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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선봉노조단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투쟁(1995년)
선봉노조단 구성 취지
인천지역 1995년 임단협투쟁은 민주노총을 건설과 함께 산업별 노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역적으로는 전 기간에 걸쳐 실천적인 공동사업과 공동투쟁을 전개해 인천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인노대)를 강화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체 임금인상 투쟁 전선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선을 지켜낼 중심사업장 조직이 필요했다. 이에 인천지역에서는 중심사업장의 공동투쟁을 조직해 지역노조의 교섭력을 높여내고 주변 노조들을 지원하며 적절하게 촉발되는 투쟁을 배치한다는 취지로 선봉노조단을 구성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함께 투쟁함으로써 투쟁의 성과가 단위노조뿐만 아니라 인노대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선봉노조단은 공동의 사업을 통해 지역의 임금인상 투쟁 분위기를 형성하고 사기를 최대한 집중시키며 공동임금인상 투쟁의 성과를 모아 이후 지역의 중심지도력 형성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세워, 다음과 같은 공동 규율을 채택했다.
첫째, 시기를 집중한다.
둘째, 월·토요일은 무교섭일로 한다.
셋째, 쟁의발생 결의, 파업 찬반투표 일시를 최대한 동일하게 한다.
넷째, 최대한 타결 시기를 맞추고 불가피할 때에는 협의한다.
다섯째, 단위사업장 확대 간부 혹은 상임집행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중심노조에 결합한다.
여섯째, 교섭 후 즉각 상황실에 결과를 보고한다.
일곱째, 단위노조의 모든 일정은 중심노조 일정과 겹치지 않게 한다.
여덟째, 타결의 원칙을 지킨다.
아홉째, 조합원 총회를 통해 타결한다.
열째, 타결 후 소급분의 일정부분을 공동투쟁 기금 혹은 민주노총 건설기금으로 결의한다.
열한째, 타결이 되더라도 중심노조 해산까지는 제반 사업을 함께 한다.
열두째, 각 노조에 대한 탄압시 적극적인 공동 연대투쟁을 조직한다(위원장 지지방문, 격려대자보, 동시다발 규탄집회, 확대간부 농성 등).
투쟁의 준비기
인노대 운영위원회(4.17)에서 한라노조 위원장이 중심노조 조직에 관해 제안하고, 운영위원들이 동의함에 따라 선봉노조단 구성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차 준비모임(4.19)에는 한라, 아남, 동흥, 한양, 대원(주안), 대우중공업 노조가 모여 중심노조 조직에 관한 취지, 의의, 목표를 논의하고 전진대회에 모범적으로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인노대 대표자회의(4.24)에서 동서, 린나이, 진흥, 현대페인트 등의 노조가 추가 추천됐으며, 2차 준비모임(4.24)에 한라, 동흥, 한양, 아남, 대원(주안) 노조가 참여해 명칭, 구성체계, 책임자, 공동 규율, 사업계획을 논의하고 수도권 노동절 집회에 모범적인 참가를 결의했다.
그리고 4월 29일 1차 대표자회의를 열어 9개 노조로 ‘선봉노조단’을 구성하고, 5월 17일 ‘1995 임단투 완전 승리를 위한 확대간부 결의대회’까지를 준비기로 설정했다.
선봉노조단은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1995년 임금인상 투쟁 기초조사 사업을 벌이는 등 준비기부터 공동활동을 모색했다. 그리고 (확대)간부들과 선봉노조단의 사업을 공유하고 단위사업장의 조건과 투쟁계획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준비기에 확대간부 결의대회를 조직하기 위해 5월 1일부터 16일까지 선봉노조단 단위사업장별 순회간담회를 실시했다. 간담회에서는 선봉노조단 취지, 의의, 규율, 시기집중, 단위사업장별 조건, 확대간부 결의대회 결의선포 내용 등을 사전공유하고 전원 참가할 것을 결의했으며 간담회는 동흥전기, 한양공영, 아남정공 3개 사업장에서 진행했다.
