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항쟁을 찾아 가는 길-2
정민주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답사 둘째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세 번째 방문하는 제주는 나에게 맑은 날씨를 보여준 적이 별로 없다. 첫째 날의 맑은 날씨가 이번 답사에 계속될 줄 알았는데 기대를 또 져버린다. 한내 제주위원회 회원들은 제주는 흐리고 비오는 날씨가 더 좋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시지만 일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나로선 흐린 날씨가 조금 원망스러울 뿐이다.
오늘 일정은 제주 중산간 지역을 답사한다.
첫 번째 방문지는 임문숙 가족 헛묘이다. 헛묘는 시신을 묻지 못한 묘를 말한다.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이 봉분만 세운 것이다. 임문숙 가족 헛묘는 서귀포시 동광리에 있다. 봉분이 7개 있지만 모두 헛묘이고 2기는 합묘이다.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시작하자 동광 큰넓궤에 피신생활하던 동광리 주민들은 넓궤가 발각되자 한라산으로 더 깊이 숨어들었다가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정방폭포 위에서 집단학살 당했다. 내가 레드헌트를 통해 기억하는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은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파도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정방폭포 위에서도 학살이 있어 찾아간 유족들은 구덩이에 시신들이 엉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 헛묘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한다. 시신이 있던 구덩이를 본 사람들은 시신들이 엉켜 살이 썩어있던 당시 상황을 젓갈 같다고 증언했다. 감히 상상할 수 있는가.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것도 원통한데 그 주검마저 그토록 처참한 모습이란 것이.
 
비까지 부슬거려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이동해 동광 삼밧구석에 닿았다. 동광 삼밧구석도 ‘잃어버린 마을’이다. 제주 전통가옥들은 집 뒤에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대나무들과 검은 돌담들이 집들이 모여 있던 마을임을 알려준다. 남아 있는 집터들은 지금은 밭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삼밧구석은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당시 46가호가 살던 큰 마을이고 임씨 집성촌이었으나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불타고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다음 목적지는 동광리 마을 사람들이 숨어 지내던 동광 큰넓궤이다. 큰넓궤란 큰 동굴을 말한다. 큰넓궤는 마을 목장 안에 있다. 목장 입구에서 차를 내려 헬멧과 손전등을 챙겼다. 굴 내부가 험하고 좁아서 힘들 것이라고 하셨다. 큰넓궤 입구에는 안내 표지가 있긴 했지만 혼자 찾기에는 좀 어려워 보였다. 잡목들이 나 있어 잘못하다간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동광 큰넓궤는 용암동굴로 동광주민들이 2개월가량 120여 명이 집단적으로 은신 생활해 온 곳이다. 한 명씩 동굴로 들어갔다. 랜턴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들어가자 쪼그리고 들어갈 정도의 터널이 나왔다. 작년에 다녀온 베트남 구찌터널이 생각났다. 구찌터널은 그나마 진흙이라 부딪혀도 아프지 않지만 이곳은 용암동굴이라 천장부터 바닥까지 뾰족뾰족 돌출되어 있어 헬멧이 없었다면 머리가 성치 못할 것 같았다. 조금 넓은 곳이 나오다 곧바로 기어지나가야 하는 좁은 통로가 나왔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다 몸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좁은 통로를 지나자니 이곳에서 2개월을 지냈을 마을 주민들 생각이 절로 났다. 이런 곳에서 120명이 생활을 한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오는 통로를 지나니 넓은 공간이 드디어 나왔다. 굴 안쪽은 이층구조로 되어 있었다. 동굴 여기저기에는 깨진 사발이며 그 당시 생활하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암흑과 언제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렴움에 하루하루를 보냈을 주민들을 생각하며 모든 불빛을 거두고 묵념을 했다. 미친 시절에 목숨을 연명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 아닐까란 생각이 암흑 속에서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간신히 구한 식량을 나눠먹으며 서로를 다독였을 사람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동굴을 기어 밖으로 나오니 옷은 엉망이 되고 무릎은 긁혀 상처가 났다. 상처쯤은 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내를 맡은 김창후 소장님은 당시 아이들이 산 위에서 망을 보고 토벌대가 오면 깃발을 내려 사람들을 대피시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제주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한 살짜리 두 살짜리 젖먹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이 무슨 이념이 있어 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동굴 밖 목장에서 차로 가는 길에 고사리를 꺾었다. 잘 몰랐을 때는 고사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조금씩 눈이 밝아져 곧잘 꺾을 수 있었다. 새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고사리를 분간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이번 4.3 답사를 통해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밝아지지 않았을까?
점심식사 후 다시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을 찾았다. 마을 주민들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자 해안으로 내려가기 보다는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을 근처 밀림이나 궤(동굴)에 숨어 생활하다 발각돼 학살되었다. 마을은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 중 당시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삶을 버티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다. 이들 중 김종원 씨는 우울증 판정을 받아 ‘4.3 후유장애자 추가신고’를 했다고 한다. 미친 시대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어떠한 보상도 그들의 삶을 보상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날 마지막 코스는 새별오름이다 새별오름은 다섯 개의 돌출된 부분으로 별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새별오름은 아래에서 보기에는 금방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올라보니 가팔라서 힘이 들었다. 날씨가 맑으면 대정에서 제주시 지역까지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안개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새별오름은 한림면 유격대의 거점이자 서북부 지역의 근거지였다. 이 오름은 무장대의 훈련장으로 이용되었으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볼품없는 무기를 부여잡고도 자신의 목숨 바쳐 싸웠을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숙소로 돌아온 후 저녁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송시우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님의 교육이 있었다. 송시우 부위원장은 4.3을 ‘항쟁의 관점’으로 봐야한다면서 그 배경으로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제주 지역의 적색농민조합운동을 들었다. 제주 지역은 근대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조건, 척박한 경작 환경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평등하게 가난’했다. 이런 연유로 제주민들은 공동체성이 높았던 것이다. 답사를 통해 느낀 점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답사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답사의 마지막 날인 셋째 날은 무장대의 흔적을 찾아가는 코스다. 무장대들이 투쟁하던 의귀국민학교와 무장대들이 집단 매장된 의귀 송령이골, 현의합장묘, 이덕구 산전(복받친 밧)을 찾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