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회원 마당
..... N라면 노동자의 기억(7) - 파업
첨부파일 -- 작성일 2021-06-15 조회 309
 

N라면 노동자의 기억 (7) : 파업

  

*

 

안양·안성·부산 공장 중 안양공장만 파업을 하니 회사 측에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유일하게 라면스프의 생산시설을 갖춰 3개 공장의 스프를 공급하고 있는 안성공장만 제대로 가동된다면 매출에 큰 타격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성과 부산공장은 조합원들이 직접 대의원을 선출하는 안양공장과는 달리 먼저 후보 등록을 하는 사람이 자동으로 대의원이 되는 곳이었다. 반장들이나 관리자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먼저 선점을 해 다른 사람들이 감히 후보등록을 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어쩌다 회사나 노동조합에 불만을 터뜨리면 어느새 관리자의 귀에 들어가 외부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선동을 한다며 곤욕을 치르니 그런 것이다. 대화의 내용도 상대방을 봐가며 할 지경이었다. 분위기가 이러니 자연 조합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도 떨어졌고 회사 측의 악선동도 쉽게 먹혀 들어갔다.

  

이런 사정이니 안양공장에선 1,000여명의 조합원들이 사람답게 살아보자며 땡볕에서 보름 가까이 목이 터져라 악을 쓰며 싸워도 두 지부에서는 휴일 반납은 물론 식사시간까지 줄여가며 생산을 했다. 지부장들과 지부의 상집, 대의원이 한두 명씩 임금 교섭대표로 참석하긴 하지만 대부분이 반장이거나 회사 측에 가까운 사람들이니 회사나 노조 집행부의 말을 더 믿고 그대로 지부의 조합원들에게 전달하곤 했다. 지부의 조합원들은 평소 회사와 어용 집행부에 가까운 사람의 일방적인 얘기에 의아해도 안양공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당사자들의 말이니 어쩔 수 없이 믿었다. 안양공장의 조합원들과 인척관계이거나 개인적으로 연락이 닿아 안양공장 소식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조합원들이 몇 마디 물으면 안양공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의 얘기를 못 믿겠냐며 쏘아붙이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안양 공장 조합원 총회에서도 수차 논의가 된 문제였다. 우선 가까운 안성공장이라도 전 조합원들이 몰려가 우리의 파업경위를 사실대로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자는 안이 나오기도 했다. 안성공장에서 스프가 차질 없이 생산되는 한 안성과 부산에서는 계속 라면이 생산될 것이고, 그러면 회사에서는 눈 하나 깜짝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여명의 인원이 이동하는 것도 쉽지가 않고, 회사 측과 경찰 역시 우리들의 이동을 구경만 하지 않을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1000여명의 인원을 나누어 가자니 투쟁의 열기가 식을 것 같고, 그렇다고 파업현장을 몽땅 비워두고 전 인원이 가자니 그것도 문제가 많아 보류했던 것이다. 그래 분통을 터뜨리며 휴일과 식사시간까지 반납하며 반노동자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회사 측을 도와주고 있는 지부조합원들을 매도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민주파 핵심모임인 6인회는 파업의 경위와 과정을 정확히 알리기 위한 홍보물을 제작해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가까운 안성공장만이라도 밀사를 파견해 파업의 경위와 상황을 정확히 알리자는 얘기였다. 말이 배포지 투하였다. 회사나 노동조합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체의 홍보물의 제작, 배포, 소지가 단체협약 상 징계의 대상이니 조합원들의 왕래가 많은 곳을 찾아 담 너머로 투하하는 것이었다. 그 중대하고도 막중한 임무의 밀사가 3명이었다. 6인회 중 1명인 손주연양과 나머지 2명은 조합원 중에서 차출하기로 했다. 안성공장의 중요성을 감안해 회사에서도 한층 경비를 강화했을 터였다. 붙잡혔을 경우를 포함해서 모든 시나리오를 짰고 실전연습까지 했다. 그야말로 군사작전이었다.

  

혼자서 사전답사를 하고 온 손주연양이 약도를 그려가며 정문과 외곽초소의 위치, 끝난 후의 집결지 등을 설명했다. 투입시점은 작업 교대시간인 저녁 8시였다. 투입지점 또한 철조망과 거의 붙어있는 동쪽 건물의 입구였다. 사람들의 출입이 잦고 안에서 기계소리와 여자들 소리가 어우러져 나는 걸보니 포장실인 듯하다고 했다. 다행히 외곽초소와 떨어져있고 보안등도 없어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저쪽이 정문이야."

