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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1948년 2월 회의'에 대하여_송시우 (50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3-02-13 조회 966
 

이른바 1948‘2월회의에 대하여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드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려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유격대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관, 공무원, 대청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유격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의 책임자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서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었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 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이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시는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이승진(김달삼)이 조직부장이니까 실제 조직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이삼룡 증언 · 대담 ; 김종민·양조훈, 일본 동경, 2003711.>

 ‘2월회의에서 안세훈, 조몽구, 김유환 등의 장년파는 무장투쟁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당시에 무장투쟁을 반대하는 의견이 정식으로 제기되지도 않았다.’

<조규창 증언, 일본 동경, 199553.>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으로 당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단선이 구체화되는 상황 속에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뛰어넘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온건파들도 도피 아니면 무장투쟁이외의 두 가지 대안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피투쟁을 강력하게 내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구성원들 간의 의견 차이는 투쟁노선을 결정하는 투표를 위해 각자의 의견을 내놓은 정도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온건파의 노선갈등으로 4·3발발 직전에 도당지도부 핵심세력이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장년층에서 보다 젊고 급진적인 인물들로 교체되었다는 주장 또한 사실과는 다르다. 4·3봉기를 주도한 소위 신진급진파2월회의 이전에 이미 당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김달삼, 이종우, 강규찬 등은 이미 도당의 핵심세력이었다. 신진세력은 3·1시위, 3·10총파업 이후 지도부의 검거 이후의 공백을 메우면서 당 내의 입지를 확보했다.

한편으로는 이 때 일제시기에 활동했던 장년층 중에는 활동을 중단하거나 육지 혹은 일본으로 도피한 사람들이 많았다. 남로당 초대위원장인 안세훈과 조직책이었던 조몽구도 이 당시 발언권이 약해져 있었다. 이들은 473·1시위 때 경찰의 발포상황에 직면하여 즉각적인 대처를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책임추궁을 받아 당 지도부에서 사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탄압과 투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1947년의 상황은 뛰어난 실천력을 바탕으로 한 신진들이 부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이었다. 당 조직의 부족한 인원을 보완하고 조직에 사기를 불어넣은 세력은 젊은 층이었다. 3·1시위 이후 당원확장사업을 통해 들어온 하급 청년당원들의 투쟁의지는 신진세력들이 당의 주요활동 역량으로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결국 이들이 1947년 후반부터는 당을 주도했고 무장투쟁을 주장하였던 4·3항쟁의 지도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484월의 이 시점은 남로당이 아직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돌입한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4·3봉기는 38선 이남지역만의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던 남로당의 운동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긴 하지만 남로당 중앙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 남로당 중앙은 현 시기에 38선 이남 지역의 전 지구당은 선거반대투쟁을 보다 신중하게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북측에서는 38선 이남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평양연석회의에 참가해 달라고 초청하였고, 그러한 일련의 상황전개로 보아 선거반대투쟁을 더욱더 중앙의 통제 아래에서 신중하게 수행하려 했을 것이다.

<제주4?3항쟁 연구, 양정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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