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가보는 내 나라
강원도 철원에서
서동석 (통일문제연구소 회원)
내 어머니는 1926년생이시며 고향은 함경도 북청입니다.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 고향 얘기를 여쭤보았지만 그리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겐 외가가 없습니다. 내가 커서 다시 고향이나 나의 외가에 대해 여쭤보았으나 ‘이젠 너무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짐작하건대 아마 그곳 얘기하시기가 썩 내키지 않으셨던 듯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지 않으셨던 과거를 [샘이 깊은 물]이라는 잡지에 털어놓으셨습니다. 지금은 그 잡지가 폐간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꽤나 알려진 잡지입니다. 1989년 5월호에 어머님은 당신의 과거 얘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어머님이 구술하고 기자가 그대로 정리한 글에서 난 마치 어릴 적 요지경을 들여다보듯 머릿속으로 어머님 일생을 감아가며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열두 살 무렵에 친부모를 떠나 어찌어찌한 사연으로 수양딸이 된 집안은 수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북청에서도 꽤 부자였습니다. 그 집 심부름으로 북청과 서울을 몇 번 오갔다고 합니다. 명태값 심부름이었습니다. 그 집은 서울 애오개(아현동)에도 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서울에 오면 이 집에 묵었습니다. 그러다 아예 서울에 눌러 살게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삼팔선이 생기고 겨레가 갈라져 마녁(남)과 노녁(북)에 따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났고 어머니도 피란을 다녔습니다. 다시 서울에 와서 화약 냄새 가시지 않은 때 충남 청양 사람을 만나 평생을 같이 사셨습니다.
어머니가 타고 다니셨다는 기차는 경원선이었습니다. 서울 용산에서 함경도 원산을 잇는 철도입니다. 그곳의 중심역이 철원입니다.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기차가 한참 가다가 어드메쯤에서는 기중기가 기차를 들어 다른 궤도에 옮기고 다시 기차는 종착역을 향해 달렸다고 합니다. 경원선은 한탄강이 흐르는 협곡을 따라 지나가다가 철원을 지나 삼방을 거쳐 신고산에 이르는데 지도만 보아도 이 구간이 그곳 같더군요.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라는 가락이 있잖아요, 거기 말입니다.
철길은 1928년 9월에 원산에서 북청을 지나 회령까지 이어지는 함흥선이 개통됩니다. 어머니는 이 경원선과 함흥선을 따라 오고가셨나 봅니다. 지금 그 길은 철원에서 멎었습니다. 함경도의 풍부한 목재와 광물, 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산업의 동맥 요충지가 철원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녹 슬은 기찻길’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생전에 이 길을 자식과 함께 가고 싶어 하셨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어머님은 한 줌 재가 되어 자식의 가슴에 남으셨습니다. 어머님 표현대로 이 남선 땅을 넘어 북선 땅 고향을 가지 못하는 ‘따라지’인 채로 사시다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한국전쟁은 내 어머님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무수하게 만들었습니다. 1950년 6월 하순,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된 한국전쟁은 국제연합의 깃발아래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17개 국가 교전당사국을 한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교전당사국이 한편이 된 국제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 병력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합니다. 한국전쟁은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퍼센트는 민간인이랍니다. 지난 4월말에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본 영화 ‘작은 연못’의 실제사건인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도 여기에 듭니다. 전쟁은 참혹합니다. 전쟁통에 살아난 사람도 사실 산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나간사람’이 됩니다. 넋이 나가고 눈이 흐리멍텅해지는 병자라는 말입니다. 그 통에 나간사람이 되지 않는 이들은 전쟁으로 한몫 챙기려는 부라퀴들뿐입니다.