손주연이 어둠속을 가리키며 말했으나 김미숙과 이지선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리칼이 주뼛주뼛 섰고, 누군가가 뒤에서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정문을 좌우로 끼고 각각 1명씩 먼저 돌아갔고 잠시 후 손양이 김양이 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정문의 경비실에서는 경비가 혼자 앉아 한적하게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고, 다른 곳에도 경비는 보이지 않았다. 엊그제 사전답사 때도 철조망을 따라 서성이는 경비들이 있었으나 교대시간 탓인지 지금은 없었다. 다행히 어느 곳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이양이 철조망을 따라 돌아가니 손양이 말한 지점이 다가왔다. 맞은편 어둠속에서는 김양이 역시 긴장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작업이 끝난 듯 왁자지껄 현장 문을 나서는 아가씨들의 모습이 손에 닿을 듯 보였다. 1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3인은 홍보물을 철조망 너머로 마구 던졌다. 인기척이 있으면 쉬었다가 뜸하면 던져 넣었다. 골목길은 깜깜 적막일 뿐 인기척이 없었다.

 

안에서 갑자기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투입과 동시에 출입문이 열리며 몇몇 아가씨들이 나왔고, 어둠속에서 뭔가가 날아드니 놀랜 것이다. 셋은 동시에 내튀었다. 각기 온 방향이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호루라기 소리가 뒤따랐고 어느새 두세 명의 남자들이 이양이 뛴 방향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손양과 김양은 경비실 쪽을 피해 앞 공장의 담을 끼고 내달렸다. 죽을힘을 다해 어둠속을 달렸다. 뒤쫓던 남자들은 포기한 듯 기척이 없었다. 앞의 공장 담을 ㄱ자로 돌아 큰길이 보이자 둘은 안도하며 이양을 걱정했다. 이제 행인처럼 자연스레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안양공장에서 왔지?"

큰길을 대여섯 발짝 앞두었을 때였다. 갑자기 담 모퉁이에서 3명의 경비들이 튀어나오며 둘을 에워쌌다. 둘은 대답도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좀체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가자고, 회사로." 둘은 꼼짝없이 노무과로 따라왔다. 처음 와보는 안성공장, 그렇게도 궁금하고 와보고 싶던 공장이었다. 그 경황에도 이런 상념이 스치자 손양은 피식 웃었다.

  

노무과장은 의외로 친절했다. 늦은 저녁을 시켜주는가 하면 연신 마음 푹 놓고 쉴 것을 권했다. 어쨌든 큰집에서 온 손님이기 때문일까, 노무과장답지 않게 인간적이고 자상했다. 집결장소인 그 다방에서 두 사람을 피가 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이양을 떠올리다, 경비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외통길을 태연한 척 걸어오다 여기까지 끌려온 생각을 하니 분하고 우스웠다. 안양공장의 임금협상 등을 떠올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자 전화벨이 울렸다. 안양공장인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노무과장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협상 타결됐다니까 이제 아가씨들 고생 안 해도 되겠구먼. 지금 차도 없으니까 내 차로 안양까지 데려다주지." 10시였다. 사양을 해도 노무과장은 막무가내였다. 부장님의 지시라는 거였다. 손양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설움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복받쳐 오르는 노동자의 설움일 터였다.

              

*

  

연일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악을 쓰던 송인자양은 이젠 목이 쉬어 있었다. 스낵1과 포장실의 대의원으로서 뛰어난 지도력과 호소력 있는 말솜씨로 조합원들을 사로잡던 아가씨였다. 달리 마이크를 잡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또 민주파 대의원 중 일부만 전면에 나서기로 한 전략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지친 모습은 비단 송양 뿐이 아니었다. 땡볕에 앉아서 내내 악다구니를 쓰며 노래와 구호를 외친 여성조합원들 역시 얼굴이 검붉게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파업지도부의 교섭대표를 이끌고 어용 노조집행부와 회사를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해온 정동철씨는 입술까지 부르터 있었다. 모두들 지친 얼굴들이었다.

 

특별한 대책이 있을 리 없다. 확신도 신념도 눈에 띄게 위축돼 있다. 매일 몇 차례씩 하는 파업지도부의 대책회의도 회사 측 요구대로 협상대표에게 전권을 위임하자는 조합원 투표 결과 탓으로 더더욱 침울했다. 사사건건 대중의 뜻을 묻고 다수의 뜻이라고 무조건 따르는 대중 추수주의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한계상황 속에서의 대안부재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아무튼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투표 결과로 인해 당장 나타날 조합원들의 투쟁의지의 저하가 문제였다. 특히 파업의 분위기를 주도해온 여성 조합원들의 사기 저하가 걱정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만이 최선의 방법임을 호소하는 파업지도부 명의의 홍보물을 배포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단결된 모습을 회사 측에 보여주는 것 외엔 딴 방법이 없었다. 일정도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 그대로 하기로 했다.

