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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10년 만에 합법화(1999년 7월)
1999년 7월 1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 이틀 뒤인 3일 합법노조로 신고필증을 받았다. 1989년 5월 28일 전교조가 법외노조로 창립한 지 10년 만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9월 27일, 경찰의 삼엄한 봉쇄를 뚫고 한신대학교에서 전교조의 전신인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창립됐다. 전교협은 ‘교육민주화 실현’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참교육 실현, 사립학교 민주화 등 학교 민주화 투쟁과 교육악법 개정 투쟁에 앞장섰다. 전교협은 교육법을 “교사·학부모·학생의 민주적 권리 확보를 기반으로 교육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학교를 민주화하여 교육내용을 쇄신”하는 방향으로 개정하자고 주장했다.
전교협, 교원노조 결성 결의
전교협은 1988년 11월 20일 여의도광장에서 교사 1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교육법 쟁취 전국교사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1960년 이후 각종 교사집회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이러한 교사들의 투쟁에 힘입어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교사들의 선거로 교장을 선출하기도 했고 교육자치제, 교장선출 임기제, 교육이념, 학생 권리 등 일부 분야의 개선이 이어지기도 했다.
전교협은 1989년 2월 19일 단국대에서 2차 대의원대회를 열어 “상반기 중 교원노조를 결성한다”는 안을 참석대의원 280명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같은 해 3월, 여소야대 상황에서 교원의 노동3권을 회복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가공무원법 위반을 빌미로 징계 방침을 발표하는 한편 지도부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발부, 반상회 등을 통한 비방유인물 배포, 결성대회장 원천봉쇄 등 탄압을 자행했다.
탄압 뚫고 전교조 기습 결성식
전교조는 1989년 5월 28일, 결성대회 개최 예정지였던 한양대학교는 물론,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을 경찰이 원천봉쇄함에 따라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 민주광장에서 결성식을 하고, 윤영규 초대위원장 등 임원을 선출한 후 발족선언문을 낭독했다. 탄압을 뚫고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결성식은 교사·학생 200여 명의 참가 속에 현수막 2장과 손 마이크 하나로 10분 남짓 만에 끝났다.
전교조가 결성되자 정권은 지도부 구속, 조합원에 대한 탈퇴 공작, 가입교사 전원 파면·해임 방침 발표 등 초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어 9월 초까지 이른바 ‘교육 대학살’이 벌어져, 교사 1,519명이 파면·해임되고, 42명이 구속됐다.
단식·출근투쟁 이어가며 지지 확산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 맞서 전교조 사수를 위해 교사들이 벌인 처절한 단식농성과 해직교사들의 출근투쟁은 전교조에 대한 지지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려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해직교사들의 현장 방문은 분회·후원회 결성 등을 끌어내 전교조 사업의 일상화와 조직 사수·복원의 밑거름이 됐다. 이어 민주학부모회가 서울, 인천, 광주 등 전국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고, 9월에는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참교육학부모회)’가 결성돼 학부모들이 교육의 일 주체로 나서게 됐다. 민교협도 전교조 가입을 결정했다.
‘전교조 탄압 저지 및 참교육 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는 전국적으로 2,000여 개가 넘는 노동자·농민· 학생·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했는데, 이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였다. 전교조 결성으로 촉발된 학생들의 교육민주화운동과 해직된 스승들을 지키려는 투쟁에는 250여 개 학교, 연인원 50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장으로 돌아가 교육개혁 실천활동
1990년부터 전교조는 교육민주화운동과 해직교사 원직복직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교육자치 운동,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 등으로 교육 현장에 광범위하게 뿌리 내렸으며,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의 연대체인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에 가입해 주도적 역할을 했고, 전국연합 가입을 통해 국내 민중운동에서도 중심적 몫을 담당했다. 국제교원노조연맹(EI)의 가맹 승인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노동기구(ILO)도 한국 정부에 ‘교원노조 인정’과 ‘해직교사 원직 복직’을 권고를 결의했다.
이렇게 전교조가 교육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아 나가자, 1993년 김영삼 정권은 합법화 대신 ‘조건부 복직방침’을 제시했다. 이에 전교조는 “교육부의 방침을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학교로 돌아가서 교육개혁을 실천하고 전교조 합법화를 앞당기기 위해 복직하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면서 4년 만에 교단으로 돌아가게 됐다.
1기 노사정위 합의로 교원노조법 입법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뒤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구성된 1기 노사정위원회는 2월 6일, 1999년 7월부터 교원노조를 합법화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연말이 될 때까지 입법을 추진하지 않았으며, 민주노총 차원으로 투쟁에 나선 이후에나 전교조 입법안을 추진했다. 1999년 1월 6일, 마침내 교원노조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7월 1일 공식 발효됐고, 전교조는 출범 10년 만에 합법노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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