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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 봉생병원 민주노조 사수투쟁(1993년 9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3-09-20 조회 356

동래 봉생병원노동조합의 민주노조 사수투쟁

 

동래봉생병원에 민주노조 결성

동래봉생병원은 1990, 180여 병상으로 개원한 이래 3년간 278병상으로 늘어나는 등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병원의 발전과는 달리 직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에 시달렸다. 병원은 병원 발전을 내세워 ‘3년만 참고 기다려주면 임금도 올려주고 대우도 잘 해주겠다는 논리로 직원들의 고통을 강요했다. 정의화 의료원장의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인 병원관리 체제는 직원을 가족같이’, ‘봉생인 의식’, ‘자신이 바로 아버지라는 권위와 구호를 내세우며 노동자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요구했다. 심지어 비 오는 식목일에 의료원장 소유의 산에 나무를 심기 위해 강제 동원하는 등 상식 밖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동래봉생병원 노동자들은 이러한 병원의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인 병원관리체제를 개선하고 열악한 임금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의료원장은 노조 결성을 왜 사전에 의논하지 않았느냐는 불만을 공공연히 내비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으로 일관했다.

노조가 결성될 시점에 좌천동에 있던 봉생병원에는 10만 원 상당의 전례 없는 임금인상이 실행됐으나 동래봉생병원은 이를 전면 백지화하며, “노조를 포기하고 노사협의회로 넘어가면 똑같이 임금인상을 시켜주겠다며 조합원들을 우롱했다. 또 조합원 개별 면담과 부서면담을 통해 승진·승급을 미끼로 노조 탈퇴를 강요하고 출신학교, 출신학원,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 연락해 압력을 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구사대를 동원해 노조의 선전활동을 방해하는 한편 이에 항의하는 노조 간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성조합원들에게 성적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욕설을 퍼붓는 등의 행동을 자행했다. 회사측의 집중적인 노조 탈퇴 공작으로 결성 당시 120여 명이던 조합원이 77명으로 줄어들었다.

 

노조탄압에 맞서 56일 파업투쟁

이러한 병원의 무자비한 노조탄압과 부당노동행위에 굴하지 않고 동래봉생병원노조는 56일 파업이라는 끈질긴 투쟁으로 맞섰다. 병원의 기만적인 교섭 태도가 계속되자 노조는 825일 임시총회를 열어 쟁의발생 신고를 결의하고 파업투쟁의 굳은 의지를 다지는 위원장 삭발식을 단행했다. 그리고 91677명의 전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벌여 찬성 73(94.8%)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파업을 결의, 20일 오전 9시 출정식을 시작으로 전격적인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노조는 병원이라는 사업장의 특수성을 감안해 부분파업을 벌임으로써 긴급한 의료에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외래진료의 경우 지역주민의 건강 보호를 고려해 진료를 막지 않았다.

하지만 노조의 이러한 노력에도 병원은 무노동무임금’, ‘직장폐쇄운운하며 파업 대열을 분열시키려 했다. ‘병원정상화위원회라는 구사대를 조직해 농성장에 쳐들어와 폭력을 행사하고 급기야는 합법적인 파업을 전개하고 있던 노조 부위원장을 불법 연행, 구속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 조합원의 무기한 단식농성 등의 높은 단결과 지역의 노동법 개정을 위한 부산양산지역 공동투쟁본부’(부양공투본)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부산지부’(병원노련 부산지부)의 연대투쟁으로 56일이라는 파업투쟁을 꿋꿋이 전개했으며 마침내 1120일 임금인상단체협약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1993년 투쟁일지

710부산대에서 73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조합 결성

712120여 명의 조합원과 병원노련 부산지부 노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동래봉생병원노조 결성 보고대회 개최

715사측과 첫 상견례, 노조 전임자와 사무실을 요구했으나 병원은 거부

724임금체계가 같았던 좌천동 봉생병원에 19937월부로 의료법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폭적 임금인상 단행. 정의화 의료원장은 노동조합을 노사협의회로 바꾸면 동래 봉생도 좌천 봉생병원과 같이 임금을 올려주겠다고 하며 조합원과 비조합원 사이 이간질

