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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93년 6월 현총련의 ‘시기집중 공동임투’_안태정(101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7-06-22 조회 2345
 

김동섭 위원장의 ‘직권조인 소식’이 1993년 6월 5일 현대정공 현장에 알려지자 곧바로 울산 현대정공 노조는 직권조인에 항의하는 전면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현대정공 노조는 ‘임금합의서 강제날인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7일 법원에 냈다. 현총련은 6,7,8일 연달아 긴급회의를 열어서, 현대정공 앞에서 기자회견 및 현대그룹의 전 계열사 규탄집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각 노조 위원장들은 현총련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현총련은 “직권조인 불인정, 강제조인 과정 진상규명, 현총련 차원의 총력 대응 및 공권력 투입 시 즉각 대응,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주축으로 임금인상투쟁 일정과 결합하여 투쟁을 확대하며 공권력 개입의 명분축소를 위한 투쟁을 조직한다는 기본방향을 결의”했다.


1993년 6월 현총련의 ‘시기집중 공동임투’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90년대 현대그룹은 경상남도 울산에 ‘장원(莊園)’을 가진 ‘영주(領主)’같은 신분이었다. 현대그룹의 모태는 현대건설이었다. 현대건설은 1950년 1월 설립됐다. 현대건설은 ‘6.25전쟁’ 때 미군의 하청공사와 전쟁 복구사업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축적했다. (전쟁은 노동계급에겐 ‘비극’이었지만, 자본계급에겐 ‘희극’이었다). 현대그룹은 1971년 1월에 형성됐다. 1999년 8월 현대산업개발 계열이 분리되면서 그룹조직이 해체돼 갔다. (그룹 회장은 정주영1971~1987.1, 정세영1987~1995, 정몽구1996~1998.11, 정몽구⋅정몽헌1998.1~ 2000이 세습했다. 정주영은 1987~1998년에 명예회장이었다).

 

해체되기 전의 현대그룹은 각 계열사 전문경영진의 ‘독자적 권한’을 제한했다. 정주영 (명예)회장 개인의 경영방식이 그룹사의 일선 경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임금, 해고자문제 등 노조의 주요 현안문제가 ‘노사협상’에서 중대 고비에 처할 때마다 정주영 또는 그룹 차원의 개입에 의해 해결됐다. 이러한 사실을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도 경험으로 알게 됐다.

 

마침내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도 조직적으로 상호협조 또는 연대 움직임으로 대응하게 됐다. 현대그룹의 노조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기인 8월 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약칭 협의회)라는 그룹단위의 노조연합체를 결성했다. 협의회는 17,18일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9월 8일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 이영복이 현대그룹 노조들 간의 연대를 거부하면서, 자주 민주적인 협의회의 정통성을 정면 부정하는 노사협조주의 노선의 ‘현대그룹 노조연합회’(약칭 연합회)가 나타났다. 또한 협의회는 현대그룹의 폭압적 탄압으로 9월 이후 조직력이 급격히 와해됐고, 10월 권용목 협의회 의장이 구속되면서 유명무실한 조직이 됐다. 한편, 정주영 명예회장 직속의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에 의한 ‘중앙통제적 지배질서’는 여전히 유지됐다. 이에 대응하여 1989년 말부터 현대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주도하여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 간의 협의회 재건작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현대그룹의 노조들은 1990년 1월 11일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약칭 현총련)을 결성했다. (현총련은 1998년 '현대그룹 노조협의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1년 해체되고 산별노조로 결합됐다). 현총련은 현대그룹 산하의 25개 계열사 노조와 17만여 명의 조합원을 가진 연대조직이었다. 현총련이라는 명칭은 이전의 ‘협의회와 연합회’를 절충한 것이었다. 이념적인 경향으로는, ‘자주 민주적’인 성격과 ‘노사협조주의적’ 성격이 뒤섞인 것이었다. 현총련이 만들어진 지 얼마 뒤인 1월 22일에, 기존의 노사협조주의적인 한국노동조합총연합(약칭 노총)에 대립하는 자주 민주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가 조직됐다. 그 뒤 현총련은 조직적인 경향으로는, ‘친노총적’인 성격과 ‘친전노협적’인 성격이 혼합된 조직이 됐다. 현대그룹은 현총련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하여 현대노동자들의 투쟁을 위한 단결과 연대를 깨뜨리려고 했다. 이것은 뒤에서 보듯이 일부 현총련 의장의 ‘직권조인’ 사태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은 노동계급과 자본계급(민간자본과 국가자본)이다. (물론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은 그 기둥 역할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당시 현대그룹은 민간자본의 대빵 격이었고, 1993년 2월에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모든 사람과 관련된 사항을 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의 조직적 형태인 국가자본(자본계급의 국가권력)의 대빵 격이었다. 이러한 자본계급에 대립하는 노동계급은 조직적으로는 현총련과 더불어 전노협 등이 있었다.

