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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현이들 1 _ 소요 (9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7-03-16 조회 1197
 

가현이들 _1

 

  소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너는 톱니바퀴 속 작고 작은 부품 정말 아무 것도 아니지. 마지막 저금 통장에 들어있는 19만원을 들고서 나는 어디로 갈까.” - 희한한 시대, 옥상달빛

 

   

 

그 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용산에서는 이명박 정권의 과잉진압으로 철거민들이 죽었고, 검은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하얀 눈을 맞으며 밤새 거리를 지켰다. 가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 가현은 2008년에 생에 처음으로 집회에 나갔다. 고등학교 야자를 도망 나와 처음 본 것은, 사람들을 때리는 경찰과 머리 위에 떠있는 헬기였다. 세상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엄청난 고난이 시작될 것처럼 겁을 주었다. 온 사회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른손을 들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운동장에 나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가난한 아이들은 그저 가난해 했고 사람들은 바쁘게 살았다. 바쁘게 살수록 가난해졌고, 세상에 고시원이 유행할 무렵, 가현도 스무살이 되었다. 집을 나와 알바를 통해 마련한 작은 월세방에서,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한 가현은 앞으로 살게 될 삶에 대해 생각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이 날마다 밀려왔다. 해고도 수없이 당했다. 아무도 그녀의 실직을 해고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한시적 노동이라는 사회적 인식에 갖혀 부당노동행위와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누구도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그런 때에 가현은 알바노조를 만나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바연대 회원이었고. 이제 2013년 겨울에 알바연대가 생기고 나서, 그때 저랑 청소년 운동같이 했던 친구가 알바연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제가 알바를 많이 한다는 걸 알고 저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해서 그때 처음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이 단체가 너무 좋은 거예요. 막 여태까지 했던 인터뷰는 뭐라고 해야할까. 그냥 청소년 운동에 대한 인터뷰라던가 약간 선정적인 이런 거였는데 그 사람의 인터뷰는 뭐였냐면, 한 달에 월급을 얼마정도 받아요 알바하면? 그리고 이 월급은 어디다 써요? 과일은 좀 잘 먹고 있어요? 뭐 밥은 잘 챙겨먹어요? 뭐 이런 식의 인터뷰를 하고, 최저임금 1만원에 관련된 인터뷰를 하고 실질적인 알바노동자의 삶에 대한 관심과 노동자적 관점이 담겨 있었어요.”

 

      
 

언론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알바 노동자들은 노동행위를 통해 실질적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실업의 그늘 안에 있는 구직자이거나 가계의 생계에 있어서 부차적 역할을 하는 보조적인 노동자로 취급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배제와 차별을 낳는 구조 속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자의식은 그들의 노동환경과 함께 인권의 사각지대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래서 부당노동행위가 일어나는 경우에도 그냥 참는다거나 직장을 옮긴다거나 문제가 쉬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그렇듯이, 가현도 그러한 소외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소외는 알바노조 활동을 하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때 이제 상근을 하면서 제가 되게 힘들었던 게 뭐였냐면 알바노조가 되게 학벌중심주의적인 운동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요. 운동권 안에 학벌이 존재한다는 것도 되게 많이 느끼거든요. 왜냐하면 그때 이제 잘되는 분회들이 대학 분회들이었는데 뭐 서강대분회, 경희대분회, 고대분회 이런 식으로 되게 잘됐어요. 그러니까 대학에서 되게 잘 팔리는 운동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저한테는 한대련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니까 각 대학마다 한대련 같은 게 있는건데, 그 한대련이 이제 알바노조인거죠. 예를 들어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는데 알바노조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위원장님 빼고 다 대학을 나왔어요. 경희대, 뭐 외대, 뭐 무슨대 무슨대 이렇게 나왔는데, 그래서 경희대 분회를 이 친구가 맡는 거예요. 사무국장이 경희대를 나왔으니까. 외대분회도 이런 식으로 맡는다던가. 그래서 내가 낄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나봐요. 그리고 이런게 있었어요. 분명히 이 친구들은 나보다 좋은 대학을 나와가지고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인데 왜 이런 노력을 하지? 하는 이런 것도 약간 엄청 있었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에요. 알바노조가 떴을 때 당시에 분명히 필요한 인력이 있었고 그 힘이 어째든 그 분회들에서 나온 것은 맞는데. 어쨋든 저한테는 그게 되게 힘든 것이었어요.

왜냐면 일단 부르는 단어부터가 달라요. 일단 선배라는 단어가 존재하잖아요. 근데 전 선배라는 단어가 없거든요. 그 안에 공백이 쌓이면 이게 운동 안에서 선배의 가치가 굉장히 커요. 저는 되게 그렇게 느꼈거든요. 근데 우리는 만날 선배도 없었고, 그리고 그게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사실 회식자리만 가더라도 그런 대학 이야기를 되게 아무렇지 않게 서슴없이 하잖아요. 왜냐면 그때 세대들은 학생운동을 했어서, 남은 사람들이 그 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이야기가 되게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것이고. 대학을 안간 사람 입장에서는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 그땐 그랬지가 우리한테는 되게 불편한 것이고, 선배라는 단어도 우리한테는 공백의 단어라서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한테 선배라고 부르면 왠지 나도 선배라고 불러야 될 거 같은. 실제로는. 그런데 이제 알바노조 사업에서는 대학사람들이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은 사업들을 할 수 있고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니까. 그 사람들 위주의 사업을 펼쳤던 것이고, 저는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자괴감 같은 것도 많이 들고 그랬던거죠.“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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