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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으로 가는 내나라 : 구로공단(1) _ 서동석 (30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05-11 조회 1122
 
<가슴으로 가보는 내 나라>
 
공장굴뚝의 연기는 사라졌지만 노동자의 시름은 여전한 구로공단
서동석
 
양회(시멘트)로 덮은 공장바닥은 한여름 땡볕으로 달궈졌습니다. 맨흙바닥이라면 차라리 나을 성 싶었습니다. 다음번 소금차가 들어올 때 까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공장 벽 그늘에 숨어 말 그대로 진짜 줄줄 흐르는 소금땀을 닦아내고 공장바닥만큼이나 달궈진 몸의 열도 식혔습니다. 벌컥 들이마시는 한 사발의 물이 그리 달 수 없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천항에서 소금을 가득 실은 12톤 트럭이 공장 문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네모나고 넓적한 삽, 그걸 현장에서는 오삽이라고 합니다만, 그 삽을 어깨에 메고 후끈 거리는 공장마당으로 나섭니다. 트럭은 소금이 동산처럼 쌓여진 야적장에 들어섭니다. 잽싸게 차에 올라 야적된 소금동산에 퍼 붑니다. 동산의 높이가 그만큼 높아집니다. 차 한 대에 네 명이 달라붙어 그 작업을 합니다. 우리는 소금 하차꾼입니다.


 
<줄지어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아파트형공장지대로 빨려 들어간다. 사진=서동석>

서울 고척동에 있는 약품에 임시직으로 고용된 노동자입니다. 이 회사는 염산 만드는 공장입니다. 소금은 호주에서 들여온다고 했습니다. 호주는 소금을 바다에서 만들지 않고 광산에서 캔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게 들여온 소금을 물에 녹여 전기분해를 해서 염산을 만듭니다. 역시 화학시간에 이 화학방식을 배웠지요. 소금의 화학이름인 염화나트륨을 물에 녹이면 염산의 화학기호인 에이치씨엘(HCl)이 나온다고요.
그때가 1974년인가 아니면 75년일 겁니다. 고기잡이배의 일꾼이 되려고 인천에서 어슬렁거리다 어찌 성사되는가 싶었는데 할머니의 결사적인 반대로 뱃놈은 포기하고 땅바닥에 발붙이고 살아가고자 공장을 수소문하다가 이 회사에 임시직으로 들어왔습니다. 동네 아는 분의 소개로 그 이와 같이 다녔습니다. 게으름 피지 않고 열심히 일 했습니다. 뭐 그리 골치 썩히는 일이 아니고 그저 몸으로만 때우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채 한 달도 못했습니다. 낮엔가 저녁에 그 염산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스를 대기에 그냥 배출하는데 이게 보통 독한 게 아닙니다. 이때는 소금하차고 뭐고 다 때려 칩니다. 바람 부는 방향을 살펴 소금야적장의 파인 골에 코를 막고 숨습니다. 바람이 그 독하디 독한 가스를 실어가고 나면 다시 차에 올라 소금땀을 쏟습니다. 처음엔 좀 견뎌보자 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이 일은 못하겠더라구요. 아직 배가 덜 고팠을까요.
염산공장을 그만두고 건설 공사판에 다녔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중동바람이 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 덕으로 돈을 번 남한의 건설회사들이 이번엔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바람에 실려 오는 달러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습니다. 1961‘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이 가난한 나라가 살 길은 오로지 수출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우게 하고는 안되면 되게 하라군바리정신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공장을 짓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굴욕을 감수하며 일본과 협정을 맺었고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이 나라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 일자리를 만들어 외화를 벌게 하였습니다. 뭐든 돈이 된다면 가릴 게 없었지요. 젊은 아낙네의 머리카락까지 고물로 사들여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으니까요. 그 가발의 질이 너무 좋아 선진국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든가.
나도 그 중동바람에 편승하려고 건설회사에 이력서를 냈습니다. 그때 얼마나 중동에 가려는 노동자가 몰렸는지 건설회사는 브로커를 두고 인력을 뽑았습니다. 이력서를 낸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브로커라는 인력중개자의 손을 거쳐야 이력서가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이 중개에는 적당한 권리금, 뒷돈을 바쳐야 했습니다. 건설회사 인력담당이 직접 챙기면 뇌물이 되니까 거의 공식적으로 거간꾼을 두어 가난한 노동자의 돈을 뜯어가는 거지요. 그렇게라도 중동에 가려는 이들이 몰려드니 그 뒷돈의 액수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어쨌든 나도 그 대열에 끼었습니다만 마침 그 건설에 집안의 아는 형님이 있어 뒷돈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형님은 마침 국내에 건설현장이 생겼고 그것도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중동 가기 전에 이 현장에서 기술을 익히라고 하여 그 회사가 짓는 공사현장의 잡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다니던 공장. 사진=서동석>  
 
