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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⑲ 막바지 전노협, 순탄치 않은 임기 시작
첨부파일 -- 작성일 2022-05-18 조회 309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막바지 전노협, 순탄치 않은 임기 시작

 

무리하게 밀어붙인 사무총국 신규채용

전노협 선거운동에서 제출되었던 공약과 사업은 전노협 강화론에 무게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역량을 충원해야 했다. 전노협 상근자 지원 원서를 받았는데 10여 명이 원서를 접수했다. 전노협 사무총국 성원 채용은 민감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전노협 사무총국과 임원진 내부에서 문제 제기의 성격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원자 심사에서 어떤 사람은 사노맹 출신이어서 안 되고, 어떤 사람은 노동조합 경험이 취약해서 안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이가 어려서 안 된다는 것이다. 반대의견을 들으면서 문제 제기가 운동적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어떤 동지 채용에 대해서는 사무총장과도 의견이 엇갈렸다. 사무총국 인원채용으로 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서 내가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사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며 다소 폭력적인 무리수를 택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게 옳은 방식이었는지는 확신이 없다. 선거 이후 민감한 시기에 이해와 설득보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사무총국 동지들 충원을 결정한 것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 운동적이지 못한 제기였든 감정적인 제기였든 나 역시 감정적으로 대응한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전노협을 사랑한 사람들

신인령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거하느라 고생도 했고, 앞으로 전노협 꾸려가려면 힘들 테니 사무총장과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문성현 총장과 나는 신촌로타리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신 교수와 역시 전노협 후원회원인 내과 원장이 동석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신 교수가 밥값을 계산했다. 뒤따라 나오던 원장이 점심을 내가 사려고 했는데 신 선생님이 계산해버렸으니 나중에 식사나 하시라며 봉투를 내민다. 봉투를 문 총장에게 건네고 우리는 전노협 사무실로 들어왔는데, 문 총장이 눈이 휘둥그레져 위원장실로 들어왔다. “봉투가 다른 곳에 갈 게 잘못 온 거 같다며 내민 봉투에는 1천만 원짜리 수표가 한 장 들어있었다.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걸어 오늘 받은 봉투가 잘못된 것 같다고 하니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몇 번을 당부한다. 당시 전노협 사무총국 동지들 한 달 활동비로 5만 원 지급할 때였다. 돈의 출처는 밝힐 수 없었지만, 전노협 사업예산이 어려운 시기에 거액의 기부금은 전노협 사업에 유용하게 사용됐다. 30년이 다 되도록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나의 태연함이 놀랍다.

 

언짢았던 첫 기자간담회

전노협 위원장 취임 직후 홍보국장이 노동부 기자간담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기자들과 자리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거부했는데 전노협 사무총국 대부분이 해야 한다는 의견이어서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과천에 있는 중국집에 자장면 예약을 하고 점심시간에 10명이 훌쩍 넘는 노동부 출입 기자들과 만났다. 자장면이 나오기 전에 기자 한 명이 할 말이 있다고 입을 뗐다. “위원장님, 홍보국장 왜 안 자르세요? 저 사람 선거운동 기간 내내 양위원장 비판하면서 다른 후보 운동했어요라며 저런 사람은 빨리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간담회 시작도 하기 전에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지만, 기왕 기자간담회를 하러 온 자리인 만큼 전노협 사업은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나섰다. “홍보국장이 나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홍보국장과 저는 노선과 견해가 다르고 생각도 달라요. 그런데도 여기 홍보국장과 같이 온 것은 그간 기자들과 관계를 홍보국장이 담당해 왔기 때문에 기자님들 입장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기왕 만난 거 자장면이나 먹고 얘기나 하고 헤어집시다. 홍보국장을 자르든 남겨두든 그건 전노협에서 할 일입니다.”라고 얘기하며 별 맛도 나지 않는 자장면을 먹었다. 식사 후에 전노협 사업 기조와 계획 등을 설명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뒤 전노협 사무실로 돌아왔다.

