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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⑱ 전노협 첫 경선, 조직발전전망 확인
첨부파일 -- 작성일 2022-04-18 조회 277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전노협 첫 경선, 조직발전전망 확인

 

단병호위원장의 신상발언

19936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출범했다. 출범식 직후 노협 단병호 위원장이 차 한잔하자고 한다. , 문성현과 찻집에서 전노협과 전노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단위원장이 신상 발언을 했다. 단위원장이 더는 전노협 위원장을 할 수가 없으니 차기 집행부를 책임질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노협 선거를 고작 6개월을 남겨둔 상황에서 상상도 못 한 폭탄 발언이었다.

주관적 판단이었지만, 폭탄 발언의 배경에는 전노대 출범도 영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전노협 중심론이 와해된 결정적 출발지점이 바로 전노대 출범이었기 때문이다. 단위원장의 폭탄발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사전에 몰랐던 다른 동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단위원장은 전노협의 상징인 동시에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신상발언 후 단위원장은 차기 집행부를 누가 맡았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당황스러울 뿐이어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대화는 전노협 조발전망 얘기로 넓혀졌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 문성현이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제가 전노협 위원장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단위원장은 (출신학교 등의 이유로) “문동지는 안 된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 말에 문성현이 제가 안 되면 누구 생각해 둔 사람이 있냐고 반문하자, 단위원장이 양위원장이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전에 단 한 번의 귀띔도 없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당사자가 앉은 자리에서 적임자 운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문성현이 본인이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나를 지목해버리니 난감했다. 나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완강하게 거부한 이유는 체면치레도 아니고 난감해서만도 아니고 솔직한 마음이었다. 전노협 수석부위원장은 했었지만, 위원장을 하겠다는 생각은 물론 그런 꿈조차 꾼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여의도 만남 이후 전노협 조직국, 쟁의국, 정책실 동지들이 경기노련으로 찾아오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전노협에서 온 동지들은 하나같이 차기 집행부 구성이라는 주제로 찾아왔고 아마 단위원장이 보낸 동지들인 것 같았다. 단병호 위원장과 문성현을 몇 차례 더 만나 토론을 진행했다. 논의가 조금씩 진척됐는데, 차기 전노협 위원장의 임무는 전노협 노선(전노협 중심론)을 대중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흥석 출마로 예상치 못한 3파전

전노협 위원장에 출마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소문은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만나는 동지마다 전노협 위원장 출마하기로 했나?”고 묻기도 하고 고생길이 열렸다는 이야기도 했다. 당사자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단위사업장과 경기노련에서도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노협 단위원장의 거취를 전하고 차기 전노협 위원장 선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토론들이 도처에서 진행됐다.

여의도 모임 직후에는 전노협 위원장 선거가 2자 구도로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에서 전노협 중심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다른 안을 제시한 김영대가 있었기 때문에 2자 구도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9월쯤 전노협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선거대책본부 사무실을 서울 서부역 앞에 마련하고 지역별로 선대본 구성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전노협 노선을 비타협적 투쟁노선으로 확정하고 그 노선에 입각한 정책자료집, 홍보물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위원장 후보는 대체로 김영대, 양규헌 두 사람이 출마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런데 막바지에 갑자기 이흥석 동지가 후보등록을 하면서 마창지역이 발칵 뒤집혔다. 이흥석 동지가 속해있는 마창노련에서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후보등록을 했다며 지역에서는 무효운동 움직임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절차도 문제지만 보다 중요한 부분은 문성현과 이흥석 동지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남지역노동조합협의회라는 단체에서 함께 활동해온 문성현과 이흥석은 마창지역에서 서로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문성현이 양규헌과 함께 사무총장 후보로 나선 상황에서 이흥석 동지가 출마하니, 문성현을 비롯한 지역 동지들은 배신감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거가 치러진 1994년 1월 23일 전노협 대의원대회 

 

