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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정치선언,96~97년 노동법개악저지총파업투쟁
첨부파일 -- 작성일 2010-01-05 조회 2365
 

노동자의 정치선언
1996~97년 노동법개악저지총파업투쟁

유경순(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1953년 노동법이 처음 제정된 이후 정권들은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으로 노동관계법을 수차례 개악하여 노동운동을 억압해 왔다. 이에 맞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지역과 전국으로 단결의 폭을 넓혀 노동법개정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1996?97년 노동법개악저지총파업투쟁은 한국전쟁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가 참여한 투쟁으로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투쟁이었다. 곧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노동자의‘인간선언’으로 노동자역사를 변화시켰다면, 1996?97년 총파업투쟁은 노동자의‘정치선언’으로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을 예고한 것이었다.
 


<1996-97 총파업 당시 태화강 둔치에 집결한 울산의 노동자들>

이 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구상을 법제화시키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내건 신경제와 신노동정책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국가의 수준에서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기조를 바탕으로 추진된‘신노사관계구상’역시 노동자에 대한 대량 인원감축, 공장폐쇄, 고용불안, 임금동결·삭감, 사회보장제도 축소로 드러나듯‘노동자 죽이기 구상’이었다. 정권은 이 구상을 담은 노동법 개악안을 12월 3일 내놓으면서 법제화를 시도하였다.

민주노총은 초기에‘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 참여냐 불참이냐를 둘러싸서 혼란과 동요에 휩싸였다. 노동법 개악 의도가 분명해진 가운데 11월 들어서는 총파업 돌입 여부를 둘러  싸고 민주노총의 동요는 지속되었다. 그 결과 민주노총은 12월 13일 ‘4시간 경고파업’을 결정하였다가 다시 이를 유보하였는데, 그 이유는 주체적인 투쟁역량이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과 총자본의 의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는‘13일 파업 철회’결정이 보수정치권에 대한 낙관적 기대로 연내 개정이 불가능하다는 정세판단의 오류와 지역 투쟁본부의 의사를 수렴하지 않는 비민주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결국 12월 26일 6시, 6분 만에 노동악법,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은 복수노조 전면 유예와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등의 단결권이나 단체행동권을 심각히 제약하려는 것과 정리해고 도입, 변형근로제 도입 같은 노동유연화를 위한 독소조항으로 가득했다. 또 안기부법은 국가보안법상의 고무찬양 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부여하고 있는 반민주악법이었다.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운동 진영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민주노총은 12월 26일 노동법개악저지총파업투쟁을 선언하였다.

1단계 총파업투쟁은 자동차, 금속, 현총련, 전문노련 등에서 먼저 파업에 돌입하였다. 12월 26일 85개 노조 14만 2천여 명이 참가하였고, 28일에는 173개 노조 22만 1천여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였으며, 31일까지 연인원 100만 명이 참가하였다. 총파업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노동법 날치기통과 규탄과 총파업결의대회가 날마다 열었다.
 


<1996년 12월 30일, 서울 명동성당에 집결한 노동자들>

2단계 총파업투쟁은 1997년 초 휴일이 지난 후 시작되었다. 1월 3일 자동차, 금속 등 48개 노조 7만5,389명이 파업을 벌였다. 1월 6일에는 사무노련, 병원노련 전문노련, 화학노련, 현총련, 건설노련이 가세하였으며, 1월 7일에는 방송4사를 포함한 언론노련 병원노련 등 공공부문이 대거 참여하였다. 파업참가자 수는 1월 3일~1월 14일까지 매일 20만 명을 돌파하여 총 169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파업투쟁이 확대되어가자 김영삼 대통령은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동자파업을 비난하였고, 검찰과 경찰은 민주노총 파업지도부에 대한 소환장을 발부하고 강제구인을 시도하였다. 또 신한국당 대표는 한국노총을 방문하여 노동계에 대한 TV토론 제의, 여야 영수회담 검토, 노동법 재개정 가능성 등을 언급, 여론 무마와 시간 끌기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총파업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연대도 확대되었다. 천주교사제 862명은 1월 13일 87년 민중항쟁 이후 처음으로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기도회를 열었다. 날마다 대학교수들의 항의성명이 잇따랐다. 특히 보수적인 학자를 비롯한 24개 대학 30여명의 노동법 형법학 교수들은“이번 총파업은 헌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저항권 행사의 하나로써 합법이며 노동법 개정안 무효화와 파업지도부 구속방침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런데도 야당은 노동자투쟁에 대하 지지와 연대를 표시하지 않고 여야영수회담 개최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1997년 1월, 행진중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