또 인천대 인문관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확대간부 결의대회를 열어 인천지역 선봉노조단의 역할과 임무 등에 관한 토론과 투쟁 시기 집중, 공동사업, 공동투쟁을 통한 1995년 임단협투쟁 승리를 결의했으며 아남정공, 한라중공업, 동흥전기, 한국통신 등의 투쟁 대자보를 전시하기도 했다.
제1투쟁기
5월 16일 열린 선봉노조단 3차 대표자회의에서 선발 3사인 아남정공, 대원강업(주안), 동양이화노조는 5월 말 6월 초로, 한라중공업, 한양공영, 동흥전기, 린나이코리아노조는 6월 중순으로 시기 집중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제1투쟁기에는 선발 3사의 파업투쟁과 선봉노조단의 지원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선봉노조단은 아남정공 투쟁을 계기로 지역 연대투쟁을 통해 사측에 압박을 가하면서 임금인상 투쟁 승리를 유도하고, 적극적인 3자개입 투쟁으로 공동임금인상 투쟁을 실천적으로 결의했으며,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으로 지역 임금인상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는 기조로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5월 22일에는 노동운동 탄압분쇄 공동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한 단체와의 간담회를 열어 당시 자행되던 노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의하고, 이후 선봉노조단을 중심으로 공동투쟁이 진행될 때 예상되는 노조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인노대 차원에서 단체들과 함께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아남정공에 대한 1차 지원투쟁으로 5월 31일 단위사업장별로 20여 명이 방문해 지지대자보를 전달하고,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과 연대집회를 열었다. 6월 1일 2차 지원투쟁에는 60여 명이 방문해 정문 앞에서 독자적 규탄 집회를 갖고 지지대자보와 쟁의기금을 전달했으며, 6월 2일에는 10여 명이 3차 지원투쟁을 하고 투쟁기금을 전달했다.
준비기 투쟁은 △5월 17일 동양이화 쟁의행위 결의 △5월 22일 대원강업 쟁의발생 결의 △5월 24일 동양이화 부분파업 돌입(30일까지) △5월 29일 아남정공 쟁의행위 결의 및 전면파업 돌입(6월 5일까지) △5월 31일 동양이화 잠정 합의, 대원강업 타결 △6월 3일 아남정공 위원장 삭발투쟁 △6월 5일 아남정공 타결 순으로 진행됐다.
제2투쟁기
제2투쟁기는 선발 3사의 투쟁이 마무리되고 후발 4사의 공동투쟁이 전개되는 시기로 6월 24~25일 린나이코리아와 동흥전기가 잠정 합의하기까지다.
6월 8일 4사 임원진은 연석회의를 열어 공동투쟁 전술에 대해 논의했다. 연석회의에서는 최대한 쟁의행위 찬반투표 시기를 맞추고 냉각 기간 공동투쟁 전술을 마련해 파업투쟁의 수위를 조절하는 한편 타결 시기까지 맞추기로 했다. 특히 냉각 기간 공동투쟁 전술로 소송고지 교육, 동시 출근투쟁, 깃발 릴레이 중식집회 등 다양한 투쟁을 모색했다.
6월 10일에는 ‘1995 공동 임단투 승리를 위한 인천지역 노동자 결의대회 및 문화공연’에 전 조합원이 참여해 공동투쟁의 결의를 높이고 자신감을 드높였다. 이미 타결한 사업장이나 타결을 앞둔 사업장들도 조직적으로 참여해 이후 지속적인 공동사업과 연대투쟁을 결의했다. 이날 결의대회는 한라중공업에서 1,300여 명이 참석해 결의를 밝힌 뒤 대회사(한라중공업노조 위원장), 연대사(공동대책위원회), 기조연설(안병원 위원장), 투쟁보고(아남정공노조 위원장), 선봉노조단 공동선봉대 출정식에 이어 꽃다지, 선봉노조단 공동 문화선동대 공연, 상징의식, 결의문 선포 순으로 진행됐다.
6월 18일에는 2차 4사 임원진 연석회의가 열려 냉각 기간 중의 공동투쟁 사업에 대해 중간점검하고, 6월 26일 1시간 공동파업을 결의, 공동파업 프로그램으로 조합원 대자보 교환과 걸개그림 공동제작 등을 기획했다. 6월 25일 3차 4사 임원진 연석회의에서는 동흥전기, 린나이코리아의 잠정합의안을 공유하고 한라중공업, 한양공영 노조의 이후 공동투쟁 전술을 논의했다.
