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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 시기 : 1987년 7월 26일 ~ 8월 12일
7월 26일 결성된 ‘대우중공업 원직복직 추진위원회’의 연대투쟁 준비와 8월 4일에 시작된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의 파업은 마침내 창원, 인천, 영등포, 부곡 등 4개 공장 전체의 연대파업으로 확산됐다. 인천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인천지역 대우그룹 투쟁의 도화선이었으며, 전체 인천지역으로 투쟁을 확산시켰다.
7월 23일, 회사측에서 사무직 임금은 5.35% 재인상하고도 생산직 임금을 동결하자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7월 26일에 있었던 ‘대우중공업 원직복직 추진위원회’의 결성을 통해 가다듬어지고 준비되어 대우중공업노조 집행부로 하여금 공청회를 개최하도록 촉구했다. 8월 4일 창원공장 노동자들이 집행부의 타협적인 자세를 거부하고 △임금 5만 원 인상 △연간 보너스 600% △해고자·강제부서이동자 전원 원직복직 △현 취업규칙 폐지하고 단체협약에 의거 새로 정할 것 △현 집행부는 각성하여 즉각 투쟁에 돌입할 것 등 11개항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인천공장 집행부는 ‘임금 2만 원 인상’ 등 3개항의 요구를 내걸고 8월 6일 협상에 들어간다고 공고했다.
8월 5~6일, 양일에 걸쳐 인천공장 노동자 800여 명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부서별 공청회 집회를 개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는데, 8월 6일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요구조건 관철을 위해 끝까지 싸워나갈 것” 결의했고, 8월 8일에는 각 부서별로 공청회를 열어 투쟁의 방향을 결정했다. 곧바로 정문을 봉쇄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머리띠와 완장을 두른 규찰대 100여 명을 보강하여 질서 있게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8월 12일, 노동자들의 터져 나오는 열기에도 당시 집행부는 ‘임금 2만 원 인상’ 등 10개항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투쟁은 급격히 종결되고 말았다. 어찌됐건 대우중공업의 투쟁이 있고 나서 8월 10일 대우자동차, 대한화학기계, 삼익악기, 코리아스파이서, 태연물산 등 인천지역 대부분의 기업들에서 노동자투쟁이 일어나고 확대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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