2010년 6월. 한반도에 다시 먹구름이 잔뜩 꼈습니다. 그 전쟁통에서 목숨을 잃은 혼령들이 이 한반도를 지켜보고 있을 터인데 자꾸 메케한 화약냄새가 번집니다. 지난 4월 초, 난 철원을 지난 한탄강이 임진강을 만나고 다시 흘러 한강을 만나는 문수산에서 황해바다를 보며 빌었습니다. ‘바다가 걷어 가신 모든 넋의 공덕으로 이 하구에 겨레의 봄이 오게 해 달라’고. 내 정성이 지극하지 못했는지 자꾸 못된 아우성이 남선땅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서 ‘북한군의 군사도발’에 철저하게 응징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대통령 집무처인 청와대도 아니고 불쑥하니 ‘전쟁기념관’에서 말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자꾸 내 귀에는 무장한 전차의 무한궤도소리가 이명처럼 울립니다. 이어 영화 ‘작은 연못’에서 미군의 집중포화에 쓰러지는 착한 사람들과 그들의 비명소리가...
 
철원은 미륵의 꿈이 서린 곳입니다. 신라왕의 서자인 궁예는 부패한 귀족계급의 지배에 지친 민중의 지지를 업고 군사력을 키워 마침내 901년 왕이 되어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마진이라 합니다. 이어 서기 904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겨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911년에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 “옛날에 신라가 당(唐)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파(破)하였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신라가 외국의 병력을 끌어들여 삼국을 병합, 한반도를 통치하지만 그것은 당의 식민통치이며 대륙을 넘긴 매판이라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철원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대륙을 되찾아 옛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을 펴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망해가는 신라의 귀족들을 재조직한 왕건에게 무너졌습니다. 그곳에 용화세계를 세우고자 했던 미륵불 궁예는 철원에서 가까운 ‘울음산’(명성산)에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태봉국 도성은 무너지고 세월 따라 잡초에 묻혔습니다. 그러다 일본 식민통치 시절, 문화유적조사를 하다 왕궁의 석등, 석탑 등 그 옛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문화재가 발굴되었습니다.

<사진: 노동당사에서 바라본 북녘하늘>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반으로 갈랐는데 참 야릇하게도 1953년 7월, 휴전협정에 따라 그어진 휴전선은 이 궁예의 태봉국 도성을 꼭 반쪽으로 갈랐습니다. 철원군청의 1층에는 고증을 거친 태봉국도성도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엄청난 규모의 도성 가운데 군사분계선이라는 빨간 표지판이 선명합니다. 이 모형을 만든 이의 마음에 그 빨간 표지판이 하루 빨리 거둬졌으면 하는 바람이 분명하리만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미륵의 꿈을 펼치려던 태봉국은 가뭇없이 역사에 묻혔는데 그로부터 6백여 년이 지나 이곳에 또 다른 미륵이 왔습니다. 임꺽정입니다. 경기도 양주의 백성출신 임꺽정은 조정의 관료가 되려 했으나 출신성분이 미천하여 뜻이 꺾이자 봉건지배계급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왕조가 당쟁에 혼란스럽고 그 바람에 백성은 피눈물을 흘리던 명종14년(1559년)에 왕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조직의 두목이 된 꺽정은 서울로 가는 길목인 철원에 진지를 마련하고 조정으로 가는 진상품을 빼앗아 양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도적은 도적이되 의로운 도적입니다. 그는 ‘너도 잘 살고 나도 잘살되 고루 착하게 잘 사는 세상’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게 용화세계 아닙니까. 그러니 그가 미륵이지요.
철원이 이런 곳입니다. 삼팔선을 넘어 가다 민간인통제선(민통선)에 발길이 막히는 바로 거기에 세월의 풍상에 허물어지는 공산당사가 있습니다. 꼭 로마의 원형경기장 유적을 축소한 듯한 이 건물의 부서진 계단에 민들레가 돋았습니다. 꽃은 떨어지고 꽃씨는 바람에 날려 흩어졌습니다. 지금쯤 제 살 자리를 찾았을 겁니다. 풀잎만 남아 계단을 지킵니다. 참 평화롭습니다. 어찌되었든 이곳에 무기를 가득 채운 전차소리가 울리게 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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