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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한내] 2008년 11월호(제3호)
이달의 노동열사
우리는 당신들을 생각하며 해방의 길을 찾아 가겠습니다!
글과 사진 : 이용덕 (세원테크지회 해고자, 이현중이해남열사회 사무국장)
2001년 12월 12일 05:30
금속노조 충남지부, 지부 총파업을 선언! 지역 노동자 총동원령!

이해남은 놀랐다. 설마했던 일이 현실로 닥친 셈이었다. 이틀 동안 용역깡패들과 전쟁을 치른 금속노조 간부들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터라 조합원들을 동원해서라도 깡패를 몰아내야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더라도 총파업을 선뜻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자신들의 일로 여기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총파업은커녕 노동운동의 역사가 짧은 충남이 아니던가. 전의를 불태우는 동료들을 보면서 이해남은 의구심을 거두어 들였다.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급작스레 닥친 총파업이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간부회의 내내 마음을 졸였던 터였다.
을씨년스럽던 경비실이 갑자기 전화 거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지회장들은 다투어 조합원들에게 부리나케 전화했다.
"오늘은 회사 말고 세원테크로 출근합니다!"
대공장 지회장은 대의원들에게 투쟁방침을 전했다.
"출근버스 세원테크로 돌려!"
11월 5일 출간될 이현중 이해남 열사 평전 <당신은 나의 영혼 (윤동수, 삶이 보이는 창)>에 나온 2001년 12. 12 충남지부 연대총파업에 나온 장면이다. 이해남 열사는 2001년 10월 지회를 만들었고 이현중 열사는 조합원으로서 지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이후로 벌써 7년, 열사들이 돌아가신 2003년을 기준으로 5년이 지났다.
세원테크는 충남 아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로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 차체부품을 납품한다. 회사는 연간 순이익이 몇 백억이 되고, 나중에는 세원자동차를 만드느니 어쩌니 날마다 떠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40도 가까이 오르는 현장에서 점심시간 30분 강제연장, 의무적인 잔업특근은 말할 것도 없고 끊임없는 산재에 시달려야 했으며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웠다. 세원테크에서 3개월 버티면 ‘인간승리’라는 말이 떠 돌 정도였다.

세원테크 자본은 노조 결성 초기부터 노조를 깨기 위해 수많은 돈을 쳐 바르며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2001년 12월 12일에는 용역깡패 150여명을 투입해 현장에서 일하던 현중이를 비롯해 조합원들을 공장 밖 논으로 끌어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2000여명의 조합원들이 연대파업을 했고 용역깡패를 물리쳤으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다. 하지만 2002년에는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노조파괴 전문가를 고용했고 손배 가압류 19억 8천만원, 간부 징계, 구사대를 통한 탄압, 노조 파괴 시나리오를 통한 어용세력 육성, 물량 이원화를 통한 파업 무력화 등 백화점식 탄압으로 우리 조합원들은 수세에 몰렸다. 우린 노동자의 자존심으로 맞섰다. 공장점거 투쟁을 전개했고 공권력에 밀려 퇴각했지만 공장진입 투쟁을 전개하며 154일 동안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고 나중에는 지도부 4명이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지역 연대와 원청(현대, 기아)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키고 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현중 열사는 2002년 8월 17일 공장진입투쟁 과정에서 두괴골이 함몰되고 안면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두꺼운 쇠로 만든 철문을 갈고리로 걸어서 당겨내던 중 구사대들이 갈고리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 후 두차례 수술을 했지만 차도가 없었고 2003년에는 수술한 안면 부위에 상악동암이 발생하여(원인은 정확히 진단이 안 나옴) 결국 투병하다가 2003년 8월 26일 30살의 짧은 나이로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현중 열사는 순박한 노동자였다. 