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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의 역사
..... 반공청년운동기념비가 세워진 곳_정경원 (103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7-10-20 조회 981
 

6월에 서울지하철노조 청년 조합원들과 함께 남산과 명동성당 역사기행을 했다. 노조가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노조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사업이었다. 돌아볼 곳 중 하나로 반공청년운동기념비를 잡았는데 그 두 가지였다. 도처에 남아있는 반공, 반노동자 유적을 뒤집어 읽어보자는 것과, 우리의 역사를 알리는 곳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자는 의미였다. 비석 위에 <탄핵을 탄핵한다>는 책이 올려져있었다. 박근혜 변호인단이었던 김평우가 쓴 글이다. 이 비석은 몇십년 전에 세워진 돌덩이가 아니라 현재도 기억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남산 중턱에 세워진 반공청년운동기념비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한내는 제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제주4.3역사기행을 6년 이상 해왔고 사북 노동자 역사 기행도 했는데 정작 서울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없었다. 올해는 서울 코스를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 서울지하철노조에서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자 노조 창립 30주년 기념 청년조합원 서울역사기행을 해보자고 제안해 남산과 명동성당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서울지하철노조 투쟁의 역사에서 명동성당은 중요한 공간이고, 정치적 변화에 따라 직접적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는 노동조합이라 남산을 통해 한국 정치사를 대략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남산 돌아보기 코스 중 오래 머물며 이야기를 나눴던 곳은 두 군데다. 하나는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로, 이후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고 70년대에는 정신교육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던 공간에서 국가권력의 형성과 공간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점심 식사 후 찾아간 곳이 반공청년운동기념비가 세워진 곳이었다. 그늘이 있는 널찍한 자리라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기념비를 보러 간 이유는 도처에 남아있는 반공 반노동자 유적을 뒤집어 읽어보자는 것과 우리의 역사를 알리는 곳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자는 의미였다. 마침 비석 위에 <탄핵을 탄핵한다>는 책이 올려져있었다. 박근혜 변호인단이었던 김평우가 쓴 책이다. 이 비석은 몇십년 전에 세워진 돌덩이가 아니라 현재도 기억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해방 전후, 어쩌면 반공이라는 말조차 실감하지 못할 청년 노동자들이지만 과거가 현재와 맞닿아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비문 앞면에는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거창한 문구가, 뒷면에는 해 돋는 동방의 나라 / 아름다운 내 조국 / 화랑의 얼을 이어받은 너와 나 / 피와 사랑으로 얽힌 동지여~”라는 절절한문구가 새겨있다. 비문은 이은상이 썼다

 

 

 

 

 반공청년운동기념비 뒷면

 

 

 반공청년운동기념비건립비 옆면 - 건립주최와 일자가 새겨져있다.
 

 

  필자가 청년 노동자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옆에 세워진 반공청년운동기념비건립기였다.

 

해방 후 수많은 청년들이 전국에서 일어나 공산당과 항쟁하여 새 나라의 터전을 닦고 그 피 위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과 함께 전국 청년들은 대한청년단으로 뭉쳤다가 1953년 정부의 정책으로 해산되었다. 어느덧 10년이 지나 19631010일 옛 동지들이 다시 모여 청우회를 결성하고 반공투쟁의 빛나는 역사를 길이 기념할 겸 이 나라 청년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반공청년운동기념비 건립을 결의했었다. 뜨거운 정열과 불굴의 기백을 상징할만한 고금에 짝이 없는 거대한 비석을 세우고자 돌을 찾아서 이산 저산 몇 해를 헤매던 끝에 마침내 보령군 미산면 개화리 풍계산에서 뜻맞는 큰 돌을 발견하니 1967년 가을 김판석 동지의 사재로써 이것을 구해왔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남산 언덕에 자리를 잡고 196866일 기공식을 거행한 뒤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기금을 삼고 김성곤 의원 등 각계 유지들의 성금을 모아 이 거룩한 역사적 사업을 깨끗이 끝마쳤기 여기에 대강 그 내력을 적는 바다.

 

반공청년운동기념비건립기에 기록된 내용 중 대한청년단의 활동과 1953년 정부정책에 의한 해산, 1963년 청우회 결성 배경, 1968년 하필 이때 비석을 세우게 된 배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승만은 정권 창출 과정에서 청년단체의 반공 활동을 적극 활용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우리가 잘 아는 서북청년회(1946.11.30.결성)였다. 이들은 서울역 앞에 안내소를 설치하고 북에서 내려온 젊은이들을 숙식과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며 모집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대북활동과 좌익소탕이었다. 좌익 소탕을 위한 활동은 대학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공장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경찰 요청으로 제주에 파견되어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40여 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이후 청년단체 일원화와 유사 시 국군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했다. 행동대의 역할을 마무리한 후 권력의 통제 하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북청년단이 부활을 시도하는 등 독자행동을 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이승만은 19539월 대한청년단 해산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서북청년단은 박정희 정권과 함께 다시 부활해 1963년 청우회 결성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원조로 유학한 이들, 군에서 뿌리를 내린 많은 서북 출신들이 한국사회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활을 알리며 기념비를 건립한다. 기념비가 세워지던 즈음 상황은 어떠했나. 19681월 김신조 등 31명이 박정희 목 따러 왔다며 청와대 문턱까지 내려왔고, 11월에는 울진삼척에 120명의 공비가 출연했다. 세계적으로는 자유를 외치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으니 이럴 때 전쟁의 공포를 다시금 불러와 권력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반공기치를 높여야 할 때였던 것이다.

남산에 이런 기념비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내는 이가 많을 거다. 굳이 가봐야 하냐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기념비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 그냥 지나치지 말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많은 것이 바로 역사고 현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역사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다.

 

 

참고: 윤정란(2015),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존슨 너새니얼 펄트(2016), <대한민국 무력정치사>, 현실문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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