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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동잡지를 보다가 새 꼭지를 만들고 싶어졌다. 노동 과정, 투쟁 사례를 노동자들 스스로 전하는 글들이 눈에 들어와서다. 글이 쉽게 읽힌다. 영상을 돌려보듯 생생하다. 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해준다. 글쓰기를 힘겹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시간 내 따로 배우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못 쓸 일이 아니다. 선배 노동자들의 글을 보면서 노동자의 삶을 느끼고 나도 한번 써보면 어떨까. [편집자]
내 눈엔 붉은 쇳물이...
박용태 (주물공장노동자)
주물 작업이라 하면 쇠를 녹여서 모래로 만든 틀 속에 부어 제품을 만들어낸다는 것 정도는 대개들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주물공장 내부를 구경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더욱이 그런 작업장에서 실제로 일을 해보았거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충과 위험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주물 작업의 공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쇠(고철)를 녹여 모래로 만든 주형 속에 부어서 굳힌 다음 모래를 제거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그라인더로 갈아 내는 일련의 작업이 한 공장 내에서 이루어진다.
첫 공정은 쇳물을 녹이는 일인 ‘용해’ 과정으로, 용해반에서는 1400도의 뜨거운 쇳물을 다뤄야 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의 옷은 성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작은 구멍들이 심하게 뚫어져 있다. 끓어오르는 쇳물의 작은 방울들이 튀어서 생긴 구멍들이다. 쇳물이라는 것이 사람의 옷과 살을 따로 구분하는 성질이 아니라서 작업자들의 손과 얼굴에도 종종 흉터를 남기는데 심지어는 눈에 튀어 들어가 눈이 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쇳물을 쓰고나서 남은 쇳물에 고철을 넣어서 녹이고 또 부어서 쓰고 이렇게 반복되는데, 고철을 쇳물 속에 던져 넣을 때면 공장 전체가 환해질 정도로 많은 쇳물 방울들이 튀어나온다. 이때 쇳물 방울이 꼭꼭 조여맨 안전화를 뚫고 들어가는 날이면 안전화 끈을 다 풀어낼 때까지 자기 발이 타는 냄새를 맡아야 한다. 이러 위험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해야 하는 작업자들이 하는 일은, 무게 10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쇠스랑을 들고 쇳물 위에 떠오르는 이물질을 걷어내고, 녹여야할 고철이 빨리 녹도록 오함마(5파운드짜리 쇠망치)로 잘게 부수는 일, 쇳물 속에 다른 첨가물을 투입하는 일 등인데, 이들은 무거운 쇠스랑을 들고 하루종일 뜨거운 쇳물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종일 함마질을 해서, 땀을 흘리는 양이 보통 사람의 4-5배는 족히 된다. 특히 여름철에는 옷입은 채 물에 빠진 사람처럼 옷이 땀에 흠뻑 젖게 된다. 이렇게 덥고 힘든 일을 하고 나면 퇴근할 때쯤엔 거의 탈진상태가 되는데, 그렇다고 보신탕으로 몸보신하고 영양보충이라도 할 정도의 월급이나 받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이렇게 가혹한 작업환경 외에 그들을 위협하는 다른 조건들이 더 있다. 우선 분진이다. 주물공장의 먼지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먼지라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상상정도를 초월한다는 점이 문제다. 전체 공장이 안개 낀 것처럼 뽀얗게 되어서, 날씨가 우중충하거나 바람이 안 부는 날이면 몇십 미터 거리의 사람도 잘 식별하지 못할 만큼 심할 때도 있다. 이 먼지는 한꺼번에 발생하고 사라져 버리는 먼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맴도는 먼지라서, 작업자는 하루종일 먼지를 마시면서 노동할 수밖에 없다. 주물 공장에 오래 근무한 사람 치고 가래와 흉부 통증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 먼지는 노동자들의 허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간다. 이렇게 나빠진 허파 속으로 더 첨가되어 들어오는 것이 있으니 바로 유해가스이다. 쇠를 녹일 때와 쇳물 속에 다른 첨가물을 넣을 때, 모래로 된 틀(주형) 속에 쇳물을 부어 넣을 때면 다량의 유해가스가 발생하는데, 이들은 탄산가스와 아황산가스,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하여튼 마셔야 하는 가스들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방지 시설은 거의 없는 실정으로, 작업자들 간에선 서로를 이동식 집진기라고 부른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집진기가 미비하여, 기계를 대신하여 우리들이 먼지와 가스를 마셔 준다는 데서 붙인 자조적 별명이다. 이 가스를 많이 마시면 호흡기 계통에 장애가 온다는 경고판이 회사가 설치한 최대의 안전장치이다.