드러내는 노선·정책·공약 차이 불분명

기호 1번 김영대, 2번 이흥석, 3번 양규헌으로 전노협 최초의 경선이 시작됐다. 세간에서는 이 3파전을 좌--우 간의 선거투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하기에는 각 후보의 정책 차이가 모호했다. 정책의 중심에는 노선이 드러나야 하는데, 2번은 노선은커녕 정책조차 될 수 없는 통 큰 단결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표현했다. 1번과 3번의 조직발전전망과 관련한 정책 내용도 선거 초기에는 명확한 차이를 드러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불분명해졌다. 각 후보의 공약도 선거일에 임박할수록 차이가 좁혀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당시 선거에서 노선은 전노협의 성격을 둘러싼 대립이 핵심이었는데, ‘전노협 중심론을 비판한다는 것은 선거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모두 알고 있었다. 지역을 순회하는 선거운동은 후보 간 토론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전노협 중심론을 비판하며 조직발전전망 2안을 제출했던 김영대 후보도 전노협 강화를 이야기하며 민주노조진영을 확대하자는 식으로 쟁점을 피해갔다.

선대본은 총무팀, 조직팀, 정책팀, 대외팀, 수행팀 등으로 구성됐고 선대본 총괄은 사무총장 후보인 문성현이 맡았다. 역할분담에 따라 매일 점검 회의를 진행하는 구조였다. 사전에 지역의 상황과 분위기를 취합하고, 취합된 내용으로 토론한 뒤에 지역 동지들을 만나 지역순회 간담회, 토론 등을 진행했다. 후보 간 지역토론회를 진행해 본 결과 우리 선대본이 다른 선대본보다 철저하게 준비했음을 알 수 있었다.

2개월 정도 진행되는 선거운동에서 여유나 틈은 없었다. 지역에서 조직되는 간담회가 급작스럽게 잡히면 비행기를 타기도 했고, 차량을 이용해 하루에 몇 개 지역을 도는 때도 있었다. 전노협 수석부위원장으로 직무대행을 하고 있었지만, 지역의 구체적 상황이나 변동된 특이사항까지는 알기 어려웠으니 잠을 줄여야 했다.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노맹 재건위 쪽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등촌동 호텔로 갔더니 중앙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운동의 발전을 위해 고생하시는데, 우리가 십시일반 작은 성의를 모았으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봉투를 주며 이 돈의 출처는 밝히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선대본 사무실에 와서 봉투를 내밀었더니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는데 난감했다. “나쁜 돈은 아닌 거 같으니 그냥 썼으면 좋겠다고 건넬 수밖에 없었다.

 

당선됐지만 전노대둘러싼 동상이몽

3파전으로 진행되는 선거에서 양규헌 쪽이 우세하다는 분석이 있다 보니, 후보 간 토론에서 다른 두 후보가 양규헌 쪽을 공격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전노협 선거에서 전노협 중심론이 불리할 이유가 없었고, 산별과 관련된 쟁점에서도 전노협의 분위기는 대산별이 대세였기 때문에 다른 후보들보다 유리한 상황이었다.

선거일(대의원대회)이 다가왔다. 전노협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경선, 그것도 2명의 후보가 아닌 3파전 선거가 치러졌고 예상대로 2차 투표에서 내가 당선됐다. 예상과 달리 이흥석이 김영대를 누르고 2위를 하고, 결선에서 김영대 후보 지지표를 80% 정도 가져갔다. 결과적으로 김영대-이흥석 후보는 연합적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집행부가 출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조직발전전망에 대한 구도가 확인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순진한 판단이었다. 전노대가 출범한 것은 민주노총으로 향하는 행보로서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전노협은 조직화를 형식적으로 규모만 확대하는 운동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또 그렇게 활동해오지도 않았었다. 전노협의 전노대에 대한 입장은 업종과 대공장이 연대투쟁을 통해 각 사업장의 조직력을 키워내고 역량을 확보하는 것, 즉 연대투쟁의 경험으로 동질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하지만 실제 흐름은 그렇지 않았다. 전노대 대표자회의에서 발생하는 이견과 논쟁보다 전노협 내부의 논쟁이 훨씬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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