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선언>과 류자명(1894~1985) 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창립했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자는 취지로 김원봉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주축이 되었고 국내외 비밀결사 활동에 가담했거나 3.1운동 당시 지방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망명 청년들이 가세했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은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 파괴와 요인암살 활동을 기획하여 1920년부터 여러 번에 걸쳐 대규모 국내 거사를 도모하는 등 본격적인 암살파괴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계획된 거사가 번번이 실패하고 가담했던 단원들도 구속되거나 처형되자 의열단은 폭력 테러집단으로 매도당하게 되었다. 1922년 3월 중국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암살을 도모했으나 저격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현장에 있던 외국인이 죽거나 다치게 되자 프랑스 조계 경찰 당국은 조선인의 총기류 휴대와 사용을 단속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주중 미국대사관도 “조선인 독립당이 공산주의자처럼 잔혹한 수단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것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도 찬성하지 않는다.”고 거들었다. 심지어 상해 임시정부도 “의열단의 암살파괴 운동은 과격주의 소치”라고 공공연히 비난했다. 한편 상해의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도 의열단의 폭력운동 비판 글을 발표했다. 이에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인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류자명은 김원봉에게 평소 존경하던 신채호를 추천하고 북경에서 상해로 초빙하여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으며 신채호는 흔쾌히 수락했다. 두 사람은 의열단 비밀숙소에서 한 달 동안 합숙하면서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했고 1923년 1월 발표했다. <조선혁명선언>에 아나키즘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아나키즘 이론가였던 류자명의 노선이 크게 반영된 결과이다. 류자명은 선언문에 들어가야 할 원칙 여섯 가지를 직접 밝혔고 이 원칙들은 <조선혁명선언>에 충실히 반영되어 민중직접폭력혁명의 의의와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가 밝힌 원칙은 아래와 같다. 1. 5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명된 조선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망하게 된 원인과 경과를 역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2. 나라가 망한 결과로 3천만 인민이 일본의 노예로 되었고 3천리 화려강산이 인간지옥으로 된 것이다. 3. 조선인민이 일본 침략에 대하여 영용하게 투쟁해 온 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4. 일본 군국주의에 대하여 폭력혁명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5.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민중을 각오시켜야 한다. 우리의 폭력혁명 운동은 우리의 민중을 각오시키기 위한 것이다. 6.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 방을 이룩할 때까지 굳세게 싸워야 한다.  <조선혁명선언> 원본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가 작성했지만 그 배후에서 크게 영향을 준 류자명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선언문이 길어서 여기에다 전문을 옮겨 적지 못 하지만 꼭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 대신 1924년 1월 작성 배포된 의열단 격문의 일부를 적어본다. 의열단이 발표한 문건 대부분은 류자명이 작성했다. 이 격문은 <조선혁명선언>과 비슷하여 그의 아나키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 아! 우리는 자살하지 않으면 곧 학살을 당할 것이다. 만일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급격한 혁명의 길밖에 없다....운명에서 해방되려면 오직 폭력적 혁명밖에는 다시 길이 없다. 우리는 자유를 찾지 못하면 영구히 멸망될 것을 알았다. 그러면 자유를 위하여 몸 바칠 뿐이다. 자유의 값은 오직 ‘피와 눈물’이다. 자유는 은혜로써 받을 것이 아니오 힘으로써 싸워서 얻을 것이다. 우리에게 얽매인 ‘쇠줄’은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려야 된다. 우리의 생활은 오직 자유를 위하는 싸움뿐이다. 용감한 형제자매여! 오라 온갖 수단과 모든 무기로 싸우자! 완전한 독립과 자유가 올 때까지 싸우자! 싸우는 날에는 자유는 온다!” 류자명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중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여 그의 흔적을 국내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류자명기념사업회도 올해야 발족 되었고 몇 년 전 생가터에 지으려던 기념관 건립계획도 시의회를 통과하지 못해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류자명은 아나키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만약 충주 갈 기회가 생겨 그의 생가터를 직접 방문해보고 그를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한 인사들이 모두 반공세력이 되어 선봉에 서서 활동할 때 그는 아나키즘과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했음을 잊지 않고 반공세력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아나키스트였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류자명 류자명 생가터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 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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