 관련자들의 구형 기사

 

경남의 혁명적 교원노동조합운동은 진주사범학교(1923년 3월에 설치된 경남 공립사범학교, 현재 진주교육대학교의 전신) 의 비밀결사인 독서회 활동 출신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시 독서회에서 학습교재로 가와카미 하지매[河上肇]가 쓴빈핍물어(貧乏物語)(빈곤론, 송태욱 옮김, 꾸리에 북스, 2009),자본주의 카테고리와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등을 사용하였다. 특히빈핍물어, “우선 부의 증대를 꾀하는 것을 경제학의 사명으로 여기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빈부 격차의 해소 필요성을 강조했고, “또한 개인의 이기적인 돈벌이 행위에 아무런 속박도 가하지 않고 자유방임케 하는 경제조직은 돈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구조이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딱하고 불편한 구조라고 했고, 그러기 때문에 경제조직을 돈벌이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인간의 필요와 행복을 위해서 생산하고 분배하는 사회주의사회로 변혁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 내용의 책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진주사범학교 학생시절에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에 대한 사회주의적 의식화를 하였다. 그들은 졸업한 후 경남 지역의 공립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서로 연락관계를 가지다가 사회주의적 교원노동운동 등을 조직적으로 펼치기로 하였다. 그들은 19327월부터 19331월 무렵까지 마산, 진영, 진주 등지에서 수차례 모임을 열어 교원노조 결성을 위한 준비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들은 19321013일 마산에서 경남교육회가 개최되자 이를 기회로 참가자들과 교육 현장의 문제점을 서로 논의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우리들은 교육 부분의 조직체를 결성하여 실천 운동을 감행한다. 2. 각자의 의식 각성을 위하여 관계 서적을 구하여 돌려본다. 3. 총책임자를 김두영(金斗榮 : 그 맏형은 19284차 고려공산 청년회의 경상남도 위원장을 지냈고 1931~1932년 무렵의 대구공산주의자 협의회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김계영金桂榮이고, 둘째 형은 1931, 1935년에 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적색노동조합 부산지방 최고협의회사건 및 경남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그룹의 주모자이었던 김태영金台榮이며, 그 누이 김계정金桂正도 역시 사회주의운동가로 사남매가 모두 하동 출신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윤일尹一의 사위이기도 한 김두영은 ‘8.15 해방후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하동군 대표로 나타났다.)으로 하여 그 지도에 따라 활동한다. 4. 잠정적으로 각자의 현재 거주지를 책임 구역으로 하여 극비리에 동지를 확보한다. 5. 결성준비 과정에서 각각 매월 1원씩 경비를 납부한다. 6. 아동의 교육은 학구적 태도를 버리고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주의의 주입에 노력한다.” 등이었다.

이러한 준비활동 한 뒤에 1933328일 마산 앞바다 배 위에서 교원노조를 결성하였다. 교원노조의 중앙집행부는 의장 정두명, 재정부와 조직부 김두영, 교양부 이화준, 선전부 이명상으로 구성하였다. 중앙부서 밑에는 지역별로 부산을 동부, 진주를 서부, 함안과 군북을 중부로 나누어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 소모임을 두었다.

 

교원노조의 강령“1. 생활권 옹호 2. 언동 집회의 자유,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획득 3. 제국주의 교육 타도, 프롤레타리아 교육 건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 실시 4. 무산계급의 완전한 해방등이었다. 교원노조의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 독자적 문화 건설의 자유]

1. 아동의 혁명성 조장(특히 담임 학급 아동의 계급적 훈련과 반조직).

2. 지방 무산교육기관의 적극적 지지.

3. 계급적 가정방문 여행(勵行).

4. 조회훈화 및 교장의 교육방침의 계급적 입장에서 해설.

5. 교육노동자의 강제출금제도 폐지.

6. 흠식(欠食)아동의 조사 및 대책강구(주반晝飯 및 일체학용품의 무료급여).

7. 교내 독서회의 완전한 자유획득.

8. 제반 행동의 반동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반대투쟁.

9. 아동을 통한 산업장려의 반동성을 폭로 및 보이코트.

10. 시사문제의 계급적 비판 계급의식의 함양.

11. ‘조선교육회의 해소와문교의 조선보이코트.

12. 정각여행定刻勵行(규약).

13. 비밀엄수(규약).

14. 강습회 및 휴가 기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주의를 선전하여 동지를 획득 규합할 것(조합의 확대 강화에 노력).

15. 도서를 구입하여 각자의 계급적 수양에 노력할 것.

16. 계급적 아동에게 독물(讀物)의 제공 및 지도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월급 차별 철폐(조선인 월급을 인상하여 일본인과 동일하게)]

[국가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제 실시]

17. 직업과를 주로 하는 노예적 근로교육을 비판 폭로하여 반대할 것.

18. 각 축제일, 기념일 등의 계급적 이용.

19. 아동의 수업료의 계급적 비판과 그 전폐(全廢).

20. 수신(修身) 및 철방(綴方) 기타 학과의 계급적 비판폭로와 지도.

21. 진보교육노동자의 해고 절대 반대.

22. 희생동지 및 그 가족의 적극적 원조.

23. 아동의 일시총동원 지도.

24. 반동교원의 방축(放逐).

25. 부르주아적 조기회(朝起會) 수양단 반대.

26. 종교, 미신, 숙명론 등 비과학적 제 관념 타파.

27. 반전사상의 고취.

28. 아동의 계급적 친애.

29. 아동 등의 민족관념 선도.

30. 교내의 국어화(國語化)’ 반대, 조선어 사용의 완전한 자유(집요하게 투쟁하자).

31. ‘국민정신작흥(國民精神作興)’ 반대, 조선역사 및 조선지리 교수(敎授)의 자유(투쟁을 격성激成하자).