3단계총파업투쟁은 ‘전국투쟁의 날’로 정해진 1월 15일에 시작되어 전국 13개 지역집회에 16만 명이 참여했으며, 388개 노조 35만856명이 파업을 벌여 12월 26일 총파업투쟁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 참여를 보였다. 또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동참하여 1월 18일까지 참가자 수는 90만 5천명을 넘어 총파업투쟁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거기에 교수, 변호사, 종교인 그리고 주부들까지 총파업을 지지하면서 투쟁에 나섰다. 상황은 정권과 자본이 수세적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투쟁동력을 둘러싼 전술논쟁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1월 17일“투쟁동력이 급격히 떨어짐으로써 전체 투쟁전선을 일사불란하게 유지하며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면서 수요파업으로 전술을 전환시켰다. 이를 비판하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었다.“투쟁동력은 여전히 상승세이며 이 시점에 투쟁 수위를 높이는 적극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투쟁수위 조절은 필요하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므로 계속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수요파업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 등이 여러 지역에서 제기되었다.

민주노총의 전술적 후퇴는 결국 투쟁동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자가 배제된 채 여야 간 정치적 협상국면으로 바뀌어 투쟁국면을 멈추게 했다. 김영삼은 1월 21일 여야 영수회담에서 ‘통과된 법률 재논의와 영장기각 집행유예’를 밝히면서 기만적인 재개정으로 나아갔다. 경찰과 검찰은 1월 14일부터 울산, 부천, 충청지역의 전투적인 현장의 노조간부들을 수배, 구속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개별사업장에 대해서도 고소고발, 손해배상청구, 해고, 징계위 회부, 폭행, 테러 같은 노골적인 탄압을 가했다.

4단계 총파업은 여야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인 2월 28일 민주노총 위원장의 지시로 시작됐다. 오후 1시부터 4시간 시한부 파업이었고 공공부문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1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파업 참가율이 떨어졌기 때문에 총파업의 위력은 거의 없었다.

결국 4단계 총파업투쟁은 국회에 압력을 넣는데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철회되고, 3월 8일 여야가 합의한 기만적인 노동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 내용은‘긴급한 경영상의 이유’라는 자의적인 잣대에 의해 자본가들은 정리해고를 마음대로 자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변형시간근로제로 인하여 심각한 임금손실을 입게 되었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무노동무임금 인정, 위원장의 직권조인 보장(교섭권과 체결권의 일원화), 해고자 조합원 자격 제한 등 노조활동과 파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1996년 12월 26일 국회에서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맞서 노동법개정을 위해 1996년 12월 26일에서부터 1997년 1월 말까지 누적규모 3,206개 노조, 연인원이 359만7천11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정치총파업이었다.

1996~97년 총파업은 한편으로는 정리해고제의 법적 제도화 자체가 전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7년 이후 지속된 투쟁 경험 그리고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총파업투쟁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12.13일 파업유보 결정, 1.9완급조절이라는 명분으로 부분파업으로 전환, 1.16일 지하철 등 공공부문의 국민여론을 위한 파업철회결정은 어렵게 총파업을 전개하고 있는 금속, 자동차연맹 등 투쟁하는 동지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노선은 강조되었지만 현장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관점을 널리 선전하는데 소홀한 것은 총파업이라는 정치적 각성과 선전의 계기를 적극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전해투 <성명서> )

민주노총 지도부는 투쟁동력을 강화하는 전술을 채택하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경제와 국민여론을 중시하는 관점에 선 전술적 오류로 투쟁의 수위를 낮추었다. 그 결과 노동법 개정논의의 주도권을 국회로 넘기고 야당에 대한 압력행사로 투쟁의 성격마저 변질시켰다. 또한‘국가경쟁력 강화론’,‘생산성향상론’에서 나아가 대정부투쟁과 대자본투쟁의 분리라는 이데올로기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어, 일부에서“우리는 정부와 싸우는 것이지 개별자본가와 싸우는 것은 아니다”며 생산에 착수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그럼에도 총파업투쟁은 민주노조운동에 중요한 의미와 가능성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전국 노동자들을 단일한 이해로 일치시켜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는데 성공했다. 투쟁의 형태에서도 조직적인 준비를 바탕으로 총파업투쟁이 중심이 되어 가두집회와 시위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정치총파업투쟁은 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노동자계급을 부상시켰으며, 신자유주의에 맞서 정치총파업을 전개하여 전 세계 노동자들을 고무시켰다.

요컨대 총파업투쟁은 노동법개악을 막지 못했지만 노동자들이 계급정치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을 대중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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