 


<전노협 위원장실에서 _1994년 6월 전지협 파업으로 수배중 잠시 들러 한 컷. 임기 시작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 수배, 집무실에 앉아 일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공약도 실행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날들

선거 직후 중앙위에서부터 논쟁이 시작됐다. 공약 실행에 강한 태클이 걸렸다. 공약과 정책 중에 심혈을 기울이며 준비를 했던 사업은 첫 번째, BBS(전자게시판)을 설치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망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노동해방 사상을 체계화하기 위한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첫 번째, 전자게시판 설치 운영부터 중앙위원회에서 결사반대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1994년 초 당시에 전국적인 네트워크망을 설치한다는 것이 낯설 수는 있었다.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된다는 주장에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과 도표까지 그려서 설명했다. 그러자 그다음에는 기술진이 없어서 어렵다는 거다. 나는 신림동에 전자공학 네트워크 전문성을 가진 6명의 인력을 확보해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 중앙위원들이 동의하면 그 팀을 전노협 사무실에서 일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아울러 천리안을 활용한 인터넷 통신 네트워크는 시대의 대세인 만큼 머지않아 그런 통신망을 대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이제는 가뜩이나 전노협의 재정이 어려운데 그 재정을 어떻게 충당할 것이냐며 반대했다. 나는 전노협 사무실에 작은 공간을 확보하면 재정에 어려움을 겪을 이유가 없다고 답했지만, 반대하는 동지들은 막무가내였다.

나중에 왜 그렇게 BBS 설치에 반대했는지 알게 되었는데, 전자게시판 설치가 이후에 건설될 민주노총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기획된 사업이라고 판단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민주노조 운동에서 노선과 입장보다 주도권 확보를 우선시하는 유치함이 드러난 대목이다. 민주노조 운동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사업에 대한 의혹이나 두려움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인터넷망을 구축하는 것을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본다는 것은 정말 천박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반대하던 통신망이 구축됐다. 전노협은 안 되고 민주노총은 괜찮은 건가.

 

그 많던 노동해방깃발은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나 깃발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부터 울려 퍼졌고 당시에도 민주노조 운동의 모든 행사에서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그러나 그 구호의 의미가 명확히 정리돼 있지는 않았다.

노동해방을 사회체제 변혁으로 판단하는 동지들도 있었고, 노동을 편하고 쉽게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그 외에 각각의 의미가 조금씩은 달랐어도 자본의 모순에 맞서는 뜻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태일 정신을 해방 정신이라고 했던 데 비해 노동해방의 뜻은 긴 시간이 지났어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모호했던 게 사실이다. 논쟁이 될 수도 있고 민감할 수도 있지만, 운동적으로 노동해방이 개념과 성격을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중앙위원회에 안건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이 또한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우선 지도위원들부터 그동안 어떻게 만들고 지켜온 전노협인데 양 위원장이 전노협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냐며 반대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고, 상당수의 중앙위원도 마찬가지였다. ‘노동해방이라는 구호의 해석을 어떻게 정리하는가에 따라 대중조직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으로 내세웠던 공약들은 그렇게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 모두가 내 능력의 한계였고, 도식적으로 선거승리가 노선을 확정한다는 안일함의 발로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펄럭였던 노동해방 깃발도 우렁찬 함성도 현재는 보거나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밑그림 그리기조차 버거운 현실

또 하나의 쟁점이 있었는데 사무총국 국장 업무배치였다.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 신임 집행부의 정책에 맞게 역량이 배치돼야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선은 정책국장이다. 전노협 초기부터 김 아무개 동지가 정책 책임자였는데, 1993년쯤에 조사통계를 맡고 있던 다른 동지가 정책국장으로 이동하면서 김 동지는 정책국원이 됐다. 강등된 것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입지도 애매해진 셈이다.

나는 사무총국 인선과 관련하여 김 동지를 다시 정책국장에 임명하고자 했는데 큰 난관에 부닥쳤다. 김 동지는 내가 속한 선대본에서 정책을 생산해 냈고 공약과 핵심사업 기조까지 정리했다. 따라서 김 동지를 정책국장에 선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동지들의 반대는 그렇다 치는데 사무총장이 사활을 걸고 반대했다. 사무총국 신규채용하는데 한바탕 난리를 친 상황에서 계속 밀고 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사무총장이 극구 반대했던 근거는 김 동지는 전노협 정책국이 아니라 정치조직으로 가야 한다그는 전노협에서 정책국장을 할 수 없으며 대중조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내부에서 그런 논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김 동지가 총무국으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총무국장을 한다는 데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직이라는 뜻이다.

업무배치와 관련한 문제는 집행부의 향후 사업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중요했다. 더욱이 민주노총 건설이 구체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전노협 사무총국의 업무배치는 향후 민주노총 사업 기조와 직접적 연관이 있었으므로 아쉬움이 남는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넓거나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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