 

1993년 2월 13, 14일 현총련의 제3차 대의원대회는 제4기 체제(의장 김동섭 현대정공 노조위원장)를 출범시켰다. 대의원들은 ‘93임투에 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여 1993년 임투를 ‘시기집중 공동임투’로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현총련의 1993년 공동임투 결의는 자본계급(현대그룹과 김영삼 정부)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현총련은 “형식상 교섭상대자는 각 계열사 사장들이지만 실제 결정은 그룹 총수에게 달려 있고 그 결정 또한 정부의 4.7% 임금가이드라인이 절대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룹, 정부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의 1993년 임투의 임금인상 목표액은 통상 최저 13.07%(현대미포조선 노조)에서 최고 20.13%(현대종합목재 노조) 사이였다. 즉 현대그룹 노조들의 임금인상 요구액은 자본계급의 임금가이드라인 4.7%의 약 2.7배에서부터 약 4.7배까지 높았다. 현총련은 이러한 임금인상 목표를 획득하기 위하여 1993년 3월 12일 경인, 울산지역 23개 현대 노조들이 참석한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앞서 2월 13일 선언한 대의원대회에서의 ‘임투에 관한 특별결의문’에 근거하여 ‘시기집중 공동임투’ 일정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93년 전 계열사의 임금요구안은 자체적으로 준비, 늦어도 3월 31일까지 완료한다. 둘째, 각사는 4월 15일 이전까지 임금교섭에 들어간다. 셋째, 각사는 5월 14일 한시에 동시 쟁발신고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정에 따라 실천한 노조는 25개 현대그룹 노조 가운데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현대강관, 현대중장비, 현대중전기 정도밖에 없었다. 그것은 현총련의 1993년 공동임투 전선을 와해시키기 위한 사측의 교섭기피와 각사 노조 내부의 문제(친노총적인 입장과 친전노협적인 입장의 갈등문제도 있었다고 추측됨) 때문이었다.

 

공동임투에 나선 현대 노동자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총련은 1993년 5월 정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쟁의발생 신고 결의기간을 5월 24일부터 29일까지 다시 ‘시기집중’ 하기로 조정했다. 이를 위하여 현총련은 5월 22일 ‘93 공동임투 승리를 위한 현총련 임투전진대회’를 울산 일산해수욕장에서 개최했고, 28일에는 공동임투 승리를 위한 현총련 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5월이 지나도록 공동임투의 진전은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현총련의 1993년 ‘시기집중 공동임투’를 급격하게 고양시키는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당시 현총련 의장인 현대정공 노조위원장 김동섭의 ‘직권조인’ 행위였다. (현대정공은 1977년 6월 25일 설립됐고 2000년 11월에 현대모비스로 바뀌었다). 그는, 6월 4일 제14차 임금 교섭이 결렬된 후, 사측이 제시한 2만 7,600원(4.7%) 인상안에 합의하는 직권조인을 했다. 이로써 1990년 1월 현총련이 결성된 후 1993년 6월까지 역임했던 4명의 의장 가운데 3명(제1기 이상범 현대자동자 노조위원장, 제3기 이원건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 제4기 김동섭 현대정공 노조위원장)이, 노동계급이 자본계급에 협조하는 ‘노사협조주의적’인 직권조인을 했다. 이것은 현총련의 성격 가운데 부정적인 ‘친노총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외인(外因)은 내인(內因)을 통해서 관철되듯이, 현대그룹은 현총련 일부의 친노총적인 성격을 이용해 주력 계열사 노조들(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의 위원장이 직권조인 하도록 유도해 1990년과 1992년의 공동임투를 무너뜨린 공작을 다시 써먹은 셈이었다. 그러나 1993년의 경우에는 현대그룹의 이러한 공동임투 붕괴수법이 먹혀들지 않았다. 1990년과 1992년의 직권조인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 이번에는 조합원들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했을 것이다.  

 

 

*<54일, 그 여름의 기록 : '93 현대정공 직권조인 무효화 투쟁기>, 감독 홍형숙⋅홍효숙, 제작사 서울영상집단, 1993.


