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은 견고하고 강하다 : 김성민 유성기업 영동지회장 인터뷰 소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 나의 자랑 이랑 中, 김승일 시인” 대학졸업을 앞둔 S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밤중이었다. S는 편의점 앞 테이블 의자에 앉아, 학자금대출‧월세‧휴대전화비‧밥값 그런 단어들을 하나씩 바닥에 떨구면서 울었다. 그녀는 노동자가 되기를 두려워했다. 노동자가 되면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환한 편의점 불빛 속에 서 있던 알바생이 우리 테이블 쪽을 곁눈질 해왔다.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은 너무 오래 일한다. 이는 평균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축에 속하는 독일과 비교했을 때, 연간 4개월 정도를 더 일하는 셈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이윤추구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옹호하는 법제도와 노동문화들이 강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오래 일하면서 자신을 잃어간다. 쉬운 해고나 2년 계약과 같이, 노동자를 부품처럼 취급하는 사회에서 점점 일하는 기계가 되어 삶의 주체성을 상실해가는 것이다. S는 대학진학과 취직만을 위한 공부만 평생 하다가, 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르게 되는 한국 사람들은 매력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몇 주가 지나, S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지역에서 하는 노동법 교실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도 올빼미처럼 살까봐 겁이 난다고 했다. 올빼미? 강좌에서 유성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한광호 열사가 떠난 지 200일이 넘어가던 날이었다. 문득, 70년대의 난장이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무너진 돌담에서 신음하던 도시의 철거민들은 그렇게 난장이로 지칭 되었었다. 그 난장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울의 밤을 밝히며 24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들. 한광호 열사가 떠난 지 300일이 넘은 오늘, 6년째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유성기업 올빼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유성기업 영동공장의 김성민 지회장(이하 김)을 만났다. 
“그때는 얼마나 가난했는지 왜 이렇게 추웠는지 모르겠어요.”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버지는 술에 취한 밤마다 어머니를 때렸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였다. 김이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때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떠나던 날, 김은 연탄불을 갈다가 스물 네점 치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연탄불을 제대로 갈지 않는다고 김을 크게 나무랐다. 방에는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김은 16살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 첫 월급으로 13만원을 받아서 계모에게 주었다. 용돈으로 2만원을 받았고, 저녁에는 야학을 찾아가 공부했다. 리어카로 물건을 실을 때마다 동네친구들을 마주칠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공장의 아줌마들은 김을 자식처럼 예뻐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하던 일이 잘못되어, 하루아침에 김씨 가족은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 가난이 심해져 동생들도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수배된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가고, 김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병원에서도 일했고 건설현장에서도 일했다. 그렇게 김의 80년대가 다 갔다. “저는 부서장한테 잘못된 거 있으면 따지는 편이었거든요. 개인이 싸웠을 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이게 집단으로 하니깐 되는거예요. 아 이게 노동조합이구나 알았어요.” 김은 93년도에 병역특례를 통해 유성기업에 입사했다. 유성기업도 87년 이후로 민주노조가 들어서고 활발한 노조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성기업은 피스톤링이라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김은 불량품 수리하는 일을 했다. 특례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고 임금이나 상여금도 똑같이 올랐다. 노동조합의 힘도 강해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김은 회사가 좋았다. 정규직이고 상여금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은 틈틈이 못했던 공부를 하기 위해 야간대학에 등록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싫어서, 그 흔한 회사 동아리들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낮에는 일을 했고, 밤에는 대학에 다녔다. 회사에서 일한지 10년이 다되었을 때, 점점 사내 부조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첨을 못하고 바른말을 잘하는 성격 탓에 부서장의 눈 밖에 났던 일도 있었다. 