  

오늘 오전 2시간 정도의 분반토의에서는나의 월급과 생계비에 대해 토의를 해보기로 했고, 오후 1시간 정도는 전날 각조별로 모여 만든 조별가(조별 노래)와 조별 구호를 발표하기로 했다. 또한 내일이 메이데이임을 감안해 메이데이의 유래와 의미 등을 대자보에 적어 게시하고, 간단한 기념식도 하기로 했다. 선전부에서는 파업기간 중 찍어놓은 사진들을 벽면에 개시하여 분위기를 돋우기로 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조합원들의 단결과 투쟁의지를 유지해보자는 안간힘이었다.

 

일부 조합원들은 기대감에 부풀은 듯 했다. 회사의 요구대로 양보를 했으니 협상은 순풍에 돛단 듯 순항하리라 믿는 눈치였다. 회사 측에서도 뭔가 성의 있는 양보안이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파업 12일 만에 열린 10차 협상에서 회사 측은 그러한 조합원들의 순진한 희망사항을 여지없이 뭉개버렸다. 회사 측의 대표인 이신홍 상무는 1-9차까지의 협상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는 노조 측의 수정안만을 요구했다. 회사 측은 36.3%를 고수하면서 2%를 양보한 노조 측의 47.3%를 더 낮추라는 얘기였다. 시간을 질질 끄는 김 빼기 작전으로 조합원들의 가장 큰 무기인 체결권을 무장 해제시키고 보니 이번에는 아예 진을 빼버려 고사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떡 하나 더 주면 안 잡아 먹지였다.

 

12시에는 38.4%로 결정된 노동부 중재위원회의 결정사항이 대자보로 공장 곳곳에 게시되었다. 우리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생계비와는 상당한 격차가 있는 내용이었다. 안양부근에서 일이 힘들고 임금이 적기로 소문이 난 곳이니 조합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재위의 결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이직률이 심하고 인원 충원을 해도 한 달을 넘기기도 전에 다른 회사를 찾아 떠나 평소에도 작업인원의 부족으로 흉물처럼 세워놓는 기계가 한두 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조합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자보를 응시하거나 일부는 욕지거리를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준엄하고 엄숙한 법의 이름으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악법을 불법으로 깨뜨려 바로잡을 자신이 없는 한 이것은 절대적으로 권위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측 역시 노조 측의 수정안이 없으면 중재위의 결정대로만 주면 된다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또다시 분반토론이 열렸고 총 30개조 중 8개조가 기존대로 회사 측의 수정안이 없는 상황에서 노조 측의 선 수정안 반대를, 6개조가 기권을, 16개조가 회사 측의 요구대로 노조 측의 선 수정안 제출을 찬성했다.

소신껏 원칙대로 밀고나가지 못하는 파업지도부에 대한 일부 불신도 있었으나 어떻든 노조 측 교섭대표 회의에서 노조 측의 수정안은 45%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54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43%1989년 임금 협상의 대단원은 막을 내렸던 것이다. 파업 참여자에 대한 모둔 신분보장과 쟁의 기간 중의 임금을 생활보조금 형식으로 지급하는 것 등도 임금협상 타결 내용이었다. 노조 집행부가 빠진 상태의 14일간의 파업은 조합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였다. 품삯으로 받은 떡을 어린 오누이에게 먹이기 위해 허위허위 산 고개를 넘는 어미에게 고개마다 나타나 뺏어먹고, 종당엔 그 어미마저 잡아먹은 음흉한 호랑이의 수법이었다.

   

*

   

월요일 아침,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아침 830분에 출근한 조합원들은 난리였다. 토요일 오후, 조합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이 임금협상을 전격적으로 타결시켰기 때문이다. 회사 측 요구대로 교섭대표들에게 전권을 줘야 한다며 바람을 잡던 남자조합원들도 난리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믿었다가 속고 또 다시 믿었다가 속는 건 해마다 겪는 연례행사였다. 회사 측에서 최종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 문제를 집요하게 문제 삼는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믿거라 내맡겼다가 해마다 배신을 당하면서도 순리를 강조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바람을 잡고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아가씨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온갖 설움 다 받으면서도 일은 제일 힘들고 월급은 남자들의 절반에 가까운 아가씨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싸웠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말문이 막힌 채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파업지도부의 교섭대표들도 유구무언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울고 싶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래도 계산은 남자들이 빨랐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구체적으로 내 월급이 얼마나 올랐는가가 궁금한 것이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파업지도부의 교섭대표였던 정동철씨가 메가폰을 잡고 연단위에 올랐다. 협상 과정에 대한 보고에 이어 질의와 응답이 끝나자 정동철씨가 말했다.