이렇게 녹인 쇳물을 주형 속에 넣어서 굳히면 주물품이 되는데, 쇳물이 응고한 후 모래를 털어 내는 곳은 먼지와 소음의 최다 발생지라고 할 수 있다. 주물품은 아직 시뻘건 쇳덩이로 작업자의 몸은 더워져 땀이 흐르고 땀은 그곳에서 나는 먼지와 뒤섞여 몸 전체에 모래층을 쌓게 된다. 쉴새없이 상하로 진동하는 쇠판 위에 주물을 얹어서, 진동에 의해 모래가 떨어지게 하는데,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기계 바로 옆 사람과의 대화도 불가능할 지경이며, 소음 때문에 온종일 그곳에서 일하고 나면 저녁에는 골이 아프고 그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먼지, 소음, 고열 등 악조건의 극치인 공장에서 여름이라고 설치하는 방지 시설이란 선풍기과 염분 보충용 소금통이다.
이 작업 공정을 거친 주물품은 마지막으로 사상반에서 제품의 불필요한 부분을 갈아내는 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때 주로 사용하는 공구는 그라인더로, 철공소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여러 모양 여러 크기의 그라인더를 사용한다. 이 그라인더들은 1분에 3천-4천번의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며 쇠붙이를 갈아내는데 이때 갈려지는 쇠붙이의 작은 가루들이 마찰열에 의해 빨갛게 단 상태로 튀어 나온다. 뜨거운 쇳가루가 급속도로 눈에까지 튀어들어갈 대도 많다. 눈에 박힌 쇳가루는 동료 작업자들이 성냥개비를 뽀족하게 만들거나 종리를 가늘게 말아서 이걸로 빼내는데, 깊이 박힌 쇳가루를 뽑아내고 나면 눈동자에 붉은 핏자국으로 흉터가 남는다. 한 한 작업자가 평균 4-5일에 한 번씩 이런 경험을 하니 당연히 시력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 부서에서 10년을 근무한 한 작업자는 4시간마다 한 번씩 안약을 넣어가며 일을 할 정도로 눈이 상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쇳가루가 바람에 날려서 들어오는 까닭에 작업자 전원의 눈이 붉게 충혈된다. 이런날 밤은 눈이 쓰려 하룻밤내 꼬박 지새우기가 일쑤다. 이보다 더 큰 위험은 그라인더 숫돌(연마석)의 파열이다. 손가락 굵기의 작은 것으로부터 두께 7센티미터 넓이 70센티미터의 큰 숫돌들이 있는데, 모두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까닭에 사용중 파괴되며 작업자에게 맞는 경우 엄청난 부상을 초래하게 된다. 한번은 그라인더 사용중 숫돌이 파열되자 파편이 두께 1센티미터 가량의 베니어판을 뚫고 꽂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람에게 맞았으면 큰 희생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숫돌의 파열은 자주 일어나는 사고로 얼굴을 찢고나 배에 피멍이 들게 하거나 보안경을 깨고 눈 주위에 박혀서 상처를 입히는 등의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보호구라는 게 가냘프기 이를 데 없다. 보통 안경보다 더 얇은 보안경이라니.
이렇게 많은 악조건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회사는 여러 종류의 보호구 착용으로 환경의 열악함을 대비하고 있어 우리 작업자가 작업에 임하는 모습은 흡사 우주선 조종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머리에는 안전모, 귀에는 귀마개, 눈에는 보안경, 입과 코에는 마스크, 손에는 장갑, 안전화, 토시, 앞치마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나면, 동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보기가 일쑤다. 이쯤 되면 인간의 감각기관은 모조리 통제되는데, 마치 작업시간 동안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기계처럼 일하라고 하는 회사의 주장을 듣는 것 같아 늘 속상하다.
언젠가, 언젠가는 보호구 없이 즐겁고 안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며, 충혈된 눈으로 보안경 너머 뽀얗게 가려진 저편 작업장을 바라본다.
* 출처 :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민주노동] 제4호 1984. 7.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