그리하여 김동섭 위원장의 ‘직권조인 소식’이 1993년 6월 5일 현대정공 현장에 알려지자 곧바로 울산 현대정공 노조는 직권조인에 항의하는 전면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현대정공 노조는 ‘임금합의서 강제날인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7일 법원에 냈다. 현총련은 6,7,8일 연달아 긴급회의를 열어서, 현대정공 앞에서 기자회견 및 현대그룹의 전 계열사 규탄집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각 노조 위원장들은 현총련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현총련은 “직권조인 불인정, 강제조인 과정 진상규명, 현총련 차원의 총력 대응 및 공권력 투입 시 즉각 대응,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주축으로 임금인상투쟁 일정과 결합하여 투쟁을 확대하며 공권력 개입의 명분축소를 위한 투쟁을 조직한다는 기본방향을 결의”했다.


6월 10일에 울산현대정공 노조는 전 조합원의 95.97%로 쟁의행위를 결의하고, 17일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또한 창원현대정공 노조도 6월 7일 쟁의대책위원회 발대식 및 규탄대회, 6월 9일부터 상집위원 전원 철야농성 돌입, 6월 10일 규탄집회 및 기자회견 이후 정문투쟁 등을 실시하였고, 전 조합원들은 6월 11일부터 머리띠 착용, 안전작업, 분반토론, 본관 화장실 이용하기, 고품질향상운동 등 준법투쟁을 전개하였다. 6월 12일 현총련은   울산 태화강 고수부지에서 영남지역 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어 연대투쟁의 열기를 뜨겁게 했다. 이에 창원현대정공 노조의 투쟁기운도 높아졌다. 그리하여 6월 16일 전 조합원의 93.6%로 쟁의행위를 결의하고, 6월 17일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현대자동차 노조도 15일 전 조합원 87.15%로 쟁의행위를 결의하고, 16일에 2시간 파업을 벌였다.

 

현대정공 노조위원장의 직권조인 사태를 계기로, 임금교섭 중이던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이 1993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연달아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해 81.6%~95.97%의 찬성으로 쟁의행위 결의를 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7월 2일에 85.7%로 쟁의행위 결의를 했다). 이렇게 현대그룹 계열사 12개 노조(울산현대정공, 창원현대정공, 현대중장비,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강관, 현대종합목재, 현대미포조선, 현대프랜지, 현대중공업, 현대철탑, 현대로보트)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현총련의 ‘시기집중 공동임투’ 대열에 합류했다.

 

한편, 국가자본(김영삼 정부)은 현대정공 노조의 6월 5일 총파업을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사용하려고 생각했지만,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 전체가 전면파업을 벌이는 상황이 생길까봐 유보했다. 이미 국가자본은 1993년 5월 6일, 경주 아폴로 노조 단체협약 갱신투쟁에 ‘폭력’을 투입했었다. 이에 맞서 아폴로 노조가 전면파업을 하고 지역노조들이 적극적 연대투쟁을 벌여 승리를 따냈었다. (이것은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에게는 고무적인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국가자본은 ‘폭력’ 사용을 유보하는 대신에 1993년 6월 21일에 ‘노사관계 안정을 위한 당부말씀’이라는 담화문을, 국가자본을 운영하는 이른바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경식, 상공자원부 장관 김철수, 노동부 장관 이인제의 명의로 발표했다. 다음날인 22일에는 이인제가 울산에 왔다. 그는 현대정공 노조와 현대자동차 노조를 방문하고 ‘노사관계 안정’을 위한, 즉 자본계급이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사자율’이라는 ‘노사협조주의’를 주문했다. 이때 일부 노조간부들은 “장관님! 파이팅”이라고 입을 모아 합창했다고 한다. 실소를 금치 못할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2017년 요새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계급의 정당인 민주당과, 그 정당 소속인 대통령 등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몰계급적’인 태도와도 겹쳐진다). 


그 이후에도 역시나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그룹의 기본방침에 따라 “4.7% 이상의 임금인상은 통치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민간자본과 국가자본은 일심동체라는 것을 보여줬다. 때문에 임금협상은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들의 조합원 4만여 명은 현총련이 1993년 6월 30일 일산해수욕장에서 개최한 ‘시기집중 공동임투’ 결의대회에 참가하여 1993년 임금인상 목표액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결의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리고 결의대회는 7월 2일부터 6일까지 4차례 만날 것을 현대그룹에 공개 제안했다. 또 결의대회는 이 제안에 대해 현대그룹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을 때는 7월 6일 이후 총파업을 포함한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이 투쟁은 7월로 이어집니다.)

 

 

* 이상은 이수원, 『현대그룹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도서출판대륙, 1994; 김하경,『내사랑 마창노련 하』, 갈무리, 1999; 김영수․김원․유경순․정경원, 『전노협 1990~1995』, 한내, 2013 등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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