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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대학살과 기념관_송시우 (51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3-03-11 조회 2348
 

남경대학살과 기념관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남경대학살을 흔히 중일전쟁(1937.7.7~1945.8.15) 도중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19371213일부터 1938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남경대도살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남경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아시안 홀로코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은 1차로 1985815, 2차로 남경대학살 60주년을 맞아 19971211일 개관하였다. 그리고 70주년을 기념하여 구관 터에 20071213일 확대 건설한 신 기념관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경대학살기념관 입구 청동 조각상 시민피난중 하나


한국의 여러 전시에 잘못 인용되는 사진으로 원래 남경대학살 때의 것이라고 한다.

 

 

1972925일 중국 주은래 총리는 중일 국교회복을 맞아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를 언급, 이는 중국의 기념관 마다 걸려있음. 중국 기념관의 공통 테마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82년에 일어난 일본의 교과서 문제를 계기로 중국 각지에서 항일전쟁 유적의 발굴과 보존, 그리고 기념관 건설이 이루어졌다
남경시 정부는 1983년부터 피로 얼룩진 역사를 영원히 남경의 대지에 새겨두자는 취지하에 기념관 건설을 시작하여, 항일전쟁 승리 40주년에 맞추어 개관하였고 남경시내에는 집단 학살 장소가 13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기념관이 건설된 강동문(江東門)은 그 중 하나이다.

강동문의 학살은 일본군이 남경 점령 직후 1216, 육군 감옥에 감금된 1만 명의 포로와 시민을 저녁 강동문에 끌려 나간 후, 민가에 불을 붙인 조명으로 기관총을 동원하여 대량 학살을 자행하였다. 기념관은 그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된 바로 그 곳에 세워졌다. 기념관에는 등소평이 쓴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글을 볼 수 있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 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또한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기관총으로 양자강에 쓸어 넣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193711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12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한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참고자료> 중국에서 만나는 동아시아 - 4회 동아시아사 교원 현장 연수 자료집(201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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