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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출범(2000년 1월)
2000년 1월 30일 올림픽 역도경기장에서 민주노동당 창당대회가 개최됐다. 노동자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로 진보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주노총은 준비위원회 시절부터 지자체특위를 구성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다. 창립 직후인 1996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장기적으로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면서 4월 총선에 민주노총의 독자 후보를 출마시키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민주노총은 1996~19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으로도 노동법의 올바른 개정에 실패하자 노동자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과제가 더욱 절실함을 느끼고 집중하게 된다.
1997년 3월 27일 민주노총은 5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의 국민적 입지 강화와 정치세력화를 위해 대선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포괄적인 정치 방침을 결정했다. 이어 가맹·산하조직별로 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시민단체와 의견을 활발히 교환하며 공동 활동을 모색했다. 그 결과 7월 27일 6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추구하기 위해서 1998년 지자체 선거 대거 진출 → 1998~1999년 정당 건설 → 2000년 국회 원내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화 사업을 전개해 나갈 것”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관한 민주노총의 방침’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9월 5일 7차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 국민후보로 승인함으로써 후보전술을 포함한 정치 방침을 최종 확정했다.
이후 민주노총을 필두로 전국연합과 진보정치연합이 결합하고, 진보지식인들과 노동자 정치조직들 중심으로 결성한 ‘정치연대’도 합류해 ‘국민승리21’을 출범시켰다. 정치적 목적 아래 민주진보진영이 단결해서 1997년 대선을 치르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정치실천단을 중심으로 국민승리21 지역조직 활동, 백만인 서명운동, 교육선전, 유세활동, 투개표 참관인 조직 등 선거투쟁을 전개했다. 정치기금으로는 약 8억4,700만 원을 모아냈다.
그러나 1997년 12월 18일 대선 결과는 30만 6,026표(득표율 1.2%)를 얻는 데 그쳤다. 이는 내부 목표였던 100만 표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였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핵심 구호로 ‘일어나라 코리아’를 내세운 사건으로 정치연대 소속 단체 대다수가 국민승리21의 몰계급성을 비판하며 이탈하기도 했다. 전국연합 상당수가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돌아선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과거에 명멸했던 진보정당과 달리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 대중조직을 토대로 삼았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후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가교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민주노총은 득표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국민승리21의 성과로 ①민주진보진영이 최초의 단일한 전술 구사를 통해 정치적 단결을 이룸으로써, 향후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진전된 성과 축적 ②민주진보진영의 현실정치 경험과 이를 통한 전국 약 70여 개의 지부, 220개 선거연락사무소, 700여 명의 상근자와 1,500여 명의 자원봉사단, 약 4만 명의 회원·후원자 조직 등의 성과를 남김으로써 정치세력화 기반 조성 ③민주노총 최초의 본격적인 정치활동 전개와 이를 통한 정치토론, 조합원 교육, 정치위원회 활성화, 25,000여 명의 정치실천단 구성, 현장 및 지역에서의 정치활동 전개’ 등을 꼽았다.(민주노총, 1997년 정치사업보고)
민주노총은 1998년 5월 20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1998년 정치방침’을 채택했다. 그 핵심은 “민주노총은 국민승리21을 확대 재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 연대한다”였다. 6월에 열린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총·국민승리21의 노동자후보를 내세우고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적극적·체계적으로 전개키로 결정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노총·국민승리21은 49명의 공동후보단을 출마시켜 23명(기초의원 18명, 광역의원 2명, 기초단체장 3명)이 당선, 44.9%의 당선율을 기록했다. 대선의 패배를 딛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99년 들어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작업은 더욱 본격화됐다. 1999년 1월과 3월에 1~2차 원탁회의를 통해 진보정당창당추진기구를 구성키로 결정했다. 민주노총도 1999년 3월 9~10일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은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에 동의하는 모든 변혁적 진보적 정치세력과 함께 진보정당 창당을 추진한다”는 정치방침을 결정하고 원탁회의에 적극 참여했다. 6월 1일 진보정당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됐고, 민주노총은 7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진보정당 창당발기인대회까지 발기인을 최대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고 소속 모든 노조와 간담회를 실시하여 진보정당 창당과 조합원 참여에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했다.
1999년 8월 29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진보정당 창당발기인대회가 개최됐다. 총 6천여 명이 발기인으로 합류했고, 대회장에 1,600여 명이 참가했다. 장장 9시간에 걸쳐 진행된 발기인대회에서 상임대표 서리로 권영길을 선출했고, 치열한 토론과 극적인 투표과정 끝에 새로운 진보정당의 이름을 ‘민주노동당’으로 결정했다.
2000년 1월 29일 창당대의원대회에서는 창당 선언문, 강령, 당헌, 당규, 총선방침을 결정했고, 1월 30일 창당대회를 열었다. 초대 당 대표로 선출된 권영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은 시대적 요청”이라며 “민주노동당은 2000년을 부패와 지역주의로 얼룩진 후진적 정치 청산의 원년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권영길 대표와 함께 노회찬 전 진보정치연합 대표(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박순보 전 전교조 부산시지부장, 양경규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부대표로, 천영세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은 지부가 전국 40여 곳, 당원이 1만 3천여 명이었으며, 당원의 60%는 노동자였다.
민주노동당은 창당과 함께 △노동자·민중 주체의 민주정치 실현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민주적 경제체제 수립 △평화적이고 민족화합적인 통일의 추구 등을 뼈대로 하는 강령과 △여성 30% 할당제 △모든 공직 후보자 상향식 공천 등의 내용이 담긴 당헌을 채택했다.
2000년 4월 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 227개 선거구 중 21개 선거구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21명의 후보 중 10명이 민주노총 출신이었다.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은 의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출마지역에서 평균 13.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울산, 창원 등 노동자가 밀집해 있고 노동운동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4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2004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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