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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라면 노동자의 기억 (9)
첨부파일 -- 작성일 2021-09-15 조회 274
 

개미와 진딧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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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10일부터 안양, 안성, 부산공장이 일제히 112시간 2교대에서 8시간 3교대로 바뀌었다. 19894월 파업 때 노사합의 사항이자 대다수 조합원들의 염원이었다. 남자조합원들은 3교대를 하면 연장근로가 없고, 야간일수가 줄어 2교대 때보다 월급이 적다고 반대했지만 전체 조합원의 80%인 여성 조합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일할 때만 빤짝하고, 짬짬이 밖을 드나들며 담배라도 피울 수 있는 남자들과는 달리 하루 종일 기계에 매달려 라인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다. 여성들은 식사시간을 빼고 주야를 번갈아가며 하루 11시간을 기계에 붙어 서서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니 관절염과 요통 견비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온몸을 파스로 도배를 하고 약을 지어먹으며 버텨보다가 견디기가 어려우면 사표를 쓰고 나간다. 1시간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주야 11시간 2교대를 하다 보니 아침이고 저녁이고 8시에 퇴근해 집에 가면 밥을 해먹는 건 고사하고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자고나오기 바쁘다. 여성 조합원 대부분이 위장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2개조를 3개조로 만들다보니 인원도 충원되었고 전반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대부분이 같은 과에서 근무조나 일하는 자리가 바뀌는 정도의 인사이동이었다. 그러나 민주파 조합원들은 그게 아니었다. 각과별로 고루 분산 배치된 것은 물론 일하는 자리도 골고루 흩트려 놓았다. 대부분이 회사 쪽과 가까워 평소 민주파 조합원들과 사이가 안 좋은 조합원들 부근이거나 여자 조합원들의 경우 남자조합원들만 있는 부서, 아니면 일이 힘들거나 냄새가 심하게 나는 부서 등으로 보냈다. 부서원들과의 불화 등을 이유로 귀양 보내듯 외딴자리로 보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곳으로 가겠다는 희망자가 있어도 민주파만 자격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싫어하는 자리는 오직 민주파 조합원들 외에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소위 근로자들을 선동해 작업분위기를 흐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대의원에 출마해도 당선되기 어렵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부서이동이 된 민주파가 5개 부서에서 30여명이 되었다. 이일로 인해 노조사무실과 스낵과 라면 현장 사무실은 연일 시끄러웠다.

 

"냄새가 지독하고 힘들어 남자들도 힘겨워하던 된장 푸는 일을 여자에게 시키는 게 정당한 인사라 이말이야, ?“

"하나같이 노조 사무실에 와서 잘 따지고 관리자들에게 바른 소리 하는 사람만 타 부서로 보냈는데 우리 회사는 그게 인사의 기준이야?"

 

노조위원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조합원들의 온갖 독설과 항의, 야유를 비윗장 좋게 묵묵히 경청하고 있었다. 이때 탁자가 빠개지는 듯 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탁자위의 종이컵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말 못해 이새꺄, ? 회사가 약속을 어기고 정동철과 송인자를 해고시킨 건 잘못이다. 다른 일이면 모를까 파업을 이유로 해고시킨 건 잘못이다. 그건 오히려 회사를 불신시키는 일이다. 노조 사무실에서 우리가 한 이 얘기 네가 보고했지 엉?”

 

라면3과의 윤복래 아줌마와 박혜경 아줌마였다. 평소에도 관리자에게 밉보여 보복적인 자리이동을 당하는 동료들을 유달리 감싸고 관리자들에게 바른 말을 해 밉보였던 아줌마들이었다. 그런 터에 해고자들의 문제를 노조 사무실에서 따진 일로 인해 연이틀을 불려 다니고 두어 차례 외진 곳으로 자리이동을 당해 눈에 가시였던 분들이었다. 노조사무실에서 한 말이 너무도 정확하게 과장의 입을 통해 되나오는데 대해 경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면3과에서 라면2과로 부서이동이 되어 각각 A조와 C조로 나뉜 것이다.

과장의 과잉충성으로 인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회유와 협박, 감시가 심해 작업자들끼리의 반목과 갈등까지 많은 부서였다. 시정을 요구하며 며칠 동안 항의와 월차휴가 등을 이용해 출근거부를 해보았지만 회사 측의 움직일 수 없는 소위 불순세력 격리정책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부는 사표를 쓰고 나갔지만 대부분은 발령지로 돌아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칼자루를 회사에서 쥐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2교대에 비해 근무시간이 줄어 한결 낫긴 했지만 3교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2교대 때보다 더 힘들다는 얘기가 분분할 정도였다. 5명이 하던 일을 4명이 하게 한다든지 기계속도를 높인다든지 하는 소위 생산성향상 때문이었다. 오히려 사람을 잡는 어설픈 자동화 설비 또한 문제였다. 잦은 고장과 정확치 못한 작동으로 오히려 불량품의 양산과 사람의 손을 수시로 부르는 섣부른 설비임에도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일단 작업인원부터 줄이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문제들은 오로지 작업자들의 몫인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새벽 6, 오후 2, 10시 출근시간도 문제지만 근무시간에 적응할만하면 일주일마다 바뀌니 생활리듬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몇 달 간격으로 바뀌거나, 적어도 한 달 간격으로만 바뀌어도 한결 나으련만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어지럽기까지 한 것이다.

