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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건설 창동공장 노조결성과 파업투쟁
⦁ 시기 : 1987년 7월 5일
동아건설 창동공장의 노조결성 투쟁은 세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본조의 어용성을 극복하고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지부 독자적으로 세워냈다는 점이다. 둘째는 1987년 이후 서노협 건설의 선봉이자 그 기지로서의 자기역할을 다했다는 점이며, 셋째는 이후 민주노조 운동을 이끌어가는 전국적 지도자로서 단병호라는 노동운동가를 투쟁 속에서 성장·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동아건설 창동공장은 원래 동아콘크리트라는 별도 법인체로서 1960년대에 설립되었다가 1986년 동아건설에 흡수·합병됐다. 동아건설은 크게 공장사업본부와 건설현장으로 나뉘는데 창동공장은 건설현장 산하 7개 공장 중 하나로 콘크리트 제품인 전주와 파일을 생산하는 부서, 로크라(PC관)를 생산하는 부서, 그리고 흄관을 생산하는 부서 등 3개 부서와 지원부서로 구성돼 있었다. 이 공장은 콘크리트를 주요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유해한 작업환경으로 산업재해가 빈발해 먼지, 시멘트 가루, 유독가스, 소음 등에 의한 피부병, 난청, 빨강머리 현상 등이 일반화돼 있었다. 이러한 작업환경으로 산재 발생은 국내 평균 산업재해율의 5배에 달하고 노동시간도 국내 월평균보다 72시간이나 많았지만 임금은 156,000원으로 몹시 낮았다.(1987년 상반기 평균부양가족 4.4인 최저생계비 643,773원)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전, 조직적으로 결집된 구심도 없는 상태에서 1986년 12월, 20여 년 동안 계속 쌓여 오기만 한 불만에 불을 지른 것은 상여금 문제였다. 즉 별도 법인이었던 동아콘크리트가 동아건설로 합병되면서 회사측에서 상여금 지급을 중단한 것이 말썽이 됐다. 불만이 폭발한 노동자들은 밤새 완강히 투쟁했고, 결국은 불붙인 경유 드럼통으로 사무실을 포위함으로써 회사측의 양보를 받아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힘을 조직적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투쟁에 앞장섰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후 회사의 회유에 따라 해외 건설현장 등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속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철근반 주임 단병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단병호를 중심으로 1987년 4월부터는 구체적인 조직에 착수해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나가기 시작했지만, 관리자들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맨투맨으로 붙어서 작업도 안 시키고 포기각서를 요구하는 등 회사측의 방해와 탄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조결성을 포기해버렸다. 그리하여 탄압과 주체역량의 파괴를 비켜가기 위해 단병호는 회사측을 안심시키는 방편으로 행동을 중지하기로 약속한 후 한 달간 사태를 관망하다 7월 5일, 기습적으로 야간에 한 개 부서를 이끌고 화학연맹으로 가 노조결성식을 하고 설립신고를 했다. 그러나 이미 10년 전에 부평공장에 본조가 결성돼 있었기 때문에 쟁의신고권이나 단체교섭권이 없는 지부 노동조합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도력 있는 핵심 몇 사람을 믿고 지부결성을 하기는 했지만, 대다수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한 노조간부의 이야기를 통해 현장노동자들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친구들도 노조간부로 있고 해서 약간 관심도 있었고 위원장이 쟁의부장을 맡으라고 해서 ‘쟁의부장이 뭐하는 겁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위원장이 대답하기를, ‘데모를 할 때 앞장서서 선동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나만 찍히고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 위원장에게 매우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정나미가 뚝 떨어져 대답도 안하고 나와 버렸지요.”
이러한 상황임에도 8월 18일 기습적으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지부집행부가 노조 결성시 보안문제로 여러 번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파업결의 뒤에는 보안유지를 위해 전체가 산에 가서 단체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 밤샘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평본조는 물론이고 회사측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었다. 회사측의 허를 찌른 기습적인 파업농성은 조합원들의 사기를 확실하게 끌어 올렸다. 회사측에서는 부평본조 위원장을 보내 “회사와 대화로 하면 요구조건을 들어주겠으니 농성을 풀어라”며 노동자들을 회유하기도 했지만 이는 어용노조가 어떠한 것인가를 노동자에게 교육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8월 18일에서 8월 26일까지 9일간의 파업투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노래라고는 ‘흔들리지 않게’밖에 몰랐고, 유행가부르기나 장기자랑, 휴식 등으로 지루하고 답답한 파업농성이 계속됐다. 이런 상태에서 회사측이 시간당 30원 인상안(그때까지 회사에서 시급 20원 이상 인상시킨 적이 없었다)을 내놓자 위원장을 제외한 파업지도부는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핵심간부들이 위원장만 빼고 회의를 열어 ‘30원 인상’을 결정하고 위원장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위원장이 계속해서 전체 조합원들의 투쟁열기를 ‘시급 50원 쟁취’로 몰고 나가자 상집들이 대의원대회를 열어 ‘30원 인상안’에 합의할 것을 결정하고 위원장에게 통보했다. 단병호 위원장은 이들 뜻에 따르는 척하며 조합원 총회에 나가 끝까지 ‘50원 인상’을 주장하여 관철시켰고, 결국 조합원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회사측과도 △50원 인상 △단체협약 독자체결 인정 △월 3시간 유급 노조교육시간 확보 등을 쟁취해냈다.
이후 동아건설 창동지부는 조합원들의 위원장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지원으로 탄탄한 노조로 탈바꿈해 갔고, 토요일 오후마다 밤잠을 설치며 소모임 활동을 계속해 역량 있는 간부들을 배출했다. 이 동력은 1987년 10월의 통상임금 쟁취투쟁에서 직책수당에 대한 통상임금 적용분 1년치를 되찾는 힘으로, 다시 1988년 상반기 임투에서도 승리를 쟁취하는 밑바탕이 됐다.
⦁ 참고자료 : 한국노동연구소 편, <새벽을 여는 함성> (현장,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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