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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공무원노조 10년의 기억(2)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9-07 조회 1043
 

* 지난호에 이어 박재범 동지의 공무원노조 10년의 기억을 싣습니다. <편집자>
 

공무원노조 10년의 기억(2)

공무원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과정에서 내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고 약속했던 것이 있다. 하나는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지치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무원노조가 ‘민주노조’로 건설되는데 복무하겠다는 다짐이었다.

2000년 5월 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발전연구회)로 옮기게 되었을 때 공공연맹의 한 선배는 “이 운동판도 사회와 똑같아 참 더러운 꼴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지치면 운동하지 못한다. 잘 이겨내라”는 염려와 당부의 말해주었고 이 말은 힘들 때마다 나를 다잡기 위해 되새기는 말이 되었다.

또한 언젠가는 공무원노조를 민주노조로 건설하겠다던 나의 다짐도 발전연구회의 채용과정에서 보여준 사례만 보더라도 당시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였다.
민주노총에 관계된(?)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발전연구회 사무처에 채용하는 문제가 당시 12명의 공동대표의 첨예한 의견대립을 가져왔고, 결국 전원합의제의 원칙을 깨고 처음으로 투표를 통해 채용을 결정했던 사례만 보더라도 민주노조 건설의 실현은 험난한 과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각 기관별 공무원직장협의회가 발전하여 형성된 초기 발전연구회는 주로 12명의 공동대표가 중심이 되어 전원합의 형태로 사업을 확정하는 시기였으며, 매달 지역을 돌며 개최하는 공무원직장협의회 전국간담회는 그 지역에 전국의 상황을 알리고 직장협의회 건설을 독려하는 ‘부흥회’의 자리가 되었으며 이는 결국 전국적인 조직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공무원사회는 민주적인 토론의 형식도, 노동자 문화라는 것도 전혀 존재하지 못했던 시기였고 경직된 공직사회의 계급문화와 관료적 형식이 몸에 배어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초기 중앙 사무실이 없어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개최된 공동대표 회의만 해도 밤새 회의자료를 준비해도 주로 식당에서 저녁식사 겸 회의로 진행되었으며, 2차는 해당지역 공직협 대표들이 안내하여 맥주집, 노래방 등 유흥(?)의 뒷풀이로 이어지는 지금 보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전국간담회 또한 기관장이 개최하는 ‘연찬회’ 같은 분위기속에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발전연구회 공동대표들의 격려사, 해당지역 대표자들의 인사말, 지역내 공직협 대표들의 환영발언 등 일반 행정조직의 기관장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적 행사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초기활동은 관료적인 상명하복의 공직사회 내에서, 공무원노동자들이 공무원직장협의회라는 자기조직을 가지고, 자신들의 문제를 중심으로 기관과 지역을 뛰어넘어 전국적인 모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자주적인 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2001년 민주노조의 자주적 운영방식을 채택한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전공련)이라는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공련은 ‘공무원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과 ‘공직사회 개혁’이라는 자기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동시에 정부의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행정혁신에 맞서 전국적인 투쟁을 조직하는 시기였다.

전국적인 공무원노동자들의 대정부 투쟁의 시작이자 공무원노조 건설을 천명한 계기는 당시 전공련의 핵심활동 지역이었던 경남지역 동지들의 결의로 2001년 6월 9일 창원에서 개최된 ‘공직사회 개혁!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공무원노동기본권 쟁취! 전국공무원결의대회’이다. 지금도 그날 아침 넓은 창원 용지공원에 무대를 쌓으며 정부의 탄압을 뚫고 과연 전국의 공무원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설레이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걱정은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약 4천여 명의 공무원노동자들을 모습 속에서 대회성사의 기쁨과 환호로 바뀌었다.
 


<2001년 6월 9일 창원에서 열린 전국공무원결의대회>


이 대회를 기점으로 전공련은 ‘공무원노동기본권 쟁취’를 선언하고 ‘법외노조 결성’을 천명하였으며, 이러한 열기는 이후 7월 4일 부산역광장 ‘제2차 공무원결의대회’, 11월 4일 서울 보라매공원 ‘전국공무원가족한마당’으로 들불처럼 그 열기를 이어나가 이듬해 공무원노조 건설의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2001년 7월 4일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제2차 공무원결의대회>


이 세 번의 전국적인 집회에 당시 나는 나름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였다.

최초의 공무원노동자들의 집회인 6.9 전국공무원결의대회의 경우에는 ‘노동자’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공무원들에게 ‘공무원의 노동자성’을 부각시키고 ‘공무원노동기본권의 보장’ 요구를 대중적 요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회 당일에 쓰일 무대배경 걸게그림의 내용을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기본권 보장하라!’라는 문구로 선정하였다. 또한 행사에 국민의례 등 익숙한 기관행사 프로그램이 아닌 ‘열사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 민중의례를 프로그램에 넣었다.

그래서인지 대회행사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몇몇 현장 간부들이 나에게 달려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등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두 번째 대회인 7.28 부산대회에서는 ‘공무원도 노동자다! 공무원 노동3권 보장하라!’라는 문구로 공무원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였으며, 구호의 후렴구도 그때부터 ‘노동3권 쟁취, 투쟁’이 되었다.

그해 마지막 대회인 11.4 서울대회에서는 민중의례도 투쟁의 구호도 자연스러웠졌으니 마지막 관문(?)인 ‘노동3권 쟁취’라는 붉은 머리띠 착용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당시 지도부는 여전히 현장 공무원들이 붉은 머리띠를 두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머리띠는 결국 무대에 오르는 전국 대표자들만이 착용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서울 보라매 공원에 집결한 7천여명의 공무원노동자들의 손에는 각 지역별로 준비한 ‘피켓’과 ‘구호가 적힌 붉은 손수건’, ‘투쟁 머리띠’가 이미 쥐어져 있었다. 이미 공무원노동자들은 정부의 탄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지도부의 우려를 뛰어넘어 공무원노조 건설과정에 역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1년 11월 4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전국공무원가족한마당>


이러한 현장 공무원노동자들의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은 그 다음해 공무원노조 건설과정과 이후 정부의 기만적인 노조법에 맞서는 두 차례의 파업과 대정부 투쟁과정에서 정부의 탄압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공무원노조의 역동적인 힘으로 발휘되었다. 돌이켜보면 현재의 공무원노조는 초기 활동가들의 헌신성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투쟁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정권의 탄압을 뚫고 민주노조를 세워내고 사수해온 조합원들의 힘이었으며 그 결과 나의 야무진(?) 공무원노조의 민주노조 건설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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