 

"드런년들, 붕어새낀가 물두 드럽게는 쳐먹네!"

 

새벽 6시 출근 때의 라면3과의 윤수미 아줌마는 드런년들을 입에 달고 다녔다. 포장실 바닥 청소와 더불어 포장실 작업자들의 식수를 전담하는 위생담당이기 때문이다. 아침 겸 점심으로 밥을 10시에 주니 50여명의 인원이 그때까지 허기를 물로 채우기 때문이다. 새벽 530분 출근길에 정문에서 싸구려 빵과 찬 우유를 나누어주지만 감기는 눈으로 그걸 먹기도 어렵거니와 또 먹을 마땅한 시간도 없는 것이다. 따로 먹을 시간을 주는 것도 아니고 요령껏 먹으라는 얘기였다. 자동포장기 운전자들은 기계위에 빵과 우유를 올려놓고 틈틈이 먹어가며 일을 하기도 하지만 정신없이 두 손을 놀려야 한은 대다수는 먹을 시간이 없어 못 먹는다. 스티로폼 같은 빵을 씹느니 또 얼음장 같은 우유를 먹고 화장실을 드나드느니 물로 허기를 달랜다. 그렇게 견디다 오전 10시 아점(아침 겸 점심)시간에 밥이든 라면이든 먹는 것이다. 그러니 오전 10시 아점시간까지 일을 하다보면 허기와 갈증은 물론 식은땀과 함께 현기증까지 엄습해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대형 보온 물통으로 하루아침에 2통을 끓여도 모자라니 지겨워 죽을 지경이라는 윤수미 아줌마의 푸념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는 비단 라면3과만의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오전10시 아점(아침 겸 점심)을 위해 식당을 가면 제대로 먹기가 어려웠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주린 배를 끌고 식탁에 가 앉으면 까부라져서 먹을 수가 없었다. 먹더라도 모래를 씹듯 밥맛을 알 수가 없고, 일하기 위해 입에 쑤셔 넣는 형국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밥 탓인지 위장은 위장대로 부글거렸다. 또 식당도 10여분은 족히 걸릴 정도의 거리이고 줄을 서 기다리다 먹고 오면 30분 식사시간이 화장실 다녀올 시간도 안됐다. 일을 하기 위해 밥맛도 모르고 억지로 먹고, 또 바로 와서 일을 하다 보니 속도 거북하고 라면 가락이 목구멍을 타고 스멀스멀 넘어오는 듯 한 기분이었다. 아침 겸 점심을 따로 주는 몇몇 3교대 사업장의 예를 들어가며 아침과 점심을 제시간에 먹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노동조합에 수차 건의했으나 꿩 구워먹은 소식일 뿐이었다. 생산성 향상이 문제라면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아침 식사를 교대로 하는 방법도 있지않냐며 대책을 촉구했으나 밥을 먹으면 나른해져 작업능률이 떨어진다며 회사에서 난색을 표하더라는 얘기였다. 노동자의 위장은 무쇠로 만들어 규칙적인 식사를 안 해도 까딱없다는 식이었다. 대의원과 조합원들 역시 임금이나 상여금 문제가 아닌 탓인지 무덤덤했다.

이래서 N라면의 위장병환자는 점점 늘어만 갔던 것이다. 오후 2시 퇴근해 집에 가면 3-4시로 시장하니 뭐든 먹게 되고, 그러면 또 저녁식사를 그르치게 된다. 가장의 식사습관이 이러하니 자연 가족들의 식사습관도 불규칙해진다. 우리 노동자도 사장님들처럼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식사를 해야 하는 위장임에도 그런 것이다. 이러다보니 차라리 2교대로 되돌아가자는 불만이 팽배했다. 하루 11시간 2교대가 힘들어 8시간 3교대로 바꿨는데 더 힘들다니 충격이었다.

