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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코마조선노동조합 체불임금 투쟁
시기 : 1991년 3월 2일 ~ 3월 24일
코리아타코마조선 현황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주)은 마산(현 창원)에 있는 주요 방위산업체로 1972년에 설립돼 50여 종 400여 척의 특수선박(함정)을 건조했다. 특히 1980년 중반부터 한국에서는 최초로 중남미와 동남아 등 7개국에 수출했다. 그러나 경영악화로 1990년 8월에 회사 정리절차 개시 신청을 하고 1990년 11월 12일 마산지법으로부터 정리절차 개시 결정을 받아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나 정상화되지 못하고 체불임금만 누적된 가운데 표류 중이었다.
코리아타코마는 자본금 82억 원으로 성장을 거듭하여 오다 1980년 5월 17일 당시 사주 김종락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주식의 49%를 환수당한 것을 회사가 부담한 데다 이후에는 조선업 불황에 수주의 불균형이 겹쳐 채산성이 악화됐고, 1987년 인도와 계약한 수출선이 원화절상으로 환차손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악화요인에 재투자 없이 차입자금에 의존해 과도한 이자를 부담한 결과(인건비와 동일, 월 이자만 7억 원) 사주의 권위를 위해 방대한 조직 운영에 따르는 낭비 지출, 군 장성 출신이 경영을 담당한 데 따른 경영능력 부재와 무책임한 편의지향적 경영방식 등이 겹쳐 노동자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경영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1989년 공안정국과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정책에 편승한 노조말살 정책과 계속되는 임금 체불, 상식에 어긋난 부실경영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경영자는 자기의 책임을 은폐한 채 노동조합의 과격한 투쟁과 임금인상 때문이라며 경영악화에 따른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했다.
회사측은 인건비 지출이 1986년과 1989년을 비교할 때 2배 정도 증가했다고 주장했지만, 인건비 집행액이 늘어난 이유는 임직원이 1986년 1,136명에서 1989년 1,374명으로 늘어난 것과 1986년 250%로 삭감되었던 상여금이 500%로 재인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행 통계자료에 따르면 임원 보수는 동종업체가 매출액의 0.1%인데 비해 판공비(약 8,800만 원 추정)를 제외하고도 0.5%로 5배나 더 받고 있었다. 회사는 또 매출액과 생산성이 감소했다고 주장했으나, 매출액은 1986년 284억에서 1989년 643억으로 도리어 2.3배가 증가했다. 또 1인당 매출액 역시 1986년 2,300만 원에서 1989년 4,800만 원으로 증가했다. 1989년 한 해 이자로 지출된 70억 원이 없었다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창출된 것이며, 조합원당 부가가치로 환산하면 2배가 넘는 액수다. 회사는 또 노동조합의 불법행위로 공정이 지연돼 1988년 44억, 1989년 55억, 1990년 99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회사가 선주에게 공정지연에 따른 지체 보상금을 부담한 적이 없었다.
임금 체불과 조합원 생계의 위협
당시 임금 체불은 조합원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다.
1990년 2월부터 1991년 2월까지 월 급여 체불 총액은 21억 2천만 원에 달했고, 같은 기간 상여금 역시 계속 지연 지급된 데다가 12억 남짓은 체불 상태였다. 이에 따라 월 급여와 상여금에 포함된 재형저축 불입액도 3억 가까이 체불돼 자동해약 위기는 물론 계약 만기 시 엄청난 이자 손해를 불러올 상황이었다.
특별상여금도 마찬가지여서 1990년 7월 28일까지 지급해야 할 하기휴가비 1억 2천만 원은 2달이 지나서야 지급됐고, 1990년 연말까지 지급돼야 할 김장보너스는 1991년 3월까지 체불됐으며, 1991년 설에 지급됐어야 할 설날 세모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퇴직금 체불 총액은 7억원, 자녀학비 보조금 체불액도 7,300만 원에 달했고, 임금체불에 따라 신용협동조합 출자금, 국민연금, 연․월차 휴가 환불금 등도 모두 체불됐다. 이렇게 해서 체불 총액은 무려 49억 2,400만 원에 이르렀다.
코리아타코마조선은 적자와 방만한 회사 경영으로 자금난을 겪어오다 임금과 부채를 해결할 길이 막연해지자 1990년 8월에 회사 정리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1990년 11월 12일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나 3개월이 지난 뒤에도 체불임금과 회사 정상화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계속된 체불임금으로 조합원 가족의 생계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코리아타코마 조합원들은 체불임금으로 인한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하루빨리 체불임금을 해결하고 회사를 정상화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한편, 회사와 정부 당국에 호소와 진정을 하기도 했다. 이에 “발주공사 대금을 조기 지급해서라도 연내(설날 전)에 체불임금을 해소하라”는 발표가 있었고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회사는 노동자들의 생계를 외면해 버렸다. 이에 따라 평균 나이 37살에 4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조합원들은 유일한 소득이자 생계수단인 임금이 1년 내내 체불되고 6개월간이나 누적되면서 생활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이같은 체불임금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자연 감원으로, 종업원 수는 1,314명에서 980명으로, 노동조합 조합원 수는 10,054명에서 750명으로 줄어있었다.
코리아타코마조선의 임금체불은 조합원들의 생계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코리아타코마조선은 연간 매출액이 600억 원이 넘고 해외 교역 면에서도 중요한 입지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기자재를 생산 납품하는 협력업체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어 결국 연쇄 도산으로 이어졌다.
