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용산』, 김성희 외 지음
평범한 이들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
양돌규(노동자역사 한내 조직국장)

2009년 1월 20일, 다섯 분의 ‘철거민’의 목숨을 앗아간 경찰의 폭력 진압, 그것을 우리는 ‘용산 참사’라 부른다. ‘용산 참사’. 언론사가 조합해낸 이 용어는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말로 풀면 참혹한 사건 정도 될 텐데, 마치 그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양 교묘하게 비틀어놓거나 혹은 중립을 가장하면서 그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많은 이들이 얘기했듯이 ‘용산 참사’는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경찰의 진입 전에 이미 ‘진압 계획’과 ‘작전’이 서 있었다면 그건 더 이상 ‘참사’라 부르기 힘들다. 난 사회운동 단체들이 선전물에 채택한 ‘살인 진압’이라는 어휘가 결코 과장 같지가 않다.
용산에서의 ‘살인진압’ 문제가 타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우여곡절이 끝나긴 했지만 말끔히 해결되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무장한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정부는 협상의 배후에만 존재했다. 타결의 한 주체였던 용산 범국민대책위원회조차 타결 직후 성명서를 통해 "장례를 치른다고 해서 용산참사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고 밝혔고 미공개 수사기록 3,000쪽 공개를 요구하는 동시에 용산 살인진압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뉴타운·재개발 정책의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싸워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지난 1년간 용산과 관련한 책은 총 5종이 나왔다. 『여기 사람이 있다』(삶이보이는창),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내가 살던 용산』(보리), 『파란집』(보리), 『끝나지 않는 전시』(삶이보이는창) 여기에 용산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부정기간행물 『리얼리스트』 창간호까지 합치면 총 6종이 나온 셈이다.
그런데 용산 살인진압 문제가 타결되고 나서, 아니 용산에서의 투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망루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제대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했다. 윤용헌, 한대성, 양회성, 이상림, 이성수. 이 다섯 분은 통칭해서 ‘철거민’이거나 ‘전철연 회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인들의 이름은 ‘무명 열사’였다. 여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추모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을 덧붙이는 건 사족일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가 지난 1년간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증명해도 믿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믿든 믿지 않든, 사람은 사람이다. 그것만은 너무나 확실하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번 달에 『내가 살던 용산』을 추천하는 이유는 ‘극적 타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용산』은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이렇게 여섯 분이 그린 만화이다. 만화가 여섯 분이 각각 윤용헌, 한대성, 양회성, 이상림, 이성수 다섯 분의 삶을 다뤘다. 각각의 만화는 어떻게 이분들이 한 생을 살아오셨는지, 가족들과 정을 나누며 얼마나 행복을 꿈꿨는지, 세상이 어떻게 그 소망을 무참하게 짓밟았는지, 그리하여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망루에 올랐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망루’에서는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 망루를 다루고 있다. 만화가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취재를 했는지는 책장 갈피마다 스며 있는 그림들의 필치를 살펴봐도 느낄 수 있다. 인터뷰뿐만 아니라 용산의 풍경, 돌아가신 분들이 살았던 동네를 일일이 답사하고 취재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 그림 아니던가.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 이분들의 삶이 ‘만화’로 그려져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던 용산』은 이분들의 삶을 과장해서 미화하지도, 장엄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다른 장르였다면, 이를테면 영화 같은 것이었다면 극적으로 묘사했을 법도 하지만, 『내가 살던 용산』의 목소리는 결코 들뜨지 않는다. 그렇지만 감동의 무게는 더하다. ‘평범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인간,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철거민’, ‘전철연 회원’으로 일반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었던가. 윤용헌, 한대성, 양회성, 이상림, 이성수 이 다섯 분을 기억하지 않은 채 ‘용산 참사’를 얘기하는 건 석고상 같은 학자나 정책이나 궁리하는 정치가의 시선일 뿐이다. 『내가 살던 용산』은 이웃을 이야기하듯 생생하고 그래서 더 아픈 책이다.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마음이 메마른 어른들에게 『내가 살던 용산』을 권해보자. 청소년들에게는 이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 그렇지만 그 잔혹함을 이겨내는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메마른 어른들에게는 우리가 한때 품었던 공동체의 꿈을 위해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바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임을 일깨워줄 것이다. 그래서 힘을 모아야 ‘내가 살던 서울’, ‘내가 살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 무시무시한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