 

*

 

19896, 안양시내에서 해고자들을 만난 후 땡땡 거리로 해서 야간 출근을 할 때였다. 지금은 지하차도가 생겨 건널목이 없어졌지만 당정리 철도건널목을 이 일대에서는 땡땡 거리라 불렀다. 땡땡 거리에서 회사까지는 남자걸음으로 6-7분 거리, 가로등 하나 없는 음산한 거리였다. 6월이긴 하지만 저녁 8시가 다돼 어둑한 거리를 총총히 걷고 있었다. 저녁 8시가 출근시간이니 시간의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땡땡 거리를 100여 미터쯤 지났을 때였다. 회색 승용차가 내 옆을 스치듯 회사 쪽으로 질주해갔다. 계속 내달릴 듯 하던 승용차가 흐린내다리에 못 가 멈춰 섰다.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와는 30여 미터의 거리였다. 뒷자리에서 사람의 머리형체가 솟아올랐고 희미한 무언가를 보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비쳤다. 뒤에 오고 있는 나를 주시하는 듯 한 정면형의 머리 형상이었다. 군포 땡땡거리에서 구사거리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허름한 공장들이 들쭉날쭉 들어서있고 곳곳에 잡초만이 무성한 나대지가 방치돼있는 곳이었다. 그래 인근 공장에 볼일이 있거나 소변을 보는 일 외엔 정차할 일이 없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브레이크 등이 계속 점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내 출발할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회색승용차의 앞에도 뒤에도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오직 나하나 뿐이었다. 갑자기 긴장감이 돌며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 힘을 모으며 뒷좌석의 얼굴을 응시했다. 차안의 머리는 미동도 않은 채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가오고 있는 나를 응시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더욱 눈을 치켜 뜬 채 승용차를 향해 다가갔다. 차 번호판이라도 보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4-5미터 정도 접근했을 때였다. 회색승용차는 쏜살같이 N라면 쪽을 향해 내달렸다. 번호판을 막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설맞은 짐승처럼 질주하던 승용차는 N라면 정문을 10여 미터 지나 옆의 금성중공업 정문근처에 정차했다. 불빛이 없는 어둑한 구석이었다. N라면 정문 앞은 보안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 회사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나를 차안에서 식별하기가 쉬울 터였다. 차의 뒷좌석에서는 역시 사람의 머리 형상이 솟아올랐고 뭔가가 잘 보이지 않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를 또 확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정문 앞을 4-5미터정도 다가가자 회색 승용차는 이내 군포구사거리 쪽으로 내달렸다. 멍하니 서서 보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19895, 파업기간 중 해고자인 송인자양의 자취방이 털린 이후 늘 신경을 쓰던 터였다. 다른 것은 그대로 있고 유독 조합원과의 만남 일지와 노동교육 단체의 참가 일지,‘N 민주노조쟁취 추진위원회의 일지 등만 없어졌던 것이다. 그래 ‘N 민주노조쟁취 추진위원회의 모임을 자주 하던 정양의 집도 다른 곳으로 옮긴 터였다. 통장인 구멍가게 아줌마가 필요이상으로 관심을 보이며 꼬치꼬치 캐물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조합원들과의 만남도 주변을 둘러보고 조금이라도 느낌이 이상하면 가차 없이 장소를 옮겨왔던 터였다. 안 그래도 인근 타 회사의 민주노조 세력에 대한 감시와 미행사례를 숱하게 접하며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오던 터였다. 그럼에도 막상 직접 겪고 보니 전율이 스쳤다.

그 후 10여일만인 610일이었다. 저녁 830분경 출근투쟁을 마친 해고자들과 함께 몇몇이 군포 신사거리에 있는 문찬식이네 집을 갈 때였다. 봉고차를 몰고 가던 문찬식이 백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보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했다. 회색 승용차가 계속 따라오는 것 같다는 거였다. 일부러 큰길이 아닌 골목길로 가도 계속 따라온다는 거였다. 신사거리 문찬식의 집골목으로 접어들자 문제의 회색 승용차도 일정 거리를 두고 골목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문찬식은 길가에 차를 세운 후 비디오카메라를 갖고 오겠다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2인의 해고자를 비롯한 봉고차안의 4인은 태연을 가장하며 회색승용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차안의 사람도 미동도 없이 봉고차만을 응시하는 눈치였다. 회색승용차의 사람은 운전석의 남자 한 명뿐인 것 같았다. 십여 미터의 거리였다. 이삼십 분이 되도록 사내의 머리는 처음 그대로 우리 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문찬식이 비디오카메라와 몽둥이를 들고 왔다. 어른 팔뚝 굵기의 한발은 됨직한 각목이었다. 문찬식이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앞장섰고 정동철이 각목을 뒤로 숨긴 채 뒤따랐다. 그냥 지나치듯 회색 승용차를 향해 다가갔다. 승용차가 손에 닿을 정도로 다가갔을 때였다. 갑자기 승용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사내가 내튀었다.

 

도둑이야!”

