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권리를 둘러싼 제헌의회의 인식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대중교통 이용객의 절반이 도시철도를 이용하고 그 수는 일일 약 530만 명이 넘는단다. 도시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면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서울 도시철도 9호선 노동자가 파업을 했는데 출근시간인 오전 7~9시는 100%, 퇴근시간인 오후 5~7시는 80%, 나머지 시간대는 60% 열차 운행이 유지되었다. 필수유지업무제도와 대체인력 투입으로 인한 ‘정상 운행’이었다. 1~8호선, 철도 노동자 파업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본에 타격을 주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도록 한다는 ‘파업권’은 유명무실한 거다. 파업권은 노동3권 중 핵심 권리다. 파업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도 그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권리는 힘의 관계로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파업권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핵심 권리다. 제헌국회에서 노동자 권리 보장 관련 헌법 논의는 이익균점권, 경영참여권, 노동기본권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이는 남과 북이 나뉜 상황과 해방 이후 노동자들의 파업이 끊이지 않았던 점, 그 요구가 노동자의 경영참여로 집중되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주: 경영참여권은 사유재산권 침해, 자본가들의 의욕 저하 등을 이유로 상공회의소와 대다수 의원의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이익균점권만 통과되었지만 이마저도 유명무실한 상태로 있다가 박정희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를 보장한 제18조의 중요 관심사는 단체행동의 자유, 즉 파업권 보장문제였다. 제헌의회는 단체행동의 자유는 파업권을 당연 포함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기록을 남겼다.(주: 제헌헌법 제18조 1항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1962년 헌법 제29조 1항에서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으로 개정되었다. ‘자유’가 삭제되고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문구가 추가 규정됨으로써 범위 제한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의장은 파업권 보장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이 견해가 이후 한국사회를 지속적으로 지배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지금 영국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동맹파업할 권리를 금지하는 법을 국회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 노동자의 동맹파업할 권리라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이용해가지고서 공산당의 주의세력을 위해서 근로가자 이가 있든 해가 있든 막론하고서 동맹파업을 해서 전국의 경제력을 비끄러매고 이렇게 하니까 미국에는 큰 폐단이 생겨서 민생의 생활문제가 파탄이 되는 까닭으로 해서 지금은 미국정부에서 국회에서도 동맹파업이라는 것을 어떤 범위 안에서는 못한다는 법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해서 자본가들이 돈을 내놓지 않은 경우에 먼저 고생하는 사람은 노동자가 먼저 고생하는 것입니다.” (헌법제정회의록, 507-508면 _ 이흥재(2010), [노동법 제정과 전진한의 역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71쪽 재인용) 헌법에 따라 노동조합법, 이익균점법, 노동조정법, 근로기준법 초안이 만들어져 입법화를 앞두고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늦춰졌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어졌다. 1951년 9월 인천 부두노동자들의 투쟁, 1952년 초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1952년 2월 영월 도계 장성 은성 화순 등 광산노동자들의 투쟁, 7월 말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8월부터 10월에 걸친 경전노조 투쟁, 1953년 3월 조선전업노조 파업 등이 이어졌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방직 노동자 투쟁이었다.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 광경
국내 최초 최대 규모였던 조선방직은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노동자 투쟁이 빈번했다. 조선방직은 1951년 6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으로 커졌고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한 자금줄로, 조직 근거지로 탐을 내 자신의 심복 강일매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강일매가 노조간부 2명을 해고하자 노동자들은 강일매 파면, 인사문제 원상복고 등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여성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가 행진을 하면서, 본사 앞에서 농성하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이 투쟁은 사회적 지지를 받았고 여론을 들썩이게 했다. 그러나 경찰병력 투입과 대한노총 위원장의 투항으로 파업은 종결되었다. 투쟁은 이렇게 끝났지만 전진한 의원의 발언대로 “노동자들의 생활이 차차 도탄에 빠져”가고 있음이 널리 알려졌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빈번한 쟁의를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자본의 요구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노동조합법 제정안을 둘러싼 논의는 “노동운동의 법적 근거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견과 “대내적으로는 노동보호와 전력증강, 대외적으로는 자유우방의 협조와 지지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노동자가 얼마만한 자유와 또 그네들이 얼마만한 권리를 가졌느냐 하는 이것이 그 문명국가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외국에 갔을 때도 한국 노동자의 노동법 안을 내라고 할 때에 못 냈습니다. 대단히 부끄러웠어요. 부두에서 쟁의가 났을 때에 동경의 크라-크 사령부에서 온 앤튼이란 분을 만났을 때에도 노동법을 내놓아라. 그래야만 우리가 부두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해주지 너의 자신이 법안이 없는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이럴 때 저는 등 디에서 땀이 났습니다. 이것은 노동자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법적으로 보호받을 근거가 없기 때문에 지금 그네들은 어떻게 할지 모르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관계법 안이 하루바삐 통과될 것을 아주 일각이 여삼추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전진한 의원) “일선에 있는 군인에 협조할 수 있는 후방의 6,7명의 노동자의 움직임을 전력증강에 돕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동시에 또한 금번 전쟁을 승리에 이끄는 데 이 법이 조그만치라도 도움이 될 것을 희망한다.” (사회보건위원장 대리 김용우 의원) “우리 근로대중에게 최저생활을 확보하고 노동조건 향상으로서 전력증강과 생산의욕을 고취하는 동시에 노자협조정신을 앙양” “전쟁을 수행하는 우리나라로서 국회와 정부가 일치단결해가지고 민권을 옹호하는 정신, 민주주의 정신을 실천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을 애쓴다고 하는 것이 표시될 때” (사회부차관 김용택) 한편, 단체행동을 노동조합의 근본 목적임과 동시에 중요한 기능으로 보아 노동조합법 4장으로 구성해 완전한 법체계를 갖추자는 수정안이 제출되었으나 이는 좌절되었다. 대다수 의원들은 “우리가 노동조합을 조직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그 동맹파업이나 태업이나를 목적으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그 노동자의 움직임이 국가의 이득을 가져오도록 하는 조금 더 크게 목적을 두기 위해서 이 노동조합법에 이런 조항을 넣지 않”아야 한다며 신설 반대 의견이었다. (국회속기록 제15회 제12호) 대신 노동쟁의법에서 보장한자고 하였지만 노동쟁의법은 쟁의‘조정’법으로 입법화되었다. 우리 노동관계법은 “노동권과 인권옹호와 생활권 보호를 위해 노조 자율보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를 대변하는 안과 “공익과 노동보호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 정부 안이 제출되었지만 한국전쟁, 발췌개헌이라는 테러 분위기 속에서 상공회의소 의견이 반영된 안이 통과된 결과물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노동자의 권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국회가 아닌 비정상적 ‘위원회’에서 법이 개정됨으로써 권리는 더욱 제한되었다. 노동관계법 제정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노동관계법 제정의 실질적 기초는 노동자의 꾸준한 투쟁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법은 현실을 규범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리하여 법을 바꾸기 위해 1987 노동자대투쟁 이후 96-97 노동법개정투쟁까지 노동자들의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온전한 파업권 쟁취를 위한 투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 및 인용자료 : 임송자(2007),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 선인; 이흥재(2010), [노동법 제정과 전진한의 역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