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노조 10년의 기억
박재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최근에 양학용, 김향미 님이 지은 967일간의 세계여행기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를 읽으며 잠시나마 행복했다. 작년 봄에 내 운동의 전부였던 공무원노조를 미련 없이 그만두고 망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도 충전하고 새로운 운동을 다잡아 보고자 재충전의 기회로 계획한 것이 아내와 함께 퇴직금을 털어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모처럼 내 자신에 대한 투자이기도 했으며, 어찌 보면 지난 10여 년 가까이 노동조합 안에서만 안주하던 내가 용기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해 여름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의 소중한 2세가 생기면서 모든 계획은 ‘즐거운 계획’으로만 그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결혼 10년 만에 처음 약속했던 “세계 여행”의 꿈을 이루고자 전세자금을 빼서 출발했다던 저자들의 그 용기와 무모함(?)이 참 부럽기도 하고 예전 지역에서 먼발치에서나마 함께 해왔던 동지라는 친밀감이 책을 읽는 동안에 어지러운 나의 심사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특히나 이 책의 내용 중 ‘사람이 사람을 아는 일 - 캐나다 밴쿠버의 버스 운전사’의 이야기편이 단순하고 평범한 내용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행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항상 마지막 버스를 타야했던 저자에게 낯선 타국의 버스운전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낯선 곳에서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소중한가를 깨닫게 해주었다는 내용의 글을 읽으며 문득 나에게 힘을 주고 나를 알아봐 주었던 소중한 얼굴들이 새삼 떠올랐다.
주로 지나온 길을 되짚어 떠오르는 얼굴들은 노동운동의 첫발을 내딛던 공무원노조 초창기 시기이다. 마치 오래된 옛날 흑백사진첩을 들여다보듯이 순간의 장면이 스쳐갈 때면 참 그립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다.
1999년 그해 봄, 나는 공무원노조준비모임(공노준)의 사무국장으로 처음으로 소속을 가지고 공공연맹 사무실 한켠에 대표님과 나란히 책상을 배치 받아 일을 시작했다. 비록 단촐하게 10여 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공노준은 엄연한 민주노총 공공연맹의 직속 가맹노조였으며 매월 현직 회원들이 비공개 회의와 분기별 공개/반공개 토론회를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 누군가는 이러한 공노준의 활동을 보면서 ‘한 10년은 걸릴 일’이라고 했다.
초창기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공무원도 노동자’라며, 민주노조 건설이 필요하다며, 나중에 공공부문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니 네가 해보라며 등 떠밀던 선배가 한때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함께했던 모든 이들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90만 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보장과 민주노조 건설을 목표로 활동한다는 자부심으로 모인 공노준의 10여 명의 회원들에게서 불안감이나 무모함은 보이지 않았다. 공노준 활동으로 징계 해임되신 대표님이 꿋꿋하게 연맹에서 상근활동하시면서 혼자 복직소송을 준비하시는 모습 속에서도 공무원노조 건설의 신념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2001년 전국공무원가족한마당 포스터
비록 작지만 커다란 운동의 꿈을 꾸고 실천했던 사람들, 그래서인지 참 따뜻하고 나를 알아주고 힘이 많이 되어 주었다. 공노준 회원들에 대한 몇 가지 추억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노준 대표님은 나에게 있어 ‘빨간 펜 선생님’이었다.
노조사업의 경험이 미천하던 나는 당시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대표님께 제출하였다. 그리고 내가 기획한 사업에 대한 고민과 조언을 듣고 싶었고 함께 진행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대표님은 문서를 보시더니 쓰윽 빨간 펜을 꺼내시고 ‘오타’, ‘띄어쓰기’, ‘줄 간격’, ‘글자크기’, ‘한글이름으로 바꾸기’ 등을 수정하시더니 다시 되돌려 주셨다. 야속했다. 마치 내가 제출한 계획서의 내용은 무시되고 빨간 펜으로 지워진 것 같아 처음엔 오해도 하고 화도 많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대표님과 함께 일하며 배운 것이 이후 공무원직장협의회, 공무원노조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힘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는 공노준 회원 한분이 자신이 근무하는 구청 근처로 불러내 맛있는 점심을 사주시더니 말미에 뇌물(?)받았다며 씨~익 웃으며 나에게 구두티켓 한 장을 건네었다. 그 구두티켓을 받아 쥐고 오던 날 찝찝하기 보다는 짠하기도 하고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회원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돌아가며 나에게 점심을 사주었다.
또 한명 잊을 수 없는 회원이 있다. 공노준 초창기부터 매달 10만 원씩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몇 년간 회비를 내던 회원. 지방에 있어 회의에 매번 참석 할 수 없는 관계로 사무국장으로 일한지 6개월여가 지나서야 토론회 장소에서 만나 너무나도 반갑게 나누던 그 회원은 이후 공무원노조 활동의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되어 주었다.

전공련 출범식
또 하나 나를 알아주고 힘을 주던 동지들은 예전의 공공연맹 동지들이다.
1998년 말 혜화동의 구 공공연맹 시절, 2000년 뚝섬의 통합연맹 시절에 함께한 경험은 이후 공무원노조 건설을 하는 과정에 운동의 지표이자 소중한 모델이 되었다. 또한 노동운동의 경험도 없고, 소위 정치적 연줄에 속해있지도 않은 나를 편견 없이 ‘동지’로 ‘후배’로 대해 주고, 공무원노조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힘든 시기 항상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던 동지들이 공공연맹의 동지들이다. 그래서 공무원노조 시절에 나는 공공연맹을 나의 ‘친정’이라고 불렀다.
1999년 구 공공연맹에서 처음으로 활동비 20만 원을 받던 날, 사회에 나와 처음 받아보는 돈이니 통장도 없어 그 돈을 쥐고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을 개설하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통합연맹 이후에도 공노준 활동이 중요하다며 연맹 상근자도 아닌 나에게 매월 50만 원씩의 활동비를 예산으로 책정해 지급해준 연맹 동지들의 따뜻한 마음이 14만의 공무원노조 조직을 경험하면서야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고 보면 운동의 첫 출발점에서 나에게 선배들은 운동경험의 차별도, 나이의 차별도, 소속에 대한 차별도, 사업에 대한 차별도 가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요즘 흔한 정치적 낙인찍기, 국민파니, 현장파니, 중앙파니 하는 정파적 시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후원하고 만들어 가는 운동이었으며, 서로에게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던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노준 동지들의 헌신성과 신념, 공공연맹 동지들의 연대와 따뜻한 후원의 힘이 일정하게 공무원노조 건설의 발판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출범 포스터
이러한 경험이 2000년 5월 공노준을 떠나, 공공연맹을 떠나 공무원직장협의회라는 공간으로 홀로 떨어져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전혀 운동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활동할 때 나를 다잡아 주었다.
그해 가을, 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가 만들어져 첫 이사회(중앙위원회 성격)를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개최하던 날, 회의준비를 마치고 시청 창틀 넘어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 피우는데 시청광장 쪽에서 민중가요가 들렸다.
그리운 노동자의 노래가, 아마도 지금쯤 수만의 동지들이 민주노조의 깃발을 선두로 모여들고 있겠지, 저곳에 나의 그리운 동지들이 있겠지.....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으며 나에게 다짐했었다.
‘몇 년 안에 시청광장에 공무원노조의 깃발을 들고 꼭 함께하리라. 그래서 그리운 동지들에게 자랑스런 공무원노조의 깃발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던 그 가을날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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