32. 교내에서의 교육만능의 전제주의를 격퇴하자.

33. 평소 반동교원의 비인간적 행동을 아동에게 폭로하여 방축(放逐)할 것.

34. 아동에게 적절한 운동을 지도하여 거동을 민활하게 하자.

35. 아동의 집단성을 촉성시키자.

 

위와 같은 강령과 행동강령을 통해서 볼 때, 교원노조의 목적은 교원노동자 등의 노동자들(예비노동자로서 학생과 일반노동자)에 대한 사회주의적 교육활동을 발판으로 삼아, 자본주의 사회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사회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부산, 김해, 의령, 합천, 함안, 고성, 사천, 남해, 통영, 마산 등의 공립보통학교 교원노동자들과 일반 사회주의자들이 교원노조 운동에 참여했다. 교원노동자들은 대개 진주 사범학교 독서회원 출신과 진주 사범학교 출신이었다.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원노동자들은 모두 회비를 월 5원씩 냈다.(당시 교원노동자들의 월급이 45원 정도였으므로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교원노조의 초등학생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의식화 교육활동 사례를 보자. 증언자가 말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 그전 날 교장에게 제출하였는데 교원노조에서는 지도안(교안)을 모두 바꾸어 가르쳤지요. 김경출이 일괄적으로 고친 지도안을 프린트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이라 하면 교과서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합리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는 농민에게 돈을 빌려주고 제날에 갚지 못하면 저당 잡은 토지를 빼앗아가 결국 이 토지는 지주나 자본가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내용으로 고쳐 학생들에게 주입했습니다. 특히 작문시간을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사상교육을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교원노조는 사회과학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독서회를 결성·지도했다.

 

  
  경남 혁명적 교원노조 관련자들의 예심종결 기사(조선중앙일보, 1934.4.22.)

 

교원노조는 산업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의식화 활동도 하였다. 증언자가 말했다. “예를 들어 조선방직회사 같은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이 공장주에게 대항하도록 만들었지요. 당시 조방직공은 모두 시골 출신으로 대부분 딸애들이었습니다. 대개 이들은 기숙사에 있었는데 기숙사비가 3원 내지 350전인데 비해 월급은 보통 450전내지 5원 정도의 저렴한 임금이었습니다. 일요일에만 외출을 시켜주는데 그 공장 옆에 요즘의 호떡, 찐빵 파는 가게가 쭉 늘어서 있었습니다. 찐빵 1개에 1전이었는데 이것을 직공 처녀애들이 잘 사먹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다가 이것을 사주면서 말을 붙이고 눈치를 보아가며 그들을 의식화시키는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또 당시 한창 구포 인근에서 낙동강 일천(一川)공사(여러 갈래로 난 낙동강 지류를 하나로 모으고 수문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이면 그림을 잘 그리는 김경출이 캔버스를 매고 나와 같이 공사장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면서 임금투쟁을 하도록 일종의 선동공작을 했지요.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45전 내지 50전이었고 특별한 기술자가 1원 정도였습니다.”

 

한편 교원노조의 재정부와 조직부를 맡았던 김두영은 교원노조 결성 준비를 위해 활동하던 때인 193311일 마산 모임에서 전협(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계의 김또룡, 그리고 이오판, 이재성과 함께 산업노동운동에 힘쓸 것을 협의하였다. 그 가운데 부산 공장지대에서의 활동책임은 김또룡이 담당했다. 증언자가 말했다. “김또룡은 교원이 아니었고 일본에 연락하러 간다며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비를 대주곤 했지요.” “김또룡이 와서 일본의 노동운동 상황이나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대개 우리를 의식화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장노동자를 의식화시켜 파업으로까지 몰아넣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김또룡은 일본을 오가며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재일본 후원조직 또는 전협과의 연락을 도모하거나 선전삐라를 발행 및 이론서적의 유입 배부를 담당했다. 교원노조는노동자 농민에게 격함,제사공장등의 팜플렛을 일본 동경에서 발행하여서 경남지역에 배포했다. 이와 같은 교원노조 조직원의 활동과 연계 하에 1933년에 고무파업, 진해 동양제사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위와 같은 혁명적 교원노조 활동이 자본계급에 의하여 파괴된 계기에 대하여 증언자는 말했다. “마침 시학제도(장학관이 나와서 각 교원을 지도)가 실시되어 아이들에게 세금이란 주제를 냈는데, 아이들이 평소에 내가 말한 대로 써서 이것이 증거가 되어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193310월에 교원노조 활동 등에 관련된 사람 29명이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이 중에서 혁명적 교원노동자가 14명이었고, 일반 사회주의자가 15명이었다. (이상은 한국현대사의 증언 : 신영갑 - 적색교원노조사건과 부산지역 조공·사회당에서의 활동/대담 오미일, 역사비평16, 역사비평사, 1992 등 참고).

       

누군가가 말했다. 자본계급에 맞서서 계급투쟁을 벌인 노동계급이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갖고 기개를 지키며 당한 패배는 노동자들의 의식에 큰 보약이 된다.”고 하였다. 다른 혁명적 노동운동처럼 경남의 혁명적 교원노동조합 운동도 강령행동강령에서 보듯이, 자본계급이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번갈아가며 연출하는 비극과 희극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또 다른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투쟁했다. 다시 말해서, 착취와 억압과 전쟁의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철폐하고 착취와 억압과 전쟁이 생기지 않는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혁명적 노동운동을 펼쳤다. 때문에 다른 혁명적 노동운동의 역사처럼 1933년 경남의 혁명적 교원노동조합 운동의 역사도 오늘날의 노동계급의 혁명적 의식 함양에 큰 보약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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