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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1993년 10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3-10-01 조회 325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


노동법개정을 둘러싼 1993년 정세

자본과 국가권력은 1991년 하반기에 노동관계법을 개악하려고 노골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진영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반발에 부딪히자 사회적 합의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한국노총, 경총, 학계 등으로 노동법개정 연구위원회를 구성한 뒤 연구결과에 따라 노동법을 개정하겠다 밝혔다. 이후 정부는 시기를 미루다가 1993년 정기국회 때 노동법을 개정하겠다고 했다가 다시 백지화했다.

1993년 초까지는 노동법 개정안이 자본의 요구를 관철하는 형태로 제출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19933ILO가 민주노조 진영이 핵심적으로 요구하는 복수노조금지 조항 삭제 공무원·교사의 단결권·단체행동권 보장 3자개입금지 조항 삭제 등을 한국 정부에 권고하면서 점차 노동법개정 투쟁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됐다. 5월에는 노동부장관 스스로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무력화시킨 3자개입금지조항을 삭제하겠다고 밝혔고,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배권력은 자본의 일방적 우위가 관철되는 노사관계를 정립하고 정부의 극히 부분적인 개혁조치마저 중단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탄압하는 동시에 노동법 개악을 획책했다. 지배권력은 무노동 부분임금제와 같이 노동부가 그동안 탈법적으로 운용해 오던 지침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대법원 판례에 준해 개정하려던 것마저 반대했다.

나아가 72일 김영삼과 재벌 총수들의 청와대 만찬 이후 대검찰청 등 공안기관이 전면에 나섰다. 3자개입금지 조항을 근거로 전노협, 현총련, 대노협 등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구성단체의 주요간부를 수배·구속함과 동시에 파업 사업장은 공권력 투입으로 위협했다. 민주노조 진영이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조항 어느 것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어 노동부는 729일 고용정책기본법, 고용보험법, 직업안정법, 근로자파견법 등 고용 관련 4개 법률의 제·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1993년 정기국회 때 개정을 공언한 노동법에 대해서는 824, 각계의 이해대립이 첨예하다는 이유로 1994년에 개정하겠다며 사실상 백지화했다. 이는 노동법개정 투쟁을 1993년 하반기 중점사업으로 설정해 온 민주노조 진영이 대중적 동력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조건으로 작용했다.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의 목표

전노협은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의 목표로 다음 네 가지를 설정했다.

첫째, 노동법개정이 불가피함을 대내외적으로 인식시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상의 독소조항을 철폐하고,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저지해 자주적 단결권을 쟁취하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유지·개선한다. 구체적으로 복수노조금지 조항 삭제,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보장, 3자개입금지 조항 삭제, 방위산업체 및 공익사업 노동자의 단체행동권 보장, 행정관청의 부당한 지배·개입·간섭조항 삭제, 정치활동금지 조항 삭제를 내용으로 하는 자주적 단결권 쟁취와 중간착취를 합법화하는 근로자파견법 도입을 저지한다.

둘째, 노동법개정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광범한 민주노조를 결집해 산업별 연합단체를 건설하고 전노대를 확대·강화함으로써, 산업별노조 건설과 민주노조 총단결의 굳건한 토대를 구축한다.

셋째, 민주노조 진영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을 추동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책임있는 세력이며 노동법개정이 반민주악법 개폐 등 사회개혁의 선결과제임을 전국민적으로 인식시켜 민주노조운동의 대국민적 입지를 강화한다.

넷째, 민족민주세력 및 국제노동조합운동과 연대·협력을 강화하며 이를 토대로 사회개혁을 촉진한다.

전노협은 이러한 목표로 정부가 노동법개정을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연내 개정과 근로자파견법 제정 저지와 법 개정 여부와 관계없이 제조업 내에서의 산업별 연합단체 건설을 위한 조직발전 전망을 집중적으로 모색했다.

 

노동법개정투쟁 사업의 전개

노동법개정 투쟁 진행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8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는 대중 동력 결집과 대국민 여론화에 중점을 두었다. 조합원 스스로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이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및 당면 현안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투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단위노조 대표자 수련회를 시작으로 교육·선전과 문화공연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국회 개원을 전후해서는 정책적 대응과 함께 노동법개정 배지달기운동을 전개했다. 10월 하순부터 12월 중순까지는 국회상임위원회 개최를 전후로 본격적인 대중투쟁에 돌입했고 전국노동자대회 뒤에는 단위노조 조합원들의 실천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전노협이 수행한 노동법개정 투쟁의 주요사업은 간부교육 및 대중강연회, 꽃다지 공연, 문화제, 노동법개정 투쟁 실천대(선동대) 조직사업, 노동법개정 요구 현수막 설치와 조합원용 배지달기 등이다.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이 진행했다.

첫째, 교육 및 강연회 사업은 광주, 성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수련회, 교육, 토론회 등의 형식으로 전개했다. 대중강연회는 5개 지역에서 조직했으나 간부들만 참여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따라서 간부교육은 거의 전 지역에서 다수가 참여해 예년보다 성과적이었던 반면 대중강연회는 경기, 서울, 부산, 대구지역 등에서만 전국노동자대회 전에 추진됐다. 특히 경주, 포항 천안, 대전, 목포 등 미가입 지역의 교육 및 강연이 확대됐다.

