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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⑳_ 국제회의에서 기립박수 받은 ‘전노협’
첨부파일 -- 작성일 2022-06-16 조회 277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국제회의에서 기립박수 받은 전노협

 

정보기관의 감시는 삶 깊숙이

국제자유노련(ICFTU) 중앙위원회가 마르세유에서 열린다고 초청장이 왔다. 한국에서 참가대상은 한국노총과 전노협이었다. 전노협 내부에서 토론한 결과 총액임금 5%에 대한 한국노총의 태도도 비판할 겸 가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여권신청을 했으나 나오질 않아 총무국에서 확인해보니, 안기부에서 붙잡고 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나면 내준다는 것이다. “안 가면 안 가지 그 짓은 할 수 없다고 버텼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전화 통화라도 한번 하잔다고 연락이 왔다. 안기부 쪽과 통화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역시 거부했다.

출발해야 하는 날로부터 이틀 전, 집으로 누군가 전화를 해서 김포공항에 여권을 맡겨 둘 테니 찾아서 다녀오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날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와서 아내에게 동호 아빠 프랑스 가냐?”고 물었다고 한다. 내가 어디 출장 간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는 터라 이상하게 생각한 아내가 그 아주머니한테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했고, 그 아주머니가 말하기를 자신이 몇 번 만난 사람한테 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명함에는 고려개발 상무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전노협 위원장이 되면서 정보기관의 감시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안까지도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열린 ICFTU 회의 참가

마르세유까지는 13시간이 걸리는데 파리 드골공항을 경유하는 비행기여서 15시간을 가야 했다. 드골공항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물은 사서 먹어야 했다. 물을 사 먹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나도 목이 마르니 물을 사야 했다. 오후 2시에 서울에서 출발했지만, 시차 때문에 15시간 비행 후에도 도착한 때는 어둑해지는 저녁이었다. 한국 시각으로는 새벽이었으니 피로가 몰려왔다.

마르세유 공항에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이 마중을 나와 있고, 숙소에 도착하니 한국노총 팀들이 삼겹살까지 구워서 접대했다. 우리와 달리 한국노총 쪽은 1주일 전에 도착해 여기저기 관광을 했다고 한다.

ICFTU 중앙위는 각국의 주요한 노동 현안을 설명하고 신자유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전략을 논의했으며, 저녁에는 섹션별로 그룹미팅을 통해 교류하는 시간을 보냈다. 동시통역 서비스는 5개국어가 제공됐는데, 안타깝게 한국어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본어 채널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 알아듣지는 못하고 얼기설기 이해할 정도였다고 할까.

100여 개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개회식이 시작됐다. 참가 단위를 소개할 때 코사투(남아프리카공화국 노동조합총연맹)와 전노협은 기립박수를 받았다. 특히 전노협은 국제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탄압을 받는 조직이고 지도부들은 지금도 구속되고 수배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며, 바로 그 조직의 대표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소개해 기립박수를 유도한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1994년 5월 ICFTU회의에 참가한 양규헌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의 친절

조별 미팅에서는 한국을 포함해 남아공, 이태리, 브라질, 독일 등 좌파경향 대표자들이 모여 이후 공동 소식지를 발간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내가 귀국한 뒤 공동임투와 관련해 수배가 떨어진 상황이어서 논의를 진척시키지는 못했다. 수배 중에 ICFTU 회의 때 만났던 프랑스노동총동맹(CGT) 동지로부터 몽블랑 만년필만 선물로 전해 받았다.

회의 기간에 박인상 위원장과 마르세유 해변을 구경하기도 했고, 열차를 타고 영화제로 유명한 칸에 다녀오기도 했다. ICFTU 중앙위원회 34일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공항 면세점 앞에서 박인상 위원장이 무언가 포장한 것을 주면서 공항 도착하면 사모님 배웅 나와 있을 텐데 선물로 드리라며 건넨다. 안 받으려고 했지만, 일부러 산 것이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국노총팀과 같은 비행기였는데 그들은 VIP, 전노협 팀은 일반석이었다. 박 위원장에게 한국노총은 정부에서 비행기 표도 끊어 주냐고 빈정거리며 비행기에 오르는데 자리 바꿀 거냐?”고 묻는다. “내 자리는 흡연석인데 왜 바꾸느냐며 거부했다.

서울로 돌아오고 일주일쯤 지나서 박인상 위원장이 문성현 총장을 통해 저녁 식사 같이 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여의도 일식집에서 만났는데 박 위원장이 앨범 하나를 내밀었다. 앨범에는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살아오면서 또 활동하면서 몇 번의 과잉친절을 받아본 적이 있다. 과잉친절은 주로 회사 임원이나 노동부 직원들, 혹은 정보과 경찰들이었고 그들의 과잉친절에는 늘 의도가 숨어있었다. 박 위원장의 친절은 무엇이었을까. 노동부나 정보경찰과 같은 의도는 아니었고, 노동조합 활동에서 몸에 밴 일종의 조직화 방식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그나마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지도위원이었던 김문수의 민자당 입당

19943, 느닷없이 전노협 지도위원이던 김문수가 민자당에 입당했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이 사건은 당시 전노협은 물론 운동진영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가장 개혁적인 분이기 때문에 개혁에 동참하기 위해 입당한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신경영전략을 필두로 반노동자적 정책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가장 개혁적이라는 말장난으로 자신의 민자당행을 합리화한 것이다.

나는 전노협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전노신)’(118, 1994323일자)을 통해 지금의 상태는 어젯밤까지 적들과 총을 쏘며 전쟁하던 동지가 하룻밤 자고 나서 보니 적진에서 아군에게 총질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김문수에게 노동운동가로서 양심이 남아있다면 자신의 언행과 처신에 대해 되돌아보고 자숙하라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욕되지 않게 하려면 즉각 민자당을 떠나라고 촉구했다.

주장기사를 읽은 장기표 씨가 급하게 전노협을 찾아왔다. 김문수 같은 사람이 집권 여당에 들어가면 전노협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장 선생도 같은 생각이라면 그냥 민자당으로 가지 왜 논리가 안 맞는 말을 하냐며 심한 언쟁이 오가는 와중에 장기표 씨는 자신의 고민을 얘기했다. 자신은 정치인이고 정치를 하려면 돈이 필수적인데 요즘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예전엔 후배들에게 전화하면 100만 원도 바로 보내주곤 했는데 지금은 돈 없다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김문수도 그런 고민 끝에 선택한 결정인 것 같다“3김 쪽에 줄을 서야 그나마 정치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는데 전노협에서 그렇게 반대하면 도대체 어떡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토론도 논쟁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천영세 지도위원과 셋이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불필요한 언쟁만 이어졌다.

 

노동자를 배신하지 않겠다

그 후 1999년 굴뚝 청소 일을 할 때, 김문수가 국회의원 신분으로 찾아왔다. 앞머리에 기름을 바른 모습이 독특하게 보였고, 보좌관과 함께였다. 그는 나에게 운동의 경력도 있고 하니 정치를 해보라고 했다. 현재 자신이 한나라당 공천위원장이라고 강조하면서 안산은 공업지역이고 하니 양 위원장이 안산지역에 출마하면 승산이 있을 거 같다고도 덧붙이며 같이 정치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권용목에게도 잘 얘기해서 안산과 울산에서 두 사람이 출마하면 좋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내가 비록 굴뚝 청소를 하고 있지만 노동자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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