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처음처럼 단결과 투쟁을, 조선노동공제회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시인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다. 이 시구의 본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노동자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일 년 열두 달이 모두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닌 달이 없이 살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가장 잔인한 달’에 항상 순응하거나 굴복하지만은 않았다. 끊임없이 그것을 ‘참 자유와 평등의 달’로 바꾸기 위하여 단결하고 투쟁했다. 89년 전 1920년 4월 이 땅 위 하늘 아래서도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고 우렁찬 함성이 메아리쳤다.
노동문제는 생활난 문제
3.1운동 1주년이 지난 한 달 뒤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최초로 전국적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678명의 선진적 노동자들과 노동운동가들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하여 조선노동공제회를 만들었을까?
그것을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당시에 발표된 주지서(主旨書)를 통해서 보자. 여기에서 노동공제회는 “노동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고 선언하고, 나아가 그 목적은 “자력으로써 자아(自我)가 의식(衣食)하는 동시에 애정으로써 호상부조(互相扶助)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圖)하며 공동의 존영(存榮)을 기함”이라고 하여 노동자들이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꾀’하는 것 등에 있다고 세상에 알렸다. 1920년 일제 식민지시대나 2009년 오늘날의 ‘대한민국시대’나 노동자들의 ‘생활이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주지서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배경이 되는 당시 우선적으로 해결할 노동문제는 노동자들의 ‘목전(目前)의 생활난 문제’ 등이라면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 조선노동계를 일고(一顧)하건대 일반노동자는 여하한 지위와 여하한 생활상태에 처하였는가. 이에 재(在)하여는 누구든지 과거의 불평을 호원(呼怨)하고 장래의 공평을 창도하며 지위와 조건문제 등을 제기할 여가도 없이 목전의 생활난을 절규함이 우리의 실정이요 또 이 문제를 선결함이 우리의 급무로 인정할 것은 적확(的確)한지라.
보아라 조석(朝夕)으로 연락부절(連絡不絶)하는 남대문역의 단표객(單瓢客)은 누구이며 엄 동염하(嚴冬炎夏)에 산로하반(山路河畔)의 시체는 누구이며 동옥서감(東獄西監)에 고립황의(藁笠黃衣)의 복역자는 누구이며 대가소항(大街小巷)에 유리호읍(流離號泣)하는 유동소아(幼童小兒)는 누구인가를 - 필시 태반은 노동실업자가 아니면 빈한가(貧寒家)의 자녀일까 하노라. 1919년 4월로부터 대략 5개월에 긍(亘)하여 용산철도국을 위시하여 각 공장 각 점포의 종무원(從務員)과 심지어 통신사무원까지 동맹파업을 징(徵)하게 된 것은 생활난 문제의 해결을 요구함으로부터 표현된 사실이 아닌가.”
조선노동공제회는 이러한 ‘생활난 문제’ 등의 당면한 노동문제 해결에서 긴급을 요하는 과제로서 소위 종합선발(綜合選拔)한 “노동자 교육, 경제, 위생”의 세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노동공제회는 그 실천적 대책으로서 지식계발, 품성향상, 환난구제, 직업소개, 저축장려, 위생장려 등을 제시했다. 덧붙여서 노동공제회는 일반 노동상황의 조사연구를 통하여 “우리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를 개선함”이 ‘최후의 이상’이라고 표명했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던 조선노동공제회 회원들은 주로 신문 배달부, 인력거부, 지게꾼, 물지게꾼 등의 자유노동자들과 정미공, 인쇄공, 연초공장 직공 등의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지방지회 회원들 중에는 소작농민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선진노동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와 농업 노동자들로 구분했으며 소작인을 농업 노동자로 보았다.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였던 『공제(共濟)』 창간호(1920년 8월)
노동자해방,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창립 당시 678명이었던 조선노동공제회의 회원들이 1921년 3월에 이르러서는 1만 7,259명으로 급속하게 증가했다. 노동공제회는 전국산업 중심지들 즉 평양, 대구, 안악, 개성, 혜산, 정읍, 황주, 군산, 북청, 신창, 신천, 광주, 안주, 영흥, 안동, 인천, 영주, 강화, 양양, 고산, 청진, 진주, 경주 등에 지방지회를 두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자기의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노동강습소’, ‘노동야학’ 등을 설치하고 기관지 『공제(共濟)』를 1920년 8월부터 발간하여 노동자들 계몽에 힘썼다. 특히 잡지 『공제』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논설들을 다수 실었다. 생활난 문제 등의 노동문제 발생원인과 해결방안을 노동공제회 창립 당시와는 다르게 내놓았다.『공제』창간호의「권두일성(卷頭一聲)」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동자들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불리한 ‘자본주의 사회와 제도’에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자의 혈(血)의 결정을
한(汗)의 수확을
무리하게 교묘하게
약탈을 속행(續行)하는
공인(公認)하는 현 사회의 제도
모든 사회적 결함과 죄악은
모든 개인적 고민과 비애는
이러한 모순당착의
비합리적 제도로부터
유발(誘發)된다. 양생(釀生)된다.”
