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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경 스님 입적하다_김미화
첨부파일 -- 작성일 2021-12-17 조회 335
 

박헌영과 그의 아들 원경 스님

원경스님 입적하다

 

김미화 (노동자역사한내 회원)

 

19399월 마흔 살의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만기출옥하여 12월 당시 경성꼼그룹을 이끌고 있던 이관술을 만나 경성꼼그룹 책임비서가 된다. 서울과 인천지역에서 운동을 지도하던 박헌영은 청주로 내려와 비밀 아지트에서 40여 일 정도 지내기도 했다. 그때 그를 도와주라며 정태식이 오촌 조카 정순년을 충북 영동군에서 데려왔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도피하거나 비밀활동을 할 때 여자와 부부처럼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태식은 충북 진천 사람으로 당시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로 있으면서 경성꼼그룹 활동을 이어갔다.

정순년은 생전에 박헌영의 첫 인상이 머리가 밤송이처럼 새카맣고 키는 나보다 크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모두 이정 선생님이라 부르더라라고 증언했다. 박헌영은 이 시기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고 19402월경 다시 서울로 올라가 지하운동에 전념할 때 함께 상경했다. 1년 가까이 서울서 지내던 정순년은 임신 막달이 다가오자 청주로 내려왔고 박헌영의 모친이 직접 청주로 와 산후조리를 해주었다. 194135(음력 28) 사내아이가 태어나 박병삼으로 이름 지었으며 해방과 분단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0년 후반부터 경성꼼그룹 대량검거가 시작되자 박헌영은 서울에서 버티기가 점점 힘들어져 대구로 피신했고 1945년 광주 벽돌공장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지하에서 활동했다.

해방되자 조선공산당 총비서로 공개적인 활동을 벌인 박헌영은 19469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다. 박병삼은 생전 부친이 월북하기 전 여섯 차례 만났다고 한다. 홀로 남은 어린 박병삼을 보살핀 사람은 주로 박헌영 측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한산스님, 이순금,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등 당시 사회주의 활동과 빨치산 투쟁 중인 사람들이었다. 박병삼은 1950327일 당시 남로당 총책임자였던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될 때 그 현장을 지켜봤다고 했다.

박헌영의 아들로 태어나 호적조차 없던 그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에 분노하기도 힘들어하기도 했다. 박병삼은 한산스님의 영향으로 불가에 귀의하며 법명은 원경이다.

어느 날 한산스님이 박헌영 선생은 너의 아버지일 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평가도 네 스스로 하지 마라고 말했다. 원경스님은 평가는 훗날 역사가가 할 것이고 역사가의 평가를 위한 자료를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으며 2004년 전 9권에 달하는 <박헌영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등 10여 명의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해 10여 년간 증언과 저작물, 사진 자료와 연보 등 박헌영 관련 기록을 총망라한 전집이다. 현대사 연구자들은 원경스님의 노력과 후원으로 박헌영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평택 만기사 주지 원경스님은 매년 719일 박헌영 추모제를 지내왔다. 박헌영이 김일성 세력에 총살당했다는 북의 고위관료 증언으로 719일을 기일로 정했다. 만기사 뜰에는 박헌영 해원탑도 세워져 있다. 한국 근현대 시기를 온몸으로 겪은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이 2021126일 입적했다. 삼가 스님의 명복을 빈다.

 

 


액자 속의 박헌영과 원경스님, 2020719일 박헌영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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