82정의화 의료원장은 직원조례에서 노동조합을 빨갱이 집단이요, 악의집단으로 매도하고 병원 내 노조활동을 하지 말라고 요구, “다음에 병원이 커지면 내가 노조를 만들어 주겠다. 노조가 계속 병원노련과 결탁하여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면 폐업도 불사할 것이다라며 과별 집단 탈퇴를 공개적으로 종용

86병원 앞에서 임시총회 하고 김경희 부위원장 선출

8103차 교섭 성과 없음. 병원은 노조 사무장에 대한 회유 공작 펼침

8175차 임금교섭에서 병원이 6.43% 임금인상률 제시

823노조는 위험수당 2만 원 제외한 10만 원 제시, 병원은 통상임금 8.9% 인상안 제시해 교섭 결렬, 상임집행간부 철야농성 돌입, 병원에 부당노동행위 중지 촉구

825오후 외래 로비에서 50여 명의 조합원과 병원노련 부산지부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3차 임시총회, 쟁의발생 신고 결의하고 위원장 삭발식

829해운대 송림공원에서 조합원 단합대회

93노조 쟁의발생 신고

910의료기사 부서에서 병원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복근무 시작하고 간호과는 승리 쟁취라 쓴 노란 스카프를 달고 근무, 13일부터 외래, 약국, 의무기록실, 영선과 응급실까지 사복근무에 동참

9134차 확대간부회의에서 경과보고 및 파업의 필연성과 구체적인 계획 수립, 김경희 부위원장을 수석부위원장으로 선출

9148차 임금교섭

916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전 조합원이 투표해 94.8% 찬성으로 파업 결정, 파업투쟁 결의 이후 쟁의기금과 쌀모금 실시

920열악한 근무조건 개선, 권위주의 타파, 민주노조 사수, 임금인상 쟁취를 위한 파업출정식 진행하고 파업 돌입

105노동청 국정감사에 맞춰 노동청 앞 피켓시위하고 노동법 개정을 위한 부양공투본 집회 결합, 집회에서 연대의 꽃 전달식 진행

1062차 비상총회 개최

1020빠른 병원정상화에 노사 의견 일치, 실무교섭 진행키로 합의

10263차 비상총회 열었으나 농성장에 구사대 난입, 1시간 이상 폭력 행사해 10여 명 이상이 전치 2~4주 부상

11512차 교섭

1112오후 9시경 폭력경찰 30여 명이 농성장에 난입, 박현정 부위원장과 정도근 쟁의부장 불법 연행하고 박현정 부위원장 구속

11145차 비상총회, 직권중재 대책 논의해 결국 파업 풀고 근무지로 복귀한 조합원들은 사복 착용하고 빨간 댕기 묶고 근무, 철야농성하며 병원에 성실교섭 촉구

111613차 본교섭 결렬, 위원장과 상임집행간부 단식투쟁 돌입

1117전 조합원 무기한 단식농성투쟁 돌입

1120노사자율 교섭으로 직권중재 철회하고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잠정 합의. ·형사상 책임 않기로 하고 쌍방 고소고발 철회, 좌천동 봉생병원 수준의 임금임상에 합의하고 56일에 걸친 투쟁 마무리

 

지역 노동조합들의 집중지원 투쟁

봉생병원노조의 파업이 예상보다 장기화하면서 추석 휴가를 맞이했다. 부양공투본은 추석 휴가 이후 투쟁 동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휴가 직후 연대집회를 계획했다. 105일 집회 막바지에 부양공투본 소속 조합원들이 73명의 봉생병원노조 조합원에게 카네이션을 전달했다. 105일 집회의 사회를 본 이정영 신일금속노조 위원장, 부양공투본 조직쟁의국장과 연설을 한 김진숙 부산노동자연합 의장이 제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이에 부양공투본은 급히 비상대표자회의를 소집, 대표자 전원 제3자개입을 결의하고 2차 집회 개최를 결정했다. 그리고 봉생병원노조의 투쟁상황을 지역 사업장들과 지역에 알리는 다양한 선전전을 벌였다. 경주에서 열 계획이었던 영남노조대표자회의도 봉생병원에서 개최해 영남지역 차원으로 연대전선을 확대했다. 회의가 끝난 뒤 영남지역 노조 대표자들은 노동부를 항의방문했다.

