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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전교조와의 첫 기억
첨부파일 -- 작성일 2009-12-04 조회 822
 

내가 살아온 길

전교조와의 첫 기억

김진명(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7년차 교사 김진명, ‘내년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철원에 온 지 2년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철원지회장에 출마를 결심하고 혼자 공보물을 열심히 만들었다. 모두가 하기 싫어하면 나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언제부터인가? 흔히 남들이 하는 말로 나대는 게 좋아졌다. 진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전교조 내에서 아니면 학교에서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누군가는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아닌 것도 있지만, 하여튼 선택하였다.
 

<작년 체육대회 때 축구 우승하고 우리 반 선수들과 찍은 사진입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전교조! 나에게 전교조는 무엇인가? 지금 현재 정신적 버팀목이다. 내가 현실에 순응하려고 할 때마다 나를 잡아 주는 힘이다. 처음 전교조를 가입할 때가 생각난다.

자칭, 얼굴은 동안에, 키는 권상우만큼 크고, 뽀얀 피부, 어디를 봐도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선생님들의 선망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우쭐했었다. 아이들도 젊은 총각 선생님이 왔는 줄 알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나의 현실은 그런 상황을 느끼게 놔두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의 첫 질문 ‘결혼 했어요?’ ‘네’ ‘애가 둘이예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또한, 수업준비, 고사업무 등 일주일 동안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발령 받기 전 전교조에 꼭 가입해야지 했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다. 혹시나 어렵게 잡은 직장을 찍혀서 잘리는 것은 아닌지? 지금 생각하며 참 순진한 생각이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한밤 중 인터넷 강릉지회 홈피에 가입신청서를 냈다. 두려움에 떨면서. 전교조 가입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 두려움을 이기려는 발버둥이었다.

전교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한밤 중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이상하게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잘 보지도 않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이었다. 토론 주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토론에서 다루어졌던 내용이 ‘참교육’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다음날 서울에서 첫 발령을 받아 오신 예쁜(?) 여선생님께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참교육이 뭐예요!’

운명의 장난이었는가? 그때 그 선생님에게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생각에 질문을 한 것인데 그 선생님이 관심을 보여 주셨다. 이게 웬 횡재인가?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또, 더 알고 싶으면 주말에 댁으로 놀러 오라 하셨다. 나는 너무 좋았고 그 선생님을 좋아하던 친구와 함께 갔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전두환이 대통령을 그만 두면 누가 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라를 걱정했었다. 그런 내가 변했다. 간선제 학생회를 직선제 학생회로 만들었고 야간 자율학습인지, 보충수업인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점을 알리기 위해 대자보를 붙였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 꼭 학생운동을 하고 싶었다. 대학 들어갈 때만 해도 한총련 의장이 나의 꿈이었다. 그러나 대학의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학과의 선배들은 강압적이었고 학생회는 백색들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학생회는 백색과의 민주화 투쟁이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내가 언제 교사가 되고 싶었는가? 복학 이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였다. 3년 동안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는 졸업반이었고 나는 3학년 복학생이었다. 말이 3학년이지 1, 2학년 동안 학점이 엉망이어서 2학년 과목부터 재수강하고 있었다. 갈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무엇이든 빨리 취업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아무 시험이나 봤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공부는 되지 않고 시험에 부담은 많고 여자 친구와 서로가 힘들었다. 그래서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휴학계를 냈다.

무작정 서울 현장으로 갔다. 신설동에 아파트 건설현장 주변에 방을 잡아 놓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6개월이 지났을까? 너무 힘들었다. 사람들이 그리웠다. 다시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복학하였다. 그때부터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 최후의 보루였다. 이때부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 걱정 밖에 없었다. 뭐든지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전교조 교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내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부분들은 줄고 있다. 또한 현실에 순응해 가는 교사가 되어가고 있다.

교사 집단이 변하기란 너무 힘들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 아닌가? 전교조도 마찬가지이다. 진보라고 얘기하지만 조직 내 권위적인 모습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교회와 노동조합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맹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 그러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교회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노동조합은 줄고 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교회가 사람들을 전도하는 방법을 우리가 벤치마킹하면 어떨까하는 농담도 했었는데 지금 전교조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에 대한 상상’이 아닐까 고민해 본다.

내가 변질되지 않기 위해 다시 노동조합을 선택했고 철원지회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또한, 조합원들에게 작은 실천을 제안했다. 지금도 나는 노동조합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러 조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지회장 공보물 중 조합원들에게 제안한 작은 실천 두 가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이런 현실을 이기고 싶어 여기에 나왔습니다.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작은 실천으로 분회와 지회에 소모임을 만들어 활동해 보고 싶습니다. 모여서 얘기를 해보는 거죠! 결론을 얻기 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작은 실천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 옛날에 어떤 광고 중에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하는 사람, 모두가 ‘아니오’ 할 때 ‘예’ 하는 사람 그런 광고가 있었는데 무슨 광고인지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그러면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이제 곧 학교별 다면평가가 실시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 혼자 무슨 힘이 있어’ ‘학교의 분위기가 그런데 어떻게 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교사의 양심으로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교직원 회의에서 ‘저는 다면평가를 거부합니다.’ 학교에서 거부는 혼자이지만 지회에서 거부는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지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학교에서의 거부가 큰 울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사람의 거부는 큰 울림입니다. 그런 사람이 더욱 늘어난다면 이것은 더 큰 울림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철원지회가 작지만 큰 울림을 만들어가는 지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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