야근자는 지금 퇴근 후 오늘 저녁 출근하고 주간자는 내일 작업에 차질이 없도록 현장정리를 한 후 퇴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든 협상은 끝났으니 조장님들 책임 하에 반드시 이번 파업에 대한 조별평가회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별 회식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신 후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투쟁을 위해서도 또 다른 시행착오를 없애기 위해서도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동철씨의 뒷부분의 말은 조합원들의 야유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조별 평가회나 조별 회식은 극히 일부 조합원들만의 일이었다. 주간자 역시 현장정리를 거부한 채 대부분 그대로 퇴근하였고, 야근자도 일부 조합원들만 출근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게 낫잖냐는 분위기였다. 내가 노동조합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보다는 노동조합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느냐가 더 중요한 게 대중들의 심리였다.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에 불씨를 당긴 것은 회사 측의 대자보였다. 협상의 기습 타결에 항의해 퇴근한 사람들을 전원 무단결근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주간자 조합원들은 대부분 연장근로를 거부하고 오후 5시 퇴근하였고, 노동조합 사무실은 조합원들의 항의 인파로 연일 떠들썩했다. 기습타결에 대한 후유증이 심각하자 생산총본부장인 이신홍 상무는 전 조합원들을 주야별로 강당에 모아 긴급 조회를 했다. 외부 불순단체에서 의식화 교육을 받은 일부 운동권들이 노조 장악을 위해 조합원들의 호응을 유도할 목적으로 임금을 문제 삼아 일으킨 것이 이번의 불법파업이라는 얘기였다. 이 조직을 파악하기 위해 15억의 매출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파업을 지연시켰다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파업은 일부 불순 세력들이 대다수의 선량한 조합원들을 선동해 일어난 것이며, 아직도 현장에는 외부 불순세력의 사주를 받고 여러분들을 선동하고 있는 불순세력들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 선의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생산총본부장의 이러한 훈화는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다. 듣기만 해도 어쩐지 으스스하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게 만드는 외부 불순세력이니, 의식화니 운동권이니 하는 말들이 내내 조합원들의 귓전을 맴돌게 하는 게 사실이었다. 흔히 쓰는 근로자란 말 대신 굳이 북한에서 쓰고 있는 노동자, 투쟁 쟁취라는 말을 고집하는 것을 보면 어쩜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와는 너무나 다르고, 노래 분위기도 어쩐지 으스스하고 과격한 노동가를 조합원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우리와는 생각과 말이 너무나 달랐어, 하며 쑥덕거리는 조합원들도 있었다.

 

각과의 부장과 과장들의 부서원들에 대한 개별면담을 통한 회유와 엄포도 시작됐다. 운동권 세력의 선동에 의한 연장근로 거부의 문제점과 선의의 피해를 입지 말도록 주의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스낵1과 파업지도부의 대의원들에게는 5,600만원에 대한 손실 소견문이 강요되기도 했다. 파업이 시작되던 날 연장근로의 거부로 회사가 입은 손해에 대한 소감을 쓰라는 얘기였다. 아무튼 현장은 뒤숭숭하고 뭔가 다른 일이 터질 것 만 같은 분위기였다.

  

노동조합의 회계감사로서 파업지도부에 참여해 노동조합 측의 임금협상과 파업의 대열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정동철과 송인자 2인에게 징계위원회의 출두통보서가 날아온 것은 파업이 끝난 지 11일만의 일이었다. 임금협상이 최종 타결되기 직전 이번 파업으로 인해 파업지도부는 물론 조합원들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않고 불문에 부치겠다는 회사 측 대표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징계위원회의 출두요구서가 날아온 거였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며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탈의실에서 허탈해하는 정동철씨와 징계위원회의 출두요구서를 보면서 나는 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노사 교섭대표는 물론 30여명의 조합원들 앞에서 한없이 너그럽고 온화한 빛으로 어느 누구도 처벌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며 걱정하지 말라던 생산총본부장과 노무담당 이사의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회사 측 대표의 화끈한 그 말에 노사 대표들과 참관 조합원들이 일제히 박수로써 환영을 했던 일도 떠올랐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식 노사협상장에서 한 회사 측 대표의 말도 각서를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한 기분은 소태를 씹은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주먹이 법인 세상이었다.

