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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㉖ 지금 해산하면 안된다
첨부파일 -- 작성일 2023-01-31 조회 46
 
침통했던 전노협 해산대회
민주노총 건설 후 1995년 12월 3일 전노협 해산대회가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렸다. 12월 2일에는 전노협후원회 주최 토론회를 열어 지난 6년을 평가하고 전노협의 의미와 향후 과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밤에는 고난의 역사와 함께 한 전노협의 의미를 되새기는 문화제를 이어갔는데 끝날 때까지 분위기는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전야제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전노협을 회고하며 민주노총과 산별노조에 대한 우려와 결의를 모아내기도 했다.
동지들은 전노협 해산을 아쉬워하며 연세대에서 거의 밤을 새웠다. 아침 세면장에 가던 김종배 동지가 경찰들에게 잡혀갔다. 경찰은 김종배를 양규헌으로 오인하고 “양규헌 꼼짝 마” 소리치며 잡아갔다고 한다. 양규헌으로 잡혀간 김종배는 종로경찰서에서 꼬장을 부리다가 택시비까지 받아 대회장으로 돌아오면서 연세대는 비상이 걸렸다. 이미 수배자를 체포하려는 경찰들이 쫙 깔려있었다. 경찰서까지 갔다 온 김종배는 “어딜 봐서 내가 양규헌 같냐”고 투덜거린다. 선봉대가 어슬렁거리는 경찰 몇 명을 잡아 눈도 가리고 쇠파이프로 협박하며 쫓아냈지만 사복 경찰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지금 해산하면 안 된다”
전노협 해산대의원대회가 시작됐다. 대회를 준비하며 지역을 돌며 지역 혹은 사업장별로 토론했지만, 여전히 이견이 강해서 토론시간은 길어지고 있었다. 동지들은 대부분 “지금 시기에 전노협을 해산하면 안 된다”며 해산 안에 강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지역 순회 토론까지 마친 다음이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했던 나의 불찰도 있었다. 회의를 진행하는 나로서는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만약 오늘 전노협 해산을 결정하지 않으면 이후 전노협은 해산도 못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제기의 핵심은 민주노총의 노선이 확인도 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전노협과 다른 조직이기 때문에 지금 전노협을 해산하면 민주노조운동은 후퇴한다는 우려였다. 그런 주장에 동의는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노협을 포함한 전노협 출신들이 민주노총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계승·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설득한 끝에 표결을 통해 전노협 해산 안이 원안대로 통과됐다. 회의 내내 내 임무는 전노협 해산하는 것까지라고 되뇌었다.
2부 기념식에도 여전히 침통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동지들이 많았다. 전노협의 지난 6년은 자본과 정권의 모진 탄압을 이겨내며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구속, 수배, 해고는 물론이고 죽임까지 당했던 고통스럽고 참담한 시간들이었다. 그런 회한들이 가슴을 아프게 했고, 동지들 가슴을 저미게 했고, 나 또한 먹먹했다.
도처에 깔린 사복경찰을 뚫고
전노협 해산 기념식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데 도처에서 수배자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사복들이 즐비했다. 우선 전노협 해산대회가 끝나면 연세대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수행팀의 전술 논의가 있었다.
정각 몇 시에 대강당 전기가 꺼지면 나는 내가 앉아있던 반대편으로 옮겨가 복장을 갈아입고 변장하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은 15초, 15초가 지나면 전깃불이 다시 강당을 환하게 밝히니 그 시간을 지켜야 했다. 불이 켜지면서 퇴장하는 동지들 틈에 휩싸여 눈빛으로 안내하는 동지를 따라 강당을 나가서 부산에서 올라온 버스에 탔다.
버스에는 수배 중인 이승필 동지와 나, 그리고 수행팀이 올랐고 부산에서 온 동지들도 탔는데 버스에 타면서 깜짝 놀랐다. 버스 통로 바닥에는 선봉대 20여 명이 쫙 누워 있고 그들의 손에는 쇠파이프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버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나는 뒤쪽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정문이 아니라 동문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경찰들이 눈치챘는지 버스 뒤를 쫓아오는 차량이 꽤 많았다. 동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있고 100여 명이 지키고 있다가 우리가 탄 차량임을 확인하고 자물쇠를 풀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탄 차만 통과시킨 채 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버스를 쫓아오던 짭새들 차량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동문을 나섰는데 아뿔싸! 동문 밖에서 기다리는 경찰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대략 봐도 승용차 10여 대에 사복들이 타고 우리가 탄 부산행 버스를 쫓아오고 있었다. 버스는 연세대에서 성산대교로 진입했다. “대교 위에서 차량을 덮치면 퇴로가 없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쇠파이프를 잡고 있던 선봉대원이 “만약 우리 버스를 침탈하면 목숨 걸어서 방어하기로 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한다. 성산대교 끝 지점은 김포공항 가는 길과 서부간선도로 길로 갈라진다. 그 지점에는 또 여러 대의 경찰 승용차가 대기하며 버스의 행방을 가늠하고 있다가 우리 버스가 서부간선도로 쪽으로 향하자 전부 따라오기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는 선봉대와 수행팀이 전술회의를 긴박하게 하고 있다. 서부간선도로로 가던 버스는 대림역 방향, 왼쪽으로 꺾었다.
대림역은 올라가는 육교가 두 개 있다. 첫 번째 육교에 버스가 잠시 정차하고, 나와 비슷한 체격의 동지들 다섯 명이 대림역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림역으로 경찰을 유인하기 위한 조였고, 서울역까지 가서 시계탑 앞에서 버스를 만나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지들이다. 뒤에 쫓아오던 경찰들이 탄 차들은 급브레이크를 잡으며 대림역으로 뛰어가는 동지들을 쫓기 시작한다. 그 사이 우리를 태운 버스는 출발했고 두 번째 육교를 지나 이승필 동지와 나, 그리고 수행팀은 내려서 택시를 타고 공단오거리로 향했다. 공단오거리에 내린 우리는 아침부터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심한 허기를 느꼈다. 긴장이 풀리면서 골목 안에 있는 설렁탕 집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수행 최재호 동지는 오거리에 남겨둔 채….
설렁탕을 주문하고 앉았는데 최재호한테 연락이 왔다. 오거리까지 경찰들이 쫓아왔으니 빨리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한다. 설렁탕을 먹을 겨를도 없이 일행들은 다시 택시를 타고 시흥사거리로 자리를 옮겨 2층 커피숍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이승필 동지가 커피숍 안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온다.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혜자씨(문성현 부인)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일행은 다시 커피숍에서 급히 내려와 서울대 입구에 있는 안가로 이동해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라면을 먹으며 긴박했던 하루를 마감했다. 체포된 뒤에 경찰들 말을 빌리면 시흥사거리 커피숍에서 한 전화통화로 위치를 파악하고 급습했는데 1분 차이로 못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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