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내를 기록하다 ② 네 번에 걸쳐 전노협백서 초판본 발행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전노협백서 초판은 본권 7권, 부록 5권으로 구성되었다. 13권을 예정했으나 인명사전인 11권은 끝내 발간하지 못했다. 본권은 전노협 전사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6년간의 활동을 연도별로 정리했다. 부록은 노동운동연표·주요 판결·구속해고자현황, 노동운동 단체 발간자료 색인, 노동운동 관련 신문기사색인, 노동운동성명서 투쟁결의문으로 구성했다. 전노협백서가 나올 때만 해도 신문기사 색인 서비스가 널리 제공되지 않았고, 노동관련 자료 전산화가 전무했기 때문에 부록작업은 중요했다. 이 구성은 8월말 실무자 전체 MT에서 짜였다. 김종배, 정경원, 김영수, 임동호, 그리고 같이 결합하게 된 이상호, 이훈구가 함께했다. 백서의 의의, 전체적인 상, 앞으로 계획을 논의하고 역할을 나눴다. 토론도 안 하고 어떻게 백서를 만드냐, 밀어붙이기 식으로 일을 한다고 될 일이냐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어쨌든 이 MT이후 심기일전하여 한 축으로는 자료를 정리, 데이터베이스화하고, 한 축으로는 집필을 준비했다. 파일로 남아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기에 원자료를 놓고 입력하는 일이 제일 먼저 할 일이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입력에 함께했다. 한 사람이 200-300페이지 입력은 기본, 백서발간팀과 인연이 있는 모든 이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고려대 학생들은 도서관에 가 일간지 6년 분량을 뒤적이며 노동관련 기사를 필사해왔다. 주요 문서를 전산화하기 위해 한 가지 시도한 일이 있는데 전노협 자료들을 스캔해 한글 파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글씨체에 따라 정확도가 달랐던 것이다. 초기 자료는 필사나 타자기 입력 자료가 많아 신명조 같은 글씨체가 아닌 바에는 수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냥 입력하는 시간보다 더 걸렸다. 기대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 빨리 포기했다. 원자료를 복사, 필요한 부분을 오려 붙여 각자 아는 이들에게 맡겨 입력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이때부터 거짓말 안 보태고 하루 11시간 이상을 꼬박 일했다. 점심, 저녁 밥 먹는 시간은 별도다. 다들 어깨가 아파 물컵을 들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백서를 만드는 재정은 전노협 사무실 보증금이었던 1억2천만 원 중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6천만 원이 전부였다. 사무실을 빼고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운영비를 따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방안이 선주문 후출판이었다. 300질을 만들기로 하고 한 질 당 15만원의 선금을 받았다. 책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믿어준 이들이 있었기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컴퓨터가 필요했다. 백서팀 재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두 대 정도였다. 이상서가 조립 솜씨를 발휘했다. 전노협에서 쓰던 것 중 제일 좋은 것 두 대를 업그레이드하고, 김종배와 정경원은 각자 돈을 내 조립하고, 신창화(치기공노조 위원장)에게 고성능으로 한 대를 조립해 팔면서 대신 백서를 완성할 때까지 우리가 쓰기로 했다. 자원봉사자 안중영은 새로 산 컴퓨터를 백서 사무실에 갖다 놓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웃음이 나온다. 제작 기간이 예정보다 길어지다 보니 재정을 바닥을 드러냈다. 자원봉사자 교통비, 한 끼에 열 명 이상이 먹는 밥값, 각종 기재 구입과 소모품비 등 벌지 않고 쓰기만 하니 대책이 없었다. 결국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보증금을 담보로 김종배 후배, 장임원, 권명숙이 기꺼이 채권자가 되어주었다. 백서 발간일을 1997년 1월 22일 전노협 출범기념일로 잡았으나 초인적 힘을 발휘해도 그때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발간일을 6개월 정도 미뤘다. 대신 성명서 투쟁결의문 모음집을 만들어 예약자들에 주기로 했다. 부록 12, 13권을 먼저 만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서를 출판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박창석, 고계형, 정재현, 정찬일, 박동민, 이호혁, 정용재(편집), 안중영은 거의 매일 와서 입력했다. 사무실을 함께 쓰던 노뉴단과 금속 서울 동지들, 백서팀을 방문했던 모든 이들이 앉아서 입력했다. 이지형, 이택승, 방승숙, 이기림, 안진웅, 천뚝, 이영현 등 기억하기도 힘든 많은 학생들이 일했다. 추운 사무실에서 5일씩 밤을 샌 이도 있었다. 백서 각 권에는 1장 사업기조와 개요, 2장 주요 사업과 투쟁으로 임금인상투쟁과 해당년도 전국적 대응을 한 투쟁을 다뤘다. 3장은 전노협 활동으로 각종 회의와 부서 일상활동을, 4장은 세계노동절, 전국노동자대회, 민중대회를 정리했다. 5장은 각 부문별 연대활동을 정리해 민중운동진영의 투쟁을 포괄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전노협을 지원하고 연대한 단체도 기록했다. 각권에는 그 해 발간한 자료 중 운동적 의미가 있는 것을 엄선해 실었다. 글을 쓰면서 아쉬웠던 것은 중요한 투쟁이라 꼭 기록해야 하는데 자료가 남지 않아 만족스럽게 채우지 못하거나 아예 삭제할 수밖에 없었을 때였다. 그렇다고 창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한 시대의 역사가 사라져버리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후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이 만들어져 한내의 뿌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백서는 네 번에 걸쳐 발간되었다. 성명서 투쟁결의문 두 권은 1997년 2월 28일에, 4월 30일에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와 [총단결 총투쟁]이, 6월 20일에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과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7월 15일에 발간했다. 백서 각권 제목은 전노협 진군가 가사를 따왔다. 97년 여름, 백서발간팀과 그동안 함께한 이들이 모여 출판기념식을 조촐하게 했다. 서로를 끌어안으며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11권 인명사전은 결국 만들지 못했다. 전노협 활동가들의 명단을 각 지역 조직에 보내 일일이 경력과 사진을 받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노동운동을 그만 둔 사람이 많았고, 연락조차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이때 아니면 80년대말, 90년대 초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섰던 이들을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없기에 일정한 기준 안에 드는 사람들을 최대한 추적했다. 기준은 전노협대의원, 연대회의나 전노대 등 관련 조직의 대표자, 전노협과 지노협 실무자 등 1200명에 달했다. 하지만 백서 출판 완료 후 1년이 지나도록 데이터가 50%정도만 모였고 발간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