역시『공제』창간호와 2호(1920.10)에 실린「전국 노동자제군에게 격(檄)을 송(送)하노라」에서는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금전으로써 매매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노동자들의 참혹한 처지와 그 제도의 죄상(罪狀)을 신랄하게 폭로했다.
『공제』2호에 게재된「노동운동의 사회주의적 고찰」에서 “노동문제의 해결책으로 온정주의니 협조주의니 하는 것은 자본가의 주구의 헛소리(?語)라 일고(一顧)의 가치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동문제의 종국적 해결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해방”에 있다면서 “그러하므로 노동자가 자본가와 노동을 매매하는 예속 관계를 탈각하지 못하는 한에는 노동문제는 결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자유 독립의 생산자라는 것은 이 예속 관계를 벗어나는 경우를 이름이니 자유 독립의 생산자가 아니고는” “천부(天賦)의 재능대로 생산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수용(需用)대로 소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재능대로 생산하고 수용대로 소비하기까지 해결치 못한 노동문제는 전혀 허위의 해결이다.”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이 실현되는 참 자유와 평등 사회에 가서야 노동문제가 종국적으로 해결된다는 것과 이를 위한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강조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공제』창간호의「권두일성(卷頭一聲)」에서 다음과 같이 ‘인류자체 최후의 혁명’으로서 ‘자유의 서광과 평등의 완성’을 세상에 외쳤다.
“아 - 인류자체
최후의 혁명
인류영원의 욕구기원(欲求祈願)
광명의 묵시(?示)
아 - 자유의 서광(曙光)
아 - 평등의 완성(完成)
아 - 이것이
최초의 일성(一聲)이다
최후의 일성이다.”

조선노동공제회 교육부의 노동야학 강습생 모집 광고(1920년 10월 10일)
나의 벗인 나여
지금으로부터 89년 전 1920년 4월 최초의 전국적 노동운동 단체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 배경이 되는 당시 우선적으로 해결할 노동문제는 노동자들의 ‘목전의 생활난 문제’ 등이었다. 이러한 노동문제는 2009년 오늘날에도 재연(再演)되고 있다. 나의 벗인 나여.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나의 벗인 나여.
이제 다시 노동문제가 재연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단결하고 투쟁했던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추억’하고 싶지 않은가?
나의 벗인 나여.
이제 다시 부르주아 계급의식에 마취되어 ‘잠든’ 노동자 계급의식의 ‘뿌리’를 노동자 계급본성의 ‘봄비’로 깨우고 싶지 않은가?
나의 벗인 나여.
이제 다시 ‘가장 잔인한’ ‘죽은 땅’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를 ‘라일락’ 같이 아름답고 향기 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무언가 하고 싶지 않은가?
나의 벗인 나여.
이제 다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이 실현되는 참 자유와 평등 사회를 ‘욕정’하고 싶지 않은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엘리엇의 시 『황무지』(1922) 중에서
나의 벗인 나여.
뜬금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대에게 이참에 생각나는 사회학자 월러스틴의 말을 전해 주고 싶네. 그는 “하나의 체제로부터 다른 체제로의 이행의 시기”인 오늘날은 “엄청난 투쟁의 시기이고, 거대한 불확정성의 시대이며 그리고 지식의 구조들에 대해 위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시대”라면서 우리의 세 가지 임무로서 지적, 도덕적, 정치적 임무를 제기했네. 그는 우선 지적 임무로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현재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네. 그 다음, 도덕적 임무로서 그는 “우리는 이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는지 결정하는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적 임무로서 그는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체제가 가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네.
나의 벗인 나여. 어떻게 하면 자본과 국가가 지배하는 현실을 지양하여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 즉 ‘참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나의 벗인 나여. 대답해 주게. 어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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