노조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알음알음 사람들을 모아 부서파업을 주도했다. 노동자들을 하인 부리듯 하던 부서장이 꼬리를 내렸다. 파업이 끝난 후, 김은 회사에 순종만 하던 사람들의 어깨가 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주간연속 2교대의 핵심은 월급제에요. 이걸 현장에 적용하면 임금이 삭감 되는건데 조합원들 역시도 반대가 심했죠.” 김은 부서파업을 계기로 본격적인 노조활동을 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동조합의 존재가 노동자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바 있었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야간 작업과 특근을 하면 임금을 두 배 가까이 받을 수 있었다. 현장에는 안전 불감증이 심했다. 몸은 혹사당하더라도 눈 앞의 임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29살의 젊은 조합원은 수면 중에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김은 야간노동이 없어지려면 시급제를 폐지하고 월급제를 도입해야한다고 생각했다. 2008년 경제 파동 이후로 불어 닥친 실물경제의 위기로 자동차 판매량이 급감하자 잔업특근과 함께 임금이 많게는 100만원씩 떨어졌다. 노동자들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주간연속 2교대제 합의가 절실했다. 그래서 2009년도에 사측과 합의했다. 2011년까지 점진적으로 시행하기로 한 약속을 회사는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합의를 어기는 것은 예사였다. 복수노조와 타임오프제가 시행된 이후로 사측은 노골적인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20년이 넘게 함께 일해 온 노동자들을 계획적으로 이간질하고 갈라놓았다. 창조컨설팅은 핵심적인 노동자들을 문서로 직접 지칭하며 치밀하게 노동조합을 장악하려 했다. 이 뒤에는 현대차가 있었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요.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이 전임자 임금하고 복수노조법이었어요. 추미애는 환노위원장이었잖아요. 그걸 통과시켰고 우리는 막지 못했어요. 비정규직은 이제 손볼게 없어졌고, 이제 정규직이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1년 유성기업 측은 계획적인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주간연속 2교대제를 번복했다. 이후로 유성지회 노동자들은 100여일간의 비닐하우스 농성, 오체투지, 고공단식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을 통해, 현대차 원청과 유성기업에 대한 단호한 투쟁에 나섰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해고와 징계를 포함한 온갖 인권탄압에 시달리며, 2016년에 이르러서는 전국 최고의 산재율과 우울지수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차와 창조컨설팅의 합작 하에 진행된 끔찍한 노조 죽이기의 결과였다. 한광호 열사는 자결하기 사흘 전 김과의 식사자리에서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징계를 받아 미안하다. 노조에 짐이 되어 미안하다. 그랬던 그가 죽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정신없이 싸웠다.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에 비하면 힘들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돌아보니 6년이었다. 끈질기게 싸운 결과, 노동자들을 갈라놓기 위해 만든 제 2노조에 대한 무효판결과, 공격적 직장폐쇄에 대한 불법판결을 받아냈다. 한광호 열사도 산재승인을 받았고, 이제는 유성기업 회장인 유시영에 대한 처벌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상 사측은 끈질긴 노동자들의 투쟁 앞에 하나 둘 무릎을 꿇은 것이다. 김은 본질적으로 현대중공업의 비정규직 문제로부터 이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2년짜리 계약권력을 쥐고 사실상 노동자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자본은 의기양양하며 정규직을 손보기 시작했고, 타협기조를 가진 정규직 노조들에서도 비정규직 싸움을 등한시했다. 자본은 순차적으로 깨나갔다. 비정규직은 끝났고 이제 정규직만 손보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자본의 거대한 계획 앞에, 한 달도 못 버틸 거라던 싸움이 6년을 버텼다. 조합원들의 힘이었다. 얼마 전, 김은 100프로의 지지로 지회장이 되었다. 앞으로는 현장의 어용노조를 무력화 시키고 현대차 원청의 책임을 묻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김은 자신이 있다고 했다. 지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친화력 없는 성격 탓에 조합원들과 별로 친하지 않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던 김에게서 조합원들에 대한 애틋한 믿음이 느껴졌다. “조합원들 힘들까봐 그게 걱정이죠. 제가 10년동안 싸우면서 느낀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은 견고하고 강하다는 거예요. 그것을 간부들이 의심할 뿐인거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조합원들 파업 못할거야 민주노총 총파업 못할거야를 생각 해두고 판단하기 때문에, 조직을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조합원들은, 간부들의 판단과 내용들이 잘 알려지고, 또 간부들이 그것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할 때 따라주거든요. 우리 조합원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해왔기 때문에, 저는 우리 조합원들을 믿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