 

정동철이 땡고함을 치며 사내를 뒤따랐다. 그러나 사내는 말 그대로 비호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방서쪽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가쁜 숨을 내쉬며 정동철이 되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수상한 차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거였다. 승용차 문을 열어본 우리는 아연했다. K도경 대공과 소속 나연주(가명)형사의 신분증과 두 해고자의 확대증명사진이 서류봉투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력서, 신원증명서 등 입사 때 회사에 제출했던 서류들과 해고자들과 민주파 노동자들의 동태를 기록한 메모, N라면 안양공장의 노무차장인 장영만의 명함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봉고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두어 시간을 근처 건물에 숨어있자 한 사내가 조심조심 나타났다. 그는 순순히 미행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하였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약속하는 각서를 받았다.

이 사실은 2일후 불순조작 음모를 폭로한다!’라는 제목으로 해고자 소식지를 통해 조합원들에게 폭로됐다. 그러자 다급해진 회사는 다음날 생산본부장 명의의불온유인물 살포에 대하여란 제목의 대자보를 안양공장 곳곳에 붙였다. 일부 불순세력들이 이를 이용해 조합원들을 선동하려 한다는 판에 박힌 내용이었다. 회사의 노무차장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명함을 준 것뿐이라는 얘기였다. 다음은 당시 해고자들이 조합원들에게 배포했던 폭로유인물과 회사 측의 반박 대자보이다.

 

민중의 지팡이가 회사 측과 한패인가?

 

우리를 미행한 사람 중 한명은 K경찰국 대공과 나연주 순경이었으며, 그는 우리를 미행한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 하였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경찰 신분증, 주민등록증 증거 확보)

 

해고도 서러운데 불순분자 웬 말이냐!!

 

이 일은 우리 두 사람을 해고 시킨 후 회사의 조치가 부당하다는 것을 아는 많은 조합원들이 우리 두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자 궁여지책으로 조합원들과 우리 해고자들을 이간시키기 위하여 경찰에 의뢰하여 불순분자 딱지를 붙이려는 술책임이 분명하다.

 

부당해고 즉각 철회하라!!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우리가 빽마저 없어서 부당해고를 당하고 직장을 쫓겨나 살길이 막연하여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회사 측은 악랄하게도 불순분자로 몰아 우리를 두 번씩이나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해고자 두 사람은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조합원 여러분의 격려만 있다면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나 복직되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1989. 6. 12.

N라면 해고자 정동철, 송인자.

 

불온유인물 살포에 대하여

 

최근 3년 동안 가장 높은 실업율과 무역수지가 넉 달째 적자를 보고 있고 외국기업이 고임금과 노사분규 등으로 투지매력을 잃고 속속 떠나고 있는 경제현실 속에서 각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혼란한 정치 사회적 환경이 기업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더하고 있어 한국경제가 실질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이때, N가족 여러분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직장생활이 더더욱 요청되고 있는 현실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존은 우리들의 책임이며 공개법인 N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부여되는 어떠한 외부적 환경요인도 우리들 스스로가 해결하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 공고에서도 밝힌바와 같이 외부세력과 규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며 이는 우리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므로 단호히 배격하고 질서와 화합 속에서 밝은 직장을 만들고자 당부 드린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모두 시인하고 승복한 두 사람이불순조작 음모를 폭로한다!’는 등의 유인물로 자신들을 오히려 변호하고 N 가족의 한마음을 분열시키려는 행위가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명백한 사실을 밝혀 드립니다.

 

면직된 두 사람은 그 다음날부터 회사 정문에서 이영제가 한 행위와 똑같이 머리띠, 플래카드, 및 각종 유인물들을 동원해 회사를 출입하는 전 N가족의 동정을 모으려고 행동하고 있으며 지난 418일자로안양노동상담소에 대하여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소장 정기채를 구속하는 등의 과정에 있어서 현재 공개수배중인 경기남부노련 의장 임기순, 간사 허재홍에 대한 조사 중 정동철과 송인자가우리자리에 출입한 사실이 확인되어 15일전쯤 경찰국 수사요원이 두 사람에 대한 인적사항 요구 차 방문하였을 때 장영만 차장이 명함을 건넨 사실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여 민중의 지팡이가 회사와 한패등으로 왜곡 해석하여 사실과 다른 내용을 유포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동정을 해주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면직된 두 사람은‘N이 아니며 어떠한 술책과 기만에도 여러분들의 지혜로운 판단에 따라 슬기로운 행동을 해줄 것을 당부 드립니다. 아울러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내 직장을 위해 여러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어 영원히 후세에 물려줄 N을 위하여 다 같이 힘 모아 노력합시다. 끝으로 무더운 하절기에 전 N가족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1989. 6. 13

생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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