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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리의 현대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와 노조파괴 공작
첨부파일 -- 작성일 1989-01-08 조회 278

제임스 리의 현대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와 노조파괴공작

 

시기 : 1989년 1월 8일

 

 

198918일 새벽 320분과 530분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던 석남사 산장과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에 복면을 하고 무전기, 각목 등을 든 50여 명의 괴한이 습격해 권용목을 비롯한 23명의 조합간부 및 조합원, 해고노동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달아났다. 

 

석남사 산장, 현해협 사무실 두 곳을 차례로 습격한 괴한들은 고도로 훈련된 듯한 폭력을 사용해, 습격당한 노동자들은 타박상이 심한데도 외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무전기를 통해 끊임없이 송수신을 했고, 철수할 때에도 무전기를 든 자의 지휘하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로 일사불란하게 철수했다. 이에 현대중공업, 현대엔진 조합원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18일 울산 시내로 홍보작업에 나섰으며, 19일 오전 7시부터는 1만여 명의 조합원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여 8일 있었던 테러에 대한 진상규명 규탄대회를 열었다. 한편 폭력테러를 현장에서 주도했던 김남소가 경찰에서 스스로 주동자라고 주장했다가 번복하는 가운데 이번 사건의 배후인물인 재미교포 제임스 리(본명 이윤섭)가 시민의 제보로 붙잡혔다.

 

이 같은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집단테러는 15일 열릴 예정이었던 대규모 전국집회 전에 파업을 중단시키고 노조 핵심간부들을 위축시켜 연대투쟁의 고리를 끊으려는 회사와 공권력의 의도하에 계획적으로 가해진 것이며,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소련으로 외유한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18일 살인적 폭력테러를 자행한 뒤에도 서태수 전 노조위원장을 계속 감싸고 돌던 현대그룹과 현 정권은 221일 백주대낮에 또다시 식칼까지 동원하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살인적 만행을 저질렀다. 비폭력을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관리자와 경비대 등 1천여 명은 닥치는 대로 식칼을 휘둘러 박원일, 진재원은 옆구리에 길이 10cm가량 찔려 중태에 빠지고 이우강은 눈을 다쳐 실명 위기에 처했으며, 백골단 등 전경 5개 중대는 회사측의 폭력만행을 지켜보며 방관했다.

 

제임스 리(이윤섭)의 정체

 

18일 새벽 130분경, 울산경찰서 상북지서장 김상구 경사(50)가 번호판을 가리고 운행하던 차량 3대를 검문하고 울산경찰서로 보고하자, 경찰서 당일 상황실장이던 정보과장 김용갑 경정(55)은 이윤섭(당시 39, 일명 제임스 리)과 통화한 뒤 지서장에게 노조 공작원 이윤섭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국가를 위해 끝까지 비밀을 고수하고 이윤섭과 통화한 사실도 보안에 처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이윤섭을 비롯한 테러범들이 타고 있던 이 차량 3대는 검문을 통과했고 잠시 후 이들은 이윤섭의 지휘하에 23명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윤섭은 서울 신문로21-197에서 1951년에 태어나 1960년 말에 인천의 동산고교를 졸업한 후 상점 종업원과 화공약품 도매업을 하다 1978년 도미, 미국에서 재미동포 김덕희와 결혼해 11녀를 두었다. 미국에서는 시카고에 있는 전자기기 회사에서 2년간 조립공으로 일하다가 1980년 미군 하사관으로 입대, 4년 복무기간 중 2년간을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재미동포의 소개로 19862월 재미한인노동연맹(현 한노련) 자원봉사자로 198611월까지 머물렀다.

 

제임스 리의 한국 내 활동

 

한국에 입국한 이윤섭은 서울 성동구 군자동에 한국노사문제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열어 활동을 시작했다. 198778월 노동자대투쟁 당시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노사관계 세미나에서 노사문제를 강연하면서 무노동무임금등 자본측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기업관계자들을 현혹했다.

 

198710월경에는 수원의 삼성전자 단지에 나타나 삼성전관,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의 기업에 노조결성 움직임이 일어나자 삼성그룹 관리자들로부터 고문으로 불리며 노동자들을 납치·협박해 노조결성을 막았다.

 

당시 삼성전관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다 이윤섭의 방해로 실패하고 부서이동을 당한 박채연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노사협의회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노조를 결성하기 위해 삼성전관 민주노조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노조결성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측에서는 약 1달간 감시와 미행을 계속했는데 10월 말경 갑자기 자칭 한미섬유노조 총무라는 이윤섭이 찾아와 면담을 요청해 갔더니 사무실에는 이윤섭과 인사과 대리 박형도가 함께 있었다. 이윤섭이 민주노조추진위원회에 대해 털어놓으라고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하자 이 개새끼가 정신을 못차렸구나. 박종철이 같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어볼래라며 커피잔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강압에 못 이겨 반성문을 쓰니까 노조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명령조로 이야기하였다.”