10142차 집회는 1차 집회보다 많은 400여 명이 참여해 힘있게 치러졌다. 전국병원노련 위원장과 김진숙 부노련 의장의 감동적인 연설로 참석자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노동악법, 노조탄압이라고 쓴 천을 태우는 화형식을 하고 집회를 마친 부양공투본과 지역의 노동단체, 부산연합은 대우정밀·봉생병원 투쟁 지원을 위한 범시민대책회의’(범시민대책회의)를 구성했다. 대우정밀 병역특례해고자들의 목숨 건 단식투쟁이 장기화되고 해고자들의 출근투쟁이 가열차게 전개되는 가운데 대우정밀 앞 항의집회도 열렸다. 이 집회에 봉생병원 조합원 다수가 참석해 대우정밀 조합원 여러분, 힘내세요. 봉생이 있습니다라는 카드섹션을 펼쳐 연대를 과시했다.

1026일 범시민대책회의 대표자-집행위원회 연석회의는 매주 수요일 규탄집회 전국적 모금운동 각종 회의 봉생병원에서 개최 비상사태 대비 비상연락망 구축 구사대 난입에 대비하여 규찰대 조직 각종 회의가 후 노동부 항의방문 등을 결의했다.

범시민대책회가 노조탄압 분쇄! 3자개입 고발철회를 위한 부산양산시민 결의대회가 봉생병원 앞에서 열었는데 경찰의 봉쇄로 늦게 도착한 동지들은 본 대오에 결합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두 개의 대오를 형성하고 본 대회 집회에 함께 했다. 이날 집회에서 조합원들이 환자들과 부모·형제들에게 전하는 글을 낭독해 분위기가 숙연해졌고 명예조합원 가입식도 거행했다. “봉생조합원과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쓴 하얀 바탕의 현수막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넓게 펴놓은 멍석 위에 가지고 온 쌀을 쌓으면서 집회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원래는 집회를 마친 뒤 병원 옆 안락로터리를 인간 띠로 둘러싸고 촛불시위를 할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봉쇄로 무산됐다. 쌀 적재투쟁은 쌀 모으기 운동을 계속하며 쌀이 모이는 대로 병원 로비에 적재함으로써 장기항전의 의지를 과시하고 지역연대가 나날이 강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를 담았다.

113, 전국노동자대회의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범시민대책회의의 결의로 열린 명예조합원 가입결의 행사가 진행했다. 봉생병원 조합원 의식의 급격한 발전과 지역연대 투쟁의 구심이자 계급적 전선으로서의 역할 등 투쟁의 성과를 확인하고 더 큰 승리로 나아가자는 결의를 모았다. 부양공투본 소속 성요사노조 문선대와 웅상지구 공동노래패가 노래와 율동을 선보였다.

노조는 조합원들을 6개조 로 나누어 파업을 진행해 왔는데 조당 평균 10명 내외로, 소규모 조에 대한 자매결연을 통해 지속적 지원 구조를 만들었다. 어떤 조는 인산기업, 미진화학, 오성화학, 광명연마 등의 노조와 자매결연을 해 김치 등 밑반찬, 치약, 화장지, 양말, 전해투 티셔츠, 1회 회식 등 구체적인 지원방안을 제출했다. 자매결연을 한 조는 주 1회 규찰을 섰고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런 활동은 파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

1117일 직권중재가 떨어지고 난 후, 파업을 일단 푼 조합원들은 강력한 준법투쟁으로 전 조합원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부양공투본 대표자들은 1119일 민주당 부산시지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동조단식농성을 결의하고 지방노동위원회를 항의방문해 자율교섭 보장을 촉구했다.

노동조합은 1123일 봉생병원에서 투쟁 승리를 보고하는 한편 제3자개입 철폐와 직권중재 철폐 투쟁 등을 결의하는 집회를 하고, 봉생투쟁의 전 과정을 되돌아 보는 슬라이드를 상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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