고등학교 실습생 시절부터 10여년을 세원그룹(세원정공, 세원물산, 세원테크)에서 잔뼈가 굵은 성실한 노동자였다. 마음씨가 너무 고와서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했다. 세원테크에 입사해서 현중이한테 일을 배웠는데 철판을 잘 잡지 못하는 나의 손을 붙잡아주며 하나하나 자세를 바로잡아주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착했지만 자본과의 싸움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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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동지들께
대구 경대병원에 온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네. 동지들 걱정에 난 힘이 나고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오직 내 몸부터 다스리고 있다네. 군입대 하는 동지들을 한번 보지 못하고 보내기만 했네요. 동지들 저 때문에 모금하고 집회 하느라 고생이 많지요. 지회 일이 풀리지 않는데도 저를 위해서 고생하는군요. 지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미안할 따름이네요. 그래서 편지 쓰는 게 쉽지가 않네요. 이번에도 저 혼자 빠져나와 미안합니다. 조합원들이 29명뿐이어서 지회장님이 힘이 빠지는 건 아니겠지요. 사람이 없을수록 더욱 힘을 모아야지요. 저 또한 잘 먹고 힘내고 있습니다. 지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일은 신경 안 쓰고 있습니다. (이현중 ‘투병일기’ 중에서)
이해남 열사는 지회장으로서 노조 활동기간 두 번 구속, 세 번의 수배, 해고 등의 모진 탄압을 겪었지만 탄압을 받을 때마다 오히려 더 굳센 의지로 일어나려했다. 힘들게 싸우고 있는 사업장이 있으면 같은 지역이 아니더라도 곧바로 달려가려고 노력했다. 이현중 열사가 돌아가시고 장례투쟁을 벌이던 중, 세원자본이 이현중 열사의 죽음을 외면하고 노조탄압을 멈추지 않자 이해남 열사는 2003년 10월 23일 본사인 대구 세원정공에서 노조탄압 중단,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며 분신, 2003년 11월 17일 운명하셨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의 뒤를 이어 분신하셨고 이해남 열사의 분신 이후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의 분신이 있었고 2003년 가을은 노무현정권과 자본에 맞선 전국적인 열사투쟁이 벌어졌다. 평소에 이해남 열사는 자본의 억압에 맞서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노동자 투쟁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주중에는 매일같이 조합원들이 면회를 오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이면 제 아내와 두 아들이 면회를 옵니다. 큰 아이가 6학년, 작은 아이가 2학년이랍니다. 막내 녀석이 면회를 올 때마다 장난치고 농담하면서 구김살 없는 모습으로 저를 즐겁게 해 주지요. 하루는 옆에 있던 교도관이 “꼬마야! 아빠가 감옥에 있는데 슬프지 않아?”하고 묻자, 막내 녀석 하는 말이 자랑스럽게도 “우리 아빠는요, 도둑질 강도짓한 게 아니구요. 투쟁하다 들어갔어요. 근데 뭐가 슬퍼요?”라고 이야기 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해남, 2002년 1월 천안구치소에서 월간 `아름다운 청년'에 보낸 편지)
벌써 5년이 흘렀다. 세원테크 투쟁은 금속노조 초창기 금속노조의 단결과 투쟁의 기풍을 확립하는데 수많은 공헌을 하였고 충남지역 노동운동의 밑거름이 된 투쟁이었다. 하지만 투쟁은 패배하였다. 열사들의 정신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너무나 많이 부족하여 열사들앞에 고개를 들수가 없다. 기륭전자, 강남성모병원, 콜텍 하이텍 등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나는 지나간 우리의 투쟁을 떠올린다. 더 많은 연대와 더 많은 헌신만이 정말 필요한 시기. 사심없이 싸워야 한다고 또 한 번 다짐을 해 본다.
끝으로 금속노조와 이현중?이해남 열사회, 민주노총 충남본부는 오는 11월 5일 이현중?이해남 열사 평전 <당신은 나의 영혼>(윤동수, 삶이보이는 창>을 출간한다. 11월 7일 아산 호성웨딩홀에서는 출판기념회를 연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 책을 사서 읽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