선봉노조단은 냉각 기간 중 △소송고지 교육 △동시 출근투쟁 △깃발 릴레이 중식집회 등을 진행했다. 파업투쟁은 △6월 20일 한라중공업·한양공영 쟁의행위 결의, 한라중공업 4시간 부분파업(7월 4일까지), 한양공영 창원지부 파업 돌입(28일까지) △6월 22일 한양공영 인천본조 부분파업 돌입, 린나이코리아 쟁의행위 결의 및 부분파업(4시간) △6월 24일 린나이코리아 타결, 동흥전기 극적으로 잠정 합의 △6월 25일 3차 4사 임원진 연석회의(상황 공유, 타결 시점 논의) △6월 28일 한양공영 잠정 합의 △6월 30일 한라중공업 부결 △7월 4일 한라중공업 2차 투표 타결 순으로 진행됐다.
투쟁 마무리기
마무리기는 동흥전기, 린나이코리아의 잠정 합의 시기부터 선봉노조단 임원진 임금인상 투쟁 평가 수련회까지다.
선봉노조단은 실천적 공동사업·투쟁으로 지역 임단투 분위기를 선도해온 성과를 모아 ‘투쟁 기간 중 걸개그림 함께 그리기’를 파업프로그램의 하나로 택해 타결사업장과 함께 공동투쟁의 성과물로 남기기로 했다. 투쟁사업장을 중심으로 제작된 걸개그림은 여러 지역집회에서 사용해 그때마다 공동투쟁의 교훈을 각인할 수 있도록 했다. 공동 걸개그림 작업은 6월 23~25일 구상·도상 작업, 6월 26~27일 재료 구입, 28일 현장 밑그림 작업과 채색작업(한양공영), 29일 현장 채색작업(한라중공업, 동흥전기, 아남정공 결합)을 거쳐 6월 30일에 마무리했으며, 총 경비로 160만 원이 소요됐다.
7월 15~16일에는 6개 노조 24명이 참가한 가운데 임금인상 투쟁 평가 수련회를 열었다. 단위노조의 성과를 총괄하고 공동의 평가를 통해 성과와 한계를 분명히 해서 하반기 투쟁을 적극적으로 결의하기 위해 진행된 수련회는 임단투 평가 발제에 이어 4시간에 걸친 조별 토론과 전체 토론, ‘민주노총 건설과 금속산업별노조 건설 전망’에 관한 강연 등으로 진행됐다.
인노대 선봉노조단 1995년 임단협투쟁 평가
*7월 15일~16일 선봉노조단 임금인상 투쟁 평가 수련회에서 토론한 내용
인노대는 공동투쟁에 대한 단위사업장별 조건을 확인하고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순회간담회를 진행했다. 한양공영, 동흥전기, 아남정공노조가 선봉노조단 지도부와 순회간담회를 했으며, 린나이코리아, 한라중공업, 동양이화노조가 확대간부 회의를 통해 선봉노조단 사업을 공유했다.
순회간담회와 확대간부 회의를 통해 선봉노조단 구성 취지와 필요성을 공유했으며, 이 과정에서 노조 간부들은 몇 년간 침체됐던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했다. 또 인천지역의 ‘무쟁의 원년’을 깨기 위해 임금인상 투쟁 전선을 활성화하고, 공동투쟁의 분위기를 형성하여 하반기에 민주노총을 힘있게 건설하기로 결의헸다.
