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항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추모하려는 자와 단죄하려는 자 - 박진경 추도비 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한내 제주 4.3항쟁 답사는 올해 아홉 번째로 6월 9~11일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이번 역사 기행은 무장유격대의 발자취 특히 무장유격대와 토벌대 사이 전투가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던 장소를 찾아보는 코스였다. 관음사 일대 유격대와 토벌대 주둔지, 일제가 파놓은 동굴, 유격대가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산내물 전투가 벌어진 노루오름과 제주항 앞 주정공장 등을 답사했다. 무장유격대의 발자취를 좇아가던 중 우리는 4.3항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박진경 추도비를 방문했을 때였다. 관음사에서 멀지 않은 한울공원에는 11연대 연대장으로 학살을 주도한 박진경 추도비가 있다. 이 추도비는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서 2021년 한울공원으로 이전됐다. 충혼묘지는 제주 4.3항쟁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희생된 군 전사자와 경찰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공원묘지다. 제주도민들은 학살자를 추모할 수 없다며 오래전부터 철거를 요구했다. 4.3항쟁 진상규명이 진척됨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제주 충혼묘지가 국립제주호국원으로 격상, 확장되면서 국가보훈처가 이 추도비 인수를 거부하자 제주도보훈청이 나서서 월남전 참전군인 위령사업을 목적으로 제주시로부터 이관받은 한울공원으로 이전했다. 박진경 추도비는 월남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그를 추모하는 세력은 어떻게든 추도비를 존속시켜야 했다. 2022년 3월 10일 한내 제주위원회를 비롯한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등 제주도 내 16개 단체는 박진경 추도비에 역사의 단죄를 의미하는 철창을 설치하고 역사의 감옥이라 명명했다. 그러자 공원부지 관할권을 가진 제주도보훈청이 철거를 요청하고 5월 20일 철거 행정대집행을 통해 철창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답사 참가자들이 박진경 추도비를 찾아갔을 때는 “4.3사건 지서 12개 습격은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다” “남로당 지령 하에 암살된 박진경은 자유대한민국 호국영령이다” 현수막이 제주 4.3사건 경찰유족회와 박진경 유족 명의로 추도비를 둘러싸고 있었다. 박진경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대장으로 제주도에 근무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내 일본군 요새를 잘 아는 박진경에게 강력한 토벌을 전개하라고 임명했다. 박진경은 1948년 5월 6일 9연대가 11연대로 바뀌면서 초대 11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초기부터 김익렬 연대장과는 달리 강경 진압 작전을 펼쳐 6주 동안 4,000여 명을 체포하고 500명을 구속했다. 무차별 진압을 공로로 미군정은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박진경의 작전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6월 18일 박진경은 암살됐다. 제주 4.3 항쟁을 강경 진압했던 박진경을 추모한다는 것은 4.3 항쟁의 성격과 정체성이 맞닿아 있는 문제다. 역사 기행은 단지 과거를 훑고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문제가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진경을 추모하고 싶은 세력과 그를 단죄하고 역사 속에서 평가해내려는 세력 사이에 4.3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고 평가하고 기록하는 일은 과거의 사건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 미래를 이어가야 하는 과제다. 한내 제주위원회는 현수막을 준비해왔다. 답사 참가자들은 현수막을 겹쳐서 걸기 시작했다. 
제주는 여전히 4.3 항쟁을 현재로 부활시키고 있다. 추도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추모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와 무던히 싸우고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왜곡된 기억과 기록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투쟁을 통해 그리고 기억과 기록들을 통해 왜곡을 바로잡는 것은 계속되는 싸움이며 노동자역사 한내는 이런 의미를 담아 역사 기행을 계속하고 있다. <참고자료>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 4.3 항쟁의 역사를 찾아서』, 2018 <제주투데이> 2022년 6월 10일, 「제자리 찾아야 할 박진경 추도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