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을 찾아서, 그의 생가를 가다(충남 예산) 김미화 (한내 회원) 1945년 8월 15일 오후 해방으로 들뜬 종로 네거리 담벼락과 전신주에 삐라가 나붙었다. “지하에 숨어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2019년 아직도 박헌영은 지하에 숨어있는 건가. 역사책에서도 활동은커녕 그의 이름조차 볼 수 없고 전국을 누비며 활동했다던데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아직도 숨어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 나서야겠다. 만약 숨겨진 거라면 늦었지만 더욱 더 찾아 나서야겠다. 박헌영朴憲永은 1900년 음력 5월 1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299번지에서 박현주朴鉉柱와 이학규李學圭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해寧海 박씨로 신라 박제상朴堤上을 시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波 56대손이다. 아버지 박현주(1867~1934)는 첫째부인 탐진耽津 최씨(1872~1912)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생활형편은 비교적 넉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박현주는 도정하지 않은 곡식을 미리 사서 보관했다가 파는 중개상을 했다고 한다.    박헌영의 실제 출생지-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현주소 서초정1길 85). 2019년 현재 모습.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299번지(현주소 청신로 388) 박헌영 집터. 지금은 신양면종합커뮤니티센터가 세워져있다. 디스 다방과 센터 부근이 집터자리로 추정된다.
어머니 이학규(1867~1943)는 신평新平 이씨로 일찍이 결혼을 해서 딸아이를 하나 낳고 남편과 사별을 했다. 혼자서 어린 딸을 데리고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밥장사를 하며 살았다. 당시 광시면 일대는 금광이 있어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상대로 하숙을 하며 밥장사를 하였다. 벼장사를 하는 박현주와 밥장사를 하는 이학규는 거래관계로 알게 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아들 원경圓鏡(속명 박병삼朴秉三)스님은 박헌영의 실제 출생지가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라고 증언한다. 호적에 기재된 신양면 신양리 299번지로 이사한 때는 태어난 이듬해인 1901년이라는 것이다. 당시 신양리는 제법 큰 우시장이 열렸고 장도 제법 커서 이학규는 우시장 옆에 집을 한 채 사서 국밥 장사를 하여 돈을 벌었다고 한다.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집은 박헌영이 태어난 집터에 그대로 다시 짓고 슬라브 지붕을 얹은 집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은 자식들이 낡은 집을 헐고 번듯하게 새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으나 박헌영이 태어날 당시 주춧돌이 그대로인 이 집을 보존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그대로 살고 있다고 한다. 박헌영과 직접 관계는 없는 사이라고 한다. 박헌영은 1915년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신양리 집에서 지냈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를 합격하자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구속과 수배를 반복하는 동안 신양리 고향집에는 세 번 정도 내려왔던 걸로 확인된다. 박헌영이 1941년 지하로 잠적하여 활동하면서 비공개적으로 다녀갔을 수도 있겠으나 확인된 사실은 없다. 1943년 어머니 이학규 장례식에 박헌영이 올 것이라 예상한 일본 경찰들이 신양리에 매복해 있었지만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헌영은 더 이상 고향마을에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