인노대 대표자회의에서 동서식품, 진흥정밀, 병원노련 인․부천본부 등이 중심노조로 추천됐으나, 단위사업장 조직역량과 시기 집중에 대한 단위사업장의 조건 등으로 인해 선봉노조단 노조로 함께 출범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투쟁 시기를 집중해 연대투쟁의 자신감을 회복한 선봉노조단의 공동 규율은 지역 공동투쟁에 대한 실천적 경험 부족과 기업별 노조 체계라는 조건에서 볼 때 공동투쟁의 수위로는 매우 높은 전술이었다. 더구나 단위사업장별로 이미 임금인상 투쟁 일정과 요구안이 결정된 상태에서 시기 집중을 결의하는 것은 자칫 형식적으로 진행될 우려가 컸다. 이에 선봉노조단은 조건이 비슷한 선발 3사(대원강업 주안, 아남정공, 동양이화)와 임금인상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후발 4사가 6월 초 쟁의발생 신고, 6월 중순을 쟁의행위 집중시기로 결의했다. 단위노조별로 임금인상 투쟁 일정이 결정된 상태에서 투쟁 시기를 집중하는 것은 전국과 지역 일정을 맞추고, 사측의 교섭 기피를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선봉노조단은 6월 5~10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쟁의발생을 신고했고, 6월 20일을 기점으로 단계적으로 쟁의에 돌입하게 되는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투쟁 시기 집중의 성과에도 타결 시기는 단위노조별로 진행돼 타결원칙이 지켜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타결 원칙에 있어 동양이화, 동흥전기, 대원강업 주안, 아남정공노조가 조합원 총회를 통해 임단협 타결 후 소급분의 일정액을 민주노총 건설기금과 공동투쟁 기금마련으로 결의했으며, 한라중공업, 한양공영, 린나이코리아노조는 쟁위대책위원회 또는 확대간부 회의에서 결의함으로써 임금인상 투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 규율 준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공동 연대투쟁은 아남정공 파업을 계기로 확실한 3자 개입 실천으로 발전했다. 실제 아남 사측이 지원·지지 방문한 선봉노조단 대표를 제3자개입으로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연대투쟁이 활발했다. 더불어 동양이화 파업 시 한 차례의 지원방문을 했던 것과 동흥전기노조가 타결하면서 한양공영을 지원 방문했던 연대활동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간부·조합원들의 연대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선봉노조단은 투쟁의 성과로 1995 공동투쟁을 통해 지역에서 공동투쟁 전선의 틀을 마련하고, 향후 지역에서 더욱 확대된 공동투쟁본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한 점을 꼽았다. 또 노조 간부들 스스로가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조합원들에게 공동투쟁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실천사업에서 서로를 강제할 수 있는 공동 규율의 원칙은 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 의식적인 실천이었다. 단위노조 조합원들의 연대의식이 높아져 임금인상 투쟁 분위기가 고조됐으며, 단위사업장 요구안에 대한 타결률이 높아 조직력 강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일용직 문제에 대한 인사원칙 합의와 해고자 복직은 단위사업장 및 전국과 지역적 성과였다.
그러나 문제점도 드러났다. 준비과정이 늦어짐으로써 선봉노조단과 그 외 노조의 공감대를 폭넓게 형성하지 못했다. 선봉노조단 이외의 노조에 대한 확대나 준비기 사업이 부재했다. 1995년 임단투 준비를 위한 2월 인노대 대표자 수련회에서 지역 내 임금인상 투쟁 전선을 형성할 중심노조 조직의 필요성이 제안됐으나, 인노대 주요 사업으로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선봉노조단 출범 당시 몇 개 노조를 더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단위사업장의 조건으로 조직되지 않은 것도 원인이다. 중심노조 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사전 비공식 논의와 선봉노조단 구성을 위한 인노대 체계에서의 공식 논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해 인노대와 별도의 조직을 꾸리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중심노조 조직에 대한 지도부 내 이견이 존재했으며, 이를 해소하려는 논의 과정이 부족했다.
또 인천지역 전체 임금인상 투쟁 분위기를 활성화한다는 목표에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주변 노조, 즉 투쟁시기가 비슷한 노조들과의 공동사업이 부족했다. 준비과정이 늦어지면서 공동투쟁을 하기 위한 단위사업장의 조건과 꼭 쟁취해야 할 주요 쟁점 등의 공유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임단협 타결 시 단위사업장의 판단에 맡겨져 타결원칙이 지켜지지 못한 측면도 있다. 특히 대중과 노동자의 공동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회개혁 투쟁에서 핵폐기장 설치 반대 투쟁 이상으로 확대하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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