 

198710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삼성전관에서 상주하며 전사원을 대상으로 삼성그룹 노사협의회 제도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노조 사무실에서 놀고먹으려고 해서 노동귀족이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다라는 취지의 교육을 계속했다. 밤에는 노조결성을 준비하는 노동자들을 만나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방까지 비디오로 찍어 노동자들에게 상영하면서 불순분자들 움직임의 증거라며 악의에 찬 강연을 하였다. 

 

1988220일경에는 경기도 용인의 한일전장공업()에서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이 대공과 형사이자 회사 고문이라며 노조를 설립할 경우 모두 좌경용공으로 몰아 구속하겠다고 협박했다. 한일전장에서 노조 설립을 무산시킨 이윤섭은 38일부터 315일까지 1주일간 이 회사 임원과 간부, 노동자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다. 이윤섭은 강의에서 문제사원 식별방법(의식화의 단계별 파악)’ ‘분규 주도 사원의 형태’ ‘재야단체 및 운동권의 실상과 노사분규와의 관계’ ‘노동조합의 허와 실’ ‘노사협의회 활성화 방안’ ‘중간관리층의 역할등을 주로 다루었다.

 

19894월에는 선경그룹 계열사 선경마그네틱()에 나타나 화사쪽이 주관한 전직원 모임에서 노조는 빨갱이나 하는 것이라며 노조 해체를 강요하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19896월에는 성남의 항진산업 노사협상 과정에서 회사 고문 자격으로 회사쪽 협상대표를 맡기도 했다.

 

19899월경에는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나타나 회사 관리자들을 상대로 강의한 뒤, 이어 각 부서별로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강연내용을 되풀이하고, 9월 말에는 4,500명 전 노동자를 모아놓고 강연회를 열었다. 이윤섭은 이 강연회에서 영남지역에는 U벨트형 연대조직으로 노동조합공동투쟁위라는 불순 지하조직이 있으며 이 지하조직의 총책은 포항노동문제상담소 김상섭이고, 행동대장은 19888월 풍산금속에서 해고된 권영국이다. ‘민주노조=공산노조 또는 폭력노조며 침투의 1차 목표에 풍산금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지하조직의 목표는 1차로 기존 노조를 모두 어용으로 간주, 민주노조로 대체하여 위원장을 획득하고, 2차로 한국노총을 타도하며, 3차로 정권을 타도하고, 4차로 체제전복, 자주통일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와 관련 김상섭 포항노동문제상담소 소장은 이윤섭을 명예훼손으로 경주경찰서에 고발해 19891212일 이윤섭은 이대희, 김강하, 유원창 풍산금속 안강공장 관리자 등과 함께 불구속기소됐다.

 

198914일에는 울산시 우정동 노동회관에서 노동부 울산지방사무소장 등도 참여한 가운데 현대중공업의 일부 노조대의원 60여 명을 모아놓고 울산경찰서 대공과장이 이윤섭을 소개, 강의하게 했다. 이윤섭은 강의에서 구사대를 조직하라며 노-노 싸움을 유발하도록 선동했다. 집단테러 8시간 전인 17일 오후 6시에도 현대그룹 노동자 150여 명을 모아놓고 파업주동자들은 극소수다. 이들을 깨야 한다며 폭력을 선동했다. 

 

제임스 리는 이후 현대그룹 노동자 테러의 주범으로 구속되었다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19897월에 석방됐다. 19901월에는 새인천병원 인사부장을 자처하며 새인천병원의 노조를 파괴하고 노사협의회로 바꾸려는 공작에 개입했고, 임금인상 투쟁을 앞두고는 송도비치호텔등에서 인천 주요업체 대리급 이상 사원을 대상으로 노조 비방교육을 했다.

 

199064일에는 인천 공보관에서 콜트악기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자유노동운동협회라는 단체 명의의 <노사분규의 25>라는 소책자를 나누어 주고 노동조합 파괴에 열을 올렸다. 이 소책자에는 혁명적 노동운동에 대하여’ ‘의식화란 무엇을 말하는가등의 제목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왜곡하고, 비방하는 글로 가득했다. 그밖에도 인천지역 회사 곳곳에서 제임스 리를 노무관리 담당자로 채용했으며 명성전자에서는 제임스 리를 교섭 대표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한편 민족민주운동 인사들을 무참하게 고문한 혐의로 수배된 고문기술자 이근안(경기도 경찰국 공안분실장) 역시 노동조합 파괴에 적극 개입했는데, 삼성그룹 쪽과 매우 긴밀하게 활동했으며 제임스 리와도 가까운 관계로 알려졌다.

 

참고자료

- <월간 노동자> 1989년 3월호

- <한겨레신문> 1990년 6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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