코리아타코마조선노동조합의 상경투쟁
사주 김종락은 방만한 기업운영으로 인한 경영난의 책임을 노동조합에 전가하며 1990년 9월 이후 줄곧 임금 체불로 일관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채우기 위한 노력은커녕 오히려 김종락을 비호하며 그에게 기업 포기 선언을 유도하며 “코리아타코마의 체불임금은 비지니스 차원의 문제일 뿐”이라는 무책임한 언동으로 노동자들의 고통을 방관했다. 게다가 회사는 임금체불에 항의한 조합원 14명을 해고하고, 21명을 정직 처리하는 등 총 57명을 징계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체불임금 해소와 회사 정상화 촉구를 위한 1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며 조합원을 설득해 작업을 하고 회사 정상화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권과 자본측은 노조의 이러한 행동을 비웃으며 “회사를 살리려거든 노동조합 집행부가 사퇴하고 전노협과 마창노련을 탈퇴해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인수자로 내정된 한진중공업도 “전노협, 마창노련 탈퇴와 노동조합 집행부 사퇴 없이는 인수할 수 없다”고 맞장구쳤다.
결국 코리아타코마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겐 생명줄과도 같은 임금을 6개월씩이나 틀어쥐고 생계를 압박해 노동조합 탄압에 악용하는 정권과 자본측의 만행을 온 천하에 폭로하고, 아울러 인수를 미끼로 한 정권과 자본의 노동조합 농락 행위를 중단시켜 인수 확정으로 회사를 정상화하기 위한 상경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3월 2일부터 25일간의 상경투쟁에도 사태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자 노조는 25일간의 상경투쟁 끝에 ‘장기전’을 위해 일단 마산으로 내려갔다. 노조는 “체불임금 해소나 회사 정상 가동에 대해 보장이 없는 채로 내려가게 돼 안타깝지만 이번의 23일이 아니라 2백30일, 2년 3개월을 싸울 태세로 곧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투쟁의 각오를 밝혔다.
1991년 상경투쟁 일지
1월 노조는 회사 정상화를 위해 5개월 임금 체불에도 조합원을 독려하여 작업 지속. 반면 정부는 한진중공업을 내세워 코리아타코마 인수 의사를 표명토록 유도했고, 한진중공업은 노동조합이 강성이어서 인수에 걸림돌이 된다고 신문에 발표.
2월 노조는 설 전 체불임금 해소를 위해 상경투쟁 준비.
2월 2일 코리아타코마의 법정관리인 “2월 11일 이전에 체불임금 5개월분 지급” 발표.
2월 6일 법정관리인이 인수자로 내정된 한진중공업측 의사임을 내세우며 “노조 집행부 퇴진 없이는 인수는 물론 체불임금 해소 어렵다”고 2월 2일 발표 번복.
2월 7일 한진중공업, 노조와 접촉 통해 “노조 집행부 퇴진 없이는 인수 불가능” 입장 전달.
2월 11일 노동조합, ‘체불임금 해소와 인수 확약’을 조건으로 법관리인과 합의서 작성하고 집행부 퇴진 발표.
2월 11일 법정관리인, 외부의 압력을 내세우며 합의서 번복하고 “전노협, 마창노련 탈퇴 없이 체불임금 해소 불가능함” 공고 후 잠적.
2월 13일 법정관리인, “본인의 노력으로 신탁은행을 설득하여 2개월분 급여 11억 원을 신용 대출받게 됐다”고 발표 후 20시에 2개월분 임금 지급.
2월 19일 법정관리인, 사원 조례 석상에서 합의서 번복 공식 선언.
2월 19~22일 관리자들로 구성된 ‘구사대’가 조합원을 상대로 “전노협, 마창노련을 탈퇴해야 체불임금 해소와 인수가 확정된다”는 서명작업 전개.
2월 23~28일 법정관리인, 명령 휴가 실시하고, 관리자들은 이 기간에 조합원 집을 호별 방문해 서명작업 전개하며 노동조합 분열 획책.
3월 2일 조합원 400명 상경투쟁 결행.
3월 3일 ‘한진중공업 3월 9일 코리아타코마 조선 인수 가계약 발표’ 기사화
3월 4일 노동부 직원 농성장 방문, 한진 가계약 내세워 상경투쟁 중단 종용. 이에 노조는 사실 확인 위해 한진측과 접촉 시도했으나 한진측이 접촉 기피.
3월 4~6일 정부에 임금체불 해소를 촉구하고 임금 체불을 노조탄압에 악용하는 정권과 자본의 만행 규탄하는 사내유인물 배포.
3월 7일 지하철 서울역·충무로역 등에서 조합원 400여 명 집회(조합원 19명 연행, 당일 석방).
3월 8일 지하철 서울역에서 집회(조합원 1명 연행 구류 3일).
3월 9일 한진 “상경투쟁하는 노동조합이 무서워 계약 못하겠다”며 가계약 백지화.
3월 11일 상경투쟁 70명 추가 동참, 총 470명 상경투쟁.
3월 12일 한진 본사 앞에 150여 명 방문해 면담 요구, 경찰은 전원 연행해 난지도, 파주, ‘만남의 광장’ 등에 버림.
3월 13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 주선으로 노동부 장·차관 면담.
3월 14일 한진 “코리아타코마 인수 계획 백지화” 선언 및 “인수팀 해체” 발표. 한진과 면담 요구하며 오전 11시 30분부터 300여 조합원 한진 본사 방문. 경찰은 조합원 전원 닭장차로 연행해 다시 난지도 등에 버림(조합원 다수 부상). 강중철 노조 부위원장이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받는 동안 조합원 150여 명 항의 방문해 저녁 6시경 석방.
3월 15일 “서울시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제7탄) 유인물 배포.
3월 18일 한강 둔치에서 체육대회
3월 23일 성문밖교회 집회
3월 24일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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