  

*


1987년 이후 대의원으로서 또 노동조합의 회계감사로서 노동조합의 활성화에 온힘을 쏟았던 두 사람의 인상은 조합원들에게 너무나 강렬했다. 14일 파업기간 내내 파업지도부를 이끌며 교섭대표로서, 또 연단에 서서 목이 터지도록 투쟁의 대열을 이끈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협상 결과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파업지도부의 한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와 노동조합 집행부의 틈새에서 외롭고 힘든 투쟁을 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었다. 단 며칠 만에 끝날 것이라던 우리의 파업이 14일이나 지속된 것도, 그나마 43.3%를 받은 것도 가열찬 투쟁 덕이었고, 그 일등공신이 다름 아닌 두 사람이라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노조 집행부가 빠진 상태에서 14일간 버틴 19898월 파업은 조합원들의 가슴에 뿌듯한 뭔가를 심어주었고, 우리도 뭉치면 할 수 있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명예혁명이었다. 그런 만큼 조합원 사이에 파업에 대한 뒷얘기와 추억은 끊일 줄을 몰랐고, 항상 그 중심에는 정동철씨와 송인자양이 서 있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차기 위원장감이라는 얘기가 서슴없이 떠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2인에 대한 징계위원회의 출두통보 사실이 조합원들에게 알려지자 현장은 사위어가는 불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노사 간의 교섭대표들은 물론 20여명의 조합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공식적인 협상에서 한 회사 측 대표의 약속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징계위원회에 출두하라니 기가 막혔던 것이다. 기가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비열함에 치가 떨렸던 것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십 명의 조합원들이 노조사무실을 항의 방문해 집회를 열었고, 라면1과와 송인자양 부서인 스낵1과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연장근로를 거부하고 노조사무실로 집결했다. 물론 위원장의 답변은 최선을 다 하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였다. 

 

일부 민주파 대의원들과 파업 지도부요원들을 중심이 돼 야간조부터 전 조합원을 상대로 한 징계반대 서명 작업을 하기로 했다. 회사 측 역시 대의원과 파업지도부 요원들을 부장과 과장들이 개별면담을 통해 법조문을 들이대며 회유와 협박하기에 바빴다. 파업은 물론 연장근로의 거부와 서명 작업, 집단항의 등은 모두 불법이며 따라서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연장근로의 거부는 더욱더 확산되어갔고 점심시간과 오후 5시 퇴근이후의 노조사무실 앞 항의집회는 연일 이어졌다. 징계위 출두 전날에는 야간 출근자까지 150여명이 합세해 항의집회를 연후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회사 측에서는 뒤늦게 협상타결 보고대회 후 작업준비를 거부하고 항의퇴근한 사람들에 대해 결근이 아닌 월차휴가로 할 것임을 은혜인 양 공고했으나 이는 이미 조합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무실이 노조사무실과 불과 20여 미터 떨어져 있어 아가씨들의 항의 집회를 매일 코앞에서 보아온 자동정비반 조합원들도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비실비실 뒤로 처지는 대부분의 남자 부서와는 달리 14일 파업기간 내내 가장 모범적으로 선봉에 섰던 부서가 정동철씨 부서인 공무과 자동정비반이었다. 때문에 파업이 끝난 후 부장과 과장의 감시와 회유가 극심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그게 문제일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와 같이 싸웠던 동료를 구하자고 나이 어린 아가씨들까지 저 난리인데 같은 부서의 동료로서 더 이상 비겁하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몇 동료들이 분연히 일어서 2인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것을 주장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들의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그런 고뇌의 시간도 점점 거세게 번지는 여성 조합원들의 항의시위에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3개조 30명이 즉각 비상 소집되었고 2인의 징계 시 30명이 같이 단체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바빠진 것은 공무과장과 부장이었다. 대표자를 뽑아 대화로 풀 것을 요청하는가 하면 반장 등 보수적인 사람들을 회유해 분열책을 유도했다. 모든 일은 물리력이 아닌 순리로 풀어야 하고 우리 부서의 30명만 해 봐야 되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 무리를 고집하는 회사 측을 상대로 어떤 순리를 쓰라는 건지, 30명만으로는 안 되니 더 많은 인원을 끌고 오라는 건지, 아니면 아예 우리의 일이 아니니 모르는 척 하라는 건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의견이 또다시 분분해지자 오후에 노조사무실에서 재집결하여 논의했으나 기존의 결정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회사의 징계방침에 변함이 없으니 징계위가 열리는 내일 오전부터 단체행동에 돌입하기로 했던 것이다.

                   

 

 
 
 
 
 
목록
 
이전글 <조선혁명선언>과 류자명_ 김미화
다음글 또 짐 싸다 _정경원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