현장은 구로2공단에 있었습니다. 공사하면서 어떤 때는 목수일도 하고 미장일도, 또 용접도 했습니다. 일손이 부족하면 내가 보태주었습니다.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는 중동에 나가기 위해 이력서를 낸 노동자의 기능정도를 가름해보는 시험도 있었습니다. 회를 발라 본다든가 벽돌을 쌓는 기능을 현장소장이 지켜보고 점수를 매겨 회사에 통보하였습니다. 공사는 일 년이 약간 넘게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중동에 갔다 온 노동자의 경험도 직접 들었습니다. 사막의 건설현장에는 온갖 재해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쪽 눈을 잃은 이가 다시 중동에 나가려고 내가 일하는 현장의 소장을 찾는 이도 있었습니다. 소장이 을 써주기 바란 거지요. 그런 이들의 사연과 행동거지를 보니 중동에 갈 마음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차라리 짓고 있는 공장에 취직하는 게 낫다 싶었지요. 그래 공장을 다 지어갈 즈음에 그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공원이 되었습니다. 특수한 발부(수도꼭지)를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특수하기도 했거니와 크기도 일반수도꼭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회사는 미국계 회사였습니다. 미국 휴스톤에 본사가 있는 다국적회사였습니다. 내가 맡은 일은 제품검사였습니다. 인천에 있는 주물공장에서 들여온 발부주물을 밀링에서 깎아내고 거기에 선반에서 가공한 부품 따위를 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제품이 만들어지면 그걸 수압검사기계에 걸어 새는 곳이 있나 없나, 제품의 상태는 어떤가를 검사하여 쇠도장(펀치)을 찍으면 완제품이 됩니다. 작은 발부의 무게는 10킬로그램 정도지만 큰 제품은 1톤이 넘게 나갑니다. 제품은 주로 거대한 유조선이나 화물선의 파이프라인에 들어갑니다. 수돗물을 거르는 정수장에도 들어갑니다. 수출도 합니다. 달마다 말일쯤에는 일감이 밀려 잔업을 하고 어떨 때는 철야작업도 합니다. 일요일도 없이 일할 때가 많았습니다. 솔직히, 잔업이나 특근을 하면 수당이 더 많아 적절하게 일감을 조정해서 부러 월말로 미뤄놓습니다. 쇠 깎는 공장이다 보니 밤샘작업이 위험하지만 돈을 벌려면 감수해야지요. 어느 겨울에는 선반 반장이 한쪽 손의 손가락을 죄 잃는 산재도 있었지만 재수라 여기며 여전히 기계 앞에 서야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공장마당에서 공놀이나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가 다시 일하러 공장 안에 들어갈 즈음에 우리 공장에서 좀 떨어진 전자회사의 여성노동자들이 떼거리로 몰려갑니다. 마치 가까운 곳에 여자학교라도 있는 듯합니다. 3교대로 일하는 회사에 출근하는 여성노동자들입니다. 3교대는 아침6시에 교대하고, 2, 10시에 교대하는 제도입니다. 온종일 공장은 쉴 새 없이 가동되는 거지요. 그 회사 역시 다국적회사였지요. 그 공장에 근무하면 참 좋겠다는, 실없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온통 시커멓고 기름에 절은 사내놈들 투성이 공장보다 예쁜 여성노동자들이 수두룩한 공장이라서 말입니다. 이 회사가 나중엔 기륭전자로 바뀝니다. 얼마 전까지 무려 2천일 가까이 파업과 점거, 단식 등의 투쟁으로 마침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승리로 매듭진 공장 말입니다.
구로공단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 가족은 구로동으로 이사 와서 살았습니다. 얼마 뒤 구로동에 이 나라 최초로 산업단지가 만들어집니다. 서울 대방동에서 갈라져 안양, 수원을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1번국도에서 대림천이라는 개천을 건너면 오른쪽에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납니다. 그 언덕은 밭이었고 그 너머엔 논도 있었고 자연부락도 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며 순박하게 산 원주민입니다. 이곳에서 가리봉으로 넘어가는 언덕엔 공동묘지도 있었습니다. 1번국도 너머 맞은편에는 군부대의 탄약창고가 있었고 그 뒤로는 역시 야산과 농토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곳이 산업단지로 지정되면서 원주민은 갑자기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습니다. 수출이 살 길이라 정한 국가의 정책이니 군말 말고 나가라고 협박했습니다. 못 간다고 하자 논이고 밭이고 병을 깨트려 그 바닥에 낭자하게 깔았습니다. 농토에 아예 발을 딛지 못하게 하려는 순 양아치짓을 한 겁니다. 그리고도 말을 듣지 않자 사기꾼으로 몰아서는 구속 시켰습니다. 그렇게 국가가 착한 농사꾼을 등쳐 공단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탈단지역(옛 구로공단역)에서 구로3동에 이르는 부지는 그렇게 해서 구로1공단이 됩니다.
탄생부터 착하고 가난하며 힘없는 민중의 아픔이 서려 있어 그럴까요, 공단이 만들어지고 이곳에 공돌이 공순이가 모여들면서 강가의 조약돌처럼 밤하늘에 깔린 별만큼이나 노동자의 아픈 이야기가 무수하게 생깁니다. 이야기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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