둘째, 전국노동자대회 참여 독려를 위해 예년과 달리 대회 전에 순회공연으로 계획한 꽃다지 공연이 7개 지역(수도권 포함)에서 진행돼 3만여 명이 참가했다. 이는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사업이었다.

셋째, 일상적인 선전선동사업을 목표로 한 노동법개정 투쟁 실천대(선동대)는 서울, 인천, 경기, 대구, 부산 등에서 조직됐으나 대개는 단위노조까지 조직화하지 못해 일상적 선전선동사업을 힘있게 전개하지는 못했다.

넷째, 노동법개정 투쟁 배지는 총 16,000여 개를 배포했고, 특히 경주와 광주, 대구, 마창, 전북 등에서는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배지달기를 실천했다.

 

국회 앞 철야농성투쟁 결정과 취소

824일 정부가 연내 노동법개정 연기방침을 발표한 이후 연이어 개최된 단위노조 대표자 수련대회에서 노동법개정을 위한 총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연내 노동법개정을 관철하기에는 어려움이 예상됐지만 정부가 1994년 상반기에 근로기준법 개악과 함께 집단적 노사관계법을 개정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1993년 전국노동자대회부터 1994년 상반기까지의 노동법개정 투쟁 계획이 준비돼야 했다. 이에 전노대는 전국노동자대회 이후 투쟁의 파고를 높이기 위해 총력투쟁 등을 계획했다.

총력투쟁의 하나로 전노협과 전노대는 전국노동자대회 이후 투쟁의 파고를 높이고 노동법개정 투쟁에 대한 조합원의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400~500명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철야농성을 계획했다. 대표자들은 두 차례의 회의에서 전국노동자대회 직후에 할지 간격을 두고 할지 등 철야농성의 시기, 불허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집회 장소를 어디로 할지 등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논의 끝에 여의도 둔치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을 하고 낮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당국은 여의도광장과 여의도 둔치마저 불허했다. 1031일 전국노동자대회 직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임시대표자회의에서는 일단 여의도 민주당사에 모여 농성을 하고 111일 여의도광장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오후 9시 여의도 민주당사에 모인 농성 대오는 111명이었다. 예상보다 적은 규모에 대표자들은 대책회의를 열어 농성을 취소했다. 조합원들은 전노대의 지도·집행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투쟁 분위기는 급속히 저하됐다. 이로 인해 전국노동자대회 이후 조합원 실천사업은 힘있게 전개되지 못했다. 전노협 중앙위원회와 대표자회의는 뼈저린 반성과 평가 속에 조합원들에게 국회 앞 철야농성 철회에 대한 사과의 글을 발표했다.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의 성과와 한계

해마다 노동법개정 투쟁은 대중투쟁을 조직해 법 개정을 이뤄내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정부·자본의 노동진영에 대한 분열·무력화 공세를 막아내고 민주노조운동의 연대를 유지·강화하는 방향에서 추진해 왔다. 1988년 연세대에서 국회 앞까지 노동법개정을 위한 가두행진 이래 노동법개정 투쟁은 전국노동자대회까지 교육과 선전, 대중행사를 통해 조직을 정비하고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의식을 무장하는 연례행사처럼 진행해 왔다.

1993년은 예년과 달리 노동법개정, 근로자파견법 저지,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저지라는 절박한 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과제 앞에 필사즉생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1993년 노동법개정 투쟁에 노조운동의 사활을 걸고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그러나 정부의 노동법개정 연기 발표로 노동법개정 투쟁에 대중동력을 모아내기 어려워져 잠시 주춤했지만, 민주노조 진영은 정부 방침에 맞춰 연내 노동법개정 목표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따라 노동법개정 투쟁의 수위를 낮추지 않고 진행했다. 하지만 광범한 대중투쟁을 불러올 수 있는 계획은 꽃다지 공연, 배지달기, 지도부 농성, 선전전뿐이었다. 조합원의 투쟁을 통해 노동법개정 투쟁 전선을 상승·발전시켜 내려는 목적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계획이 부족했다.

대중투쟁 계획이 부족했던 이유는 조합원들 상태에 따른 객관적 판단과 그에 따른 대안을 내오지 못한 데 있다. 과제는 절박하나 주객관적인 조건이 좋지 않을 때 대중은 자발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 노동법개정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한 원인은 계획의 부재, 즉 조합원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계획과 치열한 노력의 부족이었다.

1993년은 전국노동자대회를 예년보다 2주 정도 앞당겨 치렀다. 노동법을 개정하고 근로자파견법과 공공자금관리기금법 도입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상임위원회가 열리는 시기에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서 국회에 압박을 가하고 집중된 힘을 모아 대회 이후 강력한 대중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전국노동자대회를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할 투쟁으로 설정한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전국노동자대회의 상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고, 대회 이후 계획했던 투쟁도 힘있게 진행하기 못했다. 결국 하반기 투쟁은 어느 해보다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한 대국민 선전활동, 실천대 활동, 교육활동과 상층에서의 대국회 활동을 통한 정치력 강화 등은 운동의 내용과 방식을 한층 변화·발전시켰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주객관적으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지역과 단위노조 간부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 조합원들이 전국노